서민대통령 노무현의 등장과 죽임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 90회] 노무현의 당선은 정치적인 승리 이전에 '인간승리'였다

등록 2019.05.02 17:56수정 2019.05.0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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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자 확실' 보도 이후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민주당사에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권양숙씨. '당선자 확실' 보도 이후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민주당사에 들어서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부인 권양숙씨. ⓒ 마이너

 노무현은 2012년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선거결과 노무현 1,201만 표, 이회창 1,144만 표로, 57만 표의 차이였다. 노무현은 거의 독자적인 힘으로 거대한 한나라당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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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통령선거 벽보 16대 대통령선거 벽보 ⓒ 임성훈

10년 전 김영삼은 민자당과 합당하여, 5년 전 김대중은 김종필 자민련과 연합하여 당선된데 비해 노무현은 다른 정치세력과 제휴하지 않고 새천년민주당 단독으로 승리하였다.

제휴는커녕 투표 전날인 18일 밤 10시에 '단일화 협상'으로 지원키로 했던 정몽준이 노무현 지지를 철회하는 변신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선되었다. 투표결과 60대 이상은 이회창 후보, 호남과 20~30대 젊은이들이 압도적으로 노무현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현의 당선은 정치적인 승리 이전에 '인간승리'였다. 중학교 입학금이 없어 '외상입학' 할 정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이승만 대통령 생일 기념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백지동맹'을 주도할 만큼 어릴적부터 남다른 정의감을 갖고 성장하였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막노동판을 떠돌면서 사법고시를 꿈꾸던 중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꿈을 이루었다.

1977년 대전지법 판사로 부임했으나 이듬해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세무ㆍ회계 전문 변호사로서 명성을 쌓으며 돈을 크게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81년 전두환 정권기 부림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사회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이후 노동자의 벗이 되고 민주화운동가 변론 전문가가 되었다. 5공 폭압에 맞서 '거리의 변호사', '아스팔트 위의 전사' 가 되어 민주화운동의 전선에 섰다.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 노무현 공식홈페이지

제13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그해(1988년) 11월 '청문회 스타'로 각광을 받았으나 1999년 노태우ㆍ김영삼ㆍ김종필의 3당야합을 거부하고 김영삼과 결별함으로써, 영남지역 정치인의 가시밭길을 외롭게 걷게 되었다.

이후 지역주의 청산을 위한 헌신적 노력을 전개하며 1998년 서울 종로의 보궐선거에서 승리했으나 2000년 총선에서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패배했다. 그의 거듭된 '아름다운 패배'는 국민의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최초의 정치인 펜클럽 '노사모'를 탄생시켰다.

2000년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국민경선에 뛰어들어 '이인제 대세론'을 뒤엎는 파란을 일으킨 그는, 대통령선거 본선에서 역시 '이회창 대세론'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무현은 취임사에서 "새 정부는 개혁과 통합을 바탕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더불어 사는 균형발전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시대를 열어나갈 것" 임을 천명하였다. 그는 일체의 권위주의를 벗어던지고 국가권력을 헌법정신에 맞춰 제자리에 돌려놓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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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광고 한 장면. 노무현 후보는 문성근씨가 격정적인 연설을 하는 도중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되는데 작은 역할을 했다. ⓒ 노무현캠프

노무현은 정치인이면서도 정치적이지 않았고, 최고 권력자가 되고서도 권력을 독점하기보다는 분권을 지향하고, 권모술수나 암투와는 거리가 먼 순결무구한 정치인이었다. 그는 속물 정치인들이 특세하는 정치판을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무현의 존재는 파당적 이해에 민감한 정계에서 외톨이가 되었고 집권 후에는 검찰개혁ㆍ언론개혁ㆍ사법개혁ㆍ국가보안법개폐 등이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집중적으로 견제되고 '제거'의 대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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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3월 9일 유용태, 홍사덕 외 157인의 의원이 서명발의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민주당 박준 원내행정실장(왼쪽)이 의사국장에게 제출하고 있다. ⓒ 이종호

집권 초기부터 노무현 정부의 개혁정책은 야당과 보수언론에 발목이 잡히고, 출범 2년여 만인 2004년 한나라당과 잔류 민주당 의원들에 의해 헌정사상 초유의 헌재에 탄핵소추안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탄핵소추안이 헌재에서 심의 중일 때에 실시된 제17대 총선에서 국민은 여당에 과반수 의석을 보내주었다.

국민의 힘으로 탄핵소추가 거부되면서 헌재도 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혁신정책으로 '4대개혁입법'을 추진했으나 다수 여당의 무능과 기득권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쉽지 않았다.

노무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신행정수도 건설로 전국의 균형발전, '대연정'을 통해 지역주의 극복, 평화ㆍ자주 외교정책 등을 실시하고자 했으나 그때마다 보수세력에 발목이 잡혔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 규명위원회,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재산국가귀속위원회,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과거사 청산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제주 4.3평화공원에서 4.3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였다. 김대중 정부의 남북화해 협력을 이어받아 2007년 10월 2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땅을 밟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에 이어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 백두산 - 서울 직항로 개설 등에 합의했다. 무엇보다 돈 안 쓰는 선거, 투명한 선거풍토를 조성한 것은 그의 업적으로 평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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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공개 사진] 청와대에서 노사모 회원들과 비공식 면담 도중 '해준 것도 없는데 나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는 노무현 대통령. (2006.8.27) ⓒ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제공

 
경제 정책에도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다. 수출 3000억 달러, 연평균 경제성장률 4.3퍼센트,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의 성장을 이루었다. 외환보유액은 김영삼 정부에서 외환위기를 겪을 때 37억 달러에 불과했던 것이 김대중 정부 임기 말에 1,214억 달러로 증가하고, 노무현 정부 출범 4년 만에 2,400억 달러를 기록함으로써 중국ㆍ일본ㆍ러시아ㆍ타이완과 더불어 세계 5대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보수세력은 '잃어버린 10년' 타령을 멈추지 않았다.

실책도 적지 않았다. 대북송금특검 실시, 한미FTA 졸속 추진, 이라크 파병 등은 아쉬움을 남겼다. 이른바 '4대악법' 개폐는 원내 다수당이 되고도 전략미숙 등으로 처리하지 못한 것은 실정으로 꼽혔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무현 죽이기'가 시작되었다. 퇴임 후 고향 봉하마을로 내려가 은거 생활을 하던 그에게 검찰ㆍ감사원ㆍ국세청ㆍ금융감독원 등 권력기관이 총동원되어 주변을 수사하고, 서울에서 반이명박 촛불집회가 시작되자 배후를 노무현 쪽으로 의심한 권력의 집중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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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18일. 화포천 주변에 있는 농지를 둘러보다 만난 농민과 함께 앉아 얘기를 나누는 대통령님 ⓒ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수구세력의 노무현 죽이기는 노무현을 파렴치범으로 그의 정치적 부활을 막으려는데 초점이 모아졌다. 오랜 지인의 회사 태광실업이 세무조사를 받고, 그의 고교동창ㆍ친인척ㆍ청와대 수석 등이 속속 체포되었다. 수구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도덕적 살인행위였다.

수구신문의 '노무현 죽이기'는 집요했다.

신문은 1면 머리기사로부터 사설ㆍ칼럼 등에서 노무현에 대한 비난ㆍ조롱ㆍ막말ㆍ저주로 도배질하고 사장이 바뀐 방송들도 다르지 않았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다져놓은 민주ㆍ평화ㆍ통일ㆍ공정의 초석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기득권세력이 들어섰다.

수구신문이 '노무현 죽이기'의 공범이라면 이명박 검찰은 주범이었다. 검찰은 언론플레이를 통해 노무현 일가가 "수십억 원을 챙겼다"는 혐의를 흘렸지만 당시 노무현은 자신의 집에 온 '진보주의 연구 모임' 학자들에게 차비도 제대로 주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노무현은 마침내 검찰 소환 조사를 받게 되면서 도덕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망신보다 추구했던 진보적 가치가 훼손되고 조롱당하는 것에 더욱 견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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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서거 둘째날, 봉하마을 현장 ⓒ 이윤기

 
그리고 결단했다.
자신의 죽음으로 순결성을, 진보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2007년 5월 23일 새벽, 고향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날렸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운명이다."라는 유서를 남겼다.

노무현의 서거 소식은 엄청난 충격과 파장을 몰고 왔다. 전국에서 추모의 물결이 흘러넘쳤다. 촛불 집회가 열리고 전국 각지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보도는 그의 서거와 관련 정곡을 찔렀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이명박 정권의 '몰이사냥'을 견디지 못한 선택이었다. 촛불에 덴 정권이 그를 배후로 의심해 정치적 보복에 나섰고, 그 하수인인 검찰은 내부에서조차 범죄성립이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로 무리한 수사를 감행했다. 보수언론은 여과없이 혐의사실을 공표하여 그를 구석으로 밀어 붙혔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현대사 100년의 혈사와 통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노무현대통령 #16대_대통령선거 #10.4선언 #노무현대통령서거 #서민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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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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