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단길' 열풍의 역효과

젠트리피케이션 유발하고 지역 문화 손실 커

등록 2019.04.12 22:16수정 2019.04.1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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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층들이 많이 찾고 있는 경주 황리단길 모습 ⓒ 한정환

 
바야흐로 나들이의 계절이 왔다. 가벼워진 옷차림처럼, 겨우내 무거웠던 몸도 한결 발랄해지는 봄이다. 마음은 설레이고 어깨가 들썩거려서 커피 한잔도 예쁜 카페에 가서 마셔보고 싶고 대충 때우던 혼밥도 아기자기한 식당에서 먹고 싶어진다.

검색창에 '서울 예쁜 카페, 맛집' 등을 검색해본다. 그런데 맛집거리를 리단길로 통칭하자고 연합이라도 한 듯 내가 알던 경리단길 외에, 송리단길, 연리단길, 망리단길, 용리단길 등 수도 없는 리단길이 검색된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부산의 해리단길, 울산 꽃리단길, 경주 황리단길, 대구 봉리단길, 광주 동리단길, 전주 객리단길 등 전국에 20여 개 이상의 리단길이 생겨났다.

엄밀히 말하면 새로운 길이 생긴 것이 아니라, 동네의 명칭 앞글자에 리단길을 붙여 원래 있던 골목(길) 상권 이름을 새로 만든 것이다.

서울시에서 운영·관리하는 토피스(topis)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지만 다음 카카오나 네이버 지도 등 사기업에서 운영하여 일반인의 요청으로 명칭이 변경 가능한 지도에는 리단길이 모두 검색된다. 지역 주민이나 점주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속해있던 지역의 명칭을 버리고 '짝퉁' 리단길로 불리길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리단길의 시초인 경리단길은 국군재정관리단 정문으로부터 그랜드하얏트 호텔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과 주변 골목길을 통칭하며 과거 육군중앙경리단이 현 위치에 있어 경리단길이라 불리었다.

인근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로 다양한 소규모 상점이 입점할 수 있었고, 이태원의 이국적인 문화와 아기자기한 카페, 먹거리들이 만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곧 지역의 핫 플레이스가 되었고 2017년경부터 SNS를 통해 빠르게 퍼지며 유행의 반열에 올라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상권이 활성화되자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3~4배 인상했고 이에 부담을 느낀 자영업자들이 빠져나가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이 발생하였다.

젠트리피케이션은 1964년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라스가 노동계층이 사는 런던 구역이 중산층과 상류 젠트리(Gentry, 영국에서 중세 후기에 생긴 귀족보다 지위는 낮지만 경제력을 지닌 계층을 지칭)에 의해 바뀌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용어다. 이후, 미국에서는 어떤 동네의 부가 늘어나고 이전보다 거주민들 중 부자와 백인과 젊은 층이 많아지는 과정을 지칭하게 되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국내에서도 이슈가 되자 2016년 국립국어원은 '둥지내몰림'으로 순화한 용어를 제안하였다. 자신의 둥지에서 쫓겨난다는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물론 낙후된 지역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겠지만, 경리단길의 현재 상황을 살펴본다면 그렇지 못하다.

현재 이태원 상권은 중대형상가 공실률 22%로 전국 상가 공실률91.08%)의 두배이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임대료 외에도 1~2억의 권리금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던 경리단길 상권은 이제 권리금이 받지 않겠다고 해도 들어오겠다는 세입자가 없다. 평일주말 할 것없이 인파로 북적이던 경리단길은 "임대"라는 종이가 붙은 폐업한 가게가 즐비하다. 죽은 상권. 전국 리단길 열풍의 시초의 현 주소다.

경리단길의 명암을 목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의 리단길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 당장의 인기몰이가 반가워 예견된 젠트리피케이션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악순환의 반복만 이뤄질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해 부산 해리단길의 임대인과 임차인이 한자리에 모여 상생의 길을 걷기 위한 협약을 하였다는 반가운 기사를 접했다. 협약의 주요 내용은 "임대인은 5년간 임대 기간 보장 등 젠트리피케이션 방지 및 부동산 안정을 위해 노력하고 임차인은 해리단길 지역 상권 활성화를 위하여 적극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해리단길의 상생협약은 리단길 네이밍을 선점하기 위해 성급하게 명칭을 변경한 다른 리단길 상권에 좋은 교훈이 되었을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골목상권에 불이익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지역문화적 입장에서도 큰 손실이다. 각 지역의 골목상권은 토착 문화적 성격을 기반으로 발생한 문화상권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지역에서도 대체 불가능한 고유색이 있다.

예컨대 경리단 지역은 지난 수십 년간 인구가 폭등했던 서울의 타지역과 달리 미군부대, 남산 등으로 고립되어 대규모 재개발의 흐름과 동떨어져 고유의 주거환경을 유지해왔다. 경리단길의 문화는 이러한 지리적 특성 속에서 꽃피어왔고, 타 지역의 관광객들에게 유니크한 매력으로 어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싼 임대료를 견디지 못하고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이 들어선다면 문화적 맥락에서 그 길의 가치는 퇴색되고야 만다. 어딜 가나 있는 프랜차이즈매장을 보러 굳이 그 리단길을 방문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라고 자부하는 관광명소 샹젤리제 거리는 파리에 가야만 볼 수 있다. 노르망디에서 노젤리제거리로 마르세유에서 마젤리제거리로 호칭되지 않는다.

경주의 역사지구나 안동의 하회마을은 그 장소의 전통성을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세계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평범한 사용재를 외견-즉 그것이 아름다운가 추한가, 아니면 그 중간 어디쯤 되는가-과 상관없이 사용가치만으로 판단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우리의 눈을 뽑아야버려할 것" 이라고 말했다.

문화에 관한 논의는 반드시 예술 현상을 출발점으로 삼아야지 소비재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지역색이 짙은 골목길을 문화로는 생각하지 않고 돈벌이로만 생각하는 자들에게 아렌트의 독설을 전해주고싶다.

전국의 리단길 열풍은 눈앞의 이익을 쫒느라 큰 이익을 놓치고 있는 현상에 다름 아니다. 유행몰이식 리단길 열풍이 젠트리피케이션을 유발하여 결국 지역색을 흐리고 전통문화를 지우고 있다. 샹젤리제 거리처럼 국내 관광객 뿐만 아니라 세계 관광객들이 방문할 수 있는 길로 만들려면 리단길이 아닌 지역의 고유색을 가진 길로 보존·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리단길 #젠트리피케이션 #지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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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교 문학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화콘텐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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