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내가 틀렸다

[애도하는 법] 다섯 번째 4월 16일을 맞으며... 슬픔을 잊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등록 2019.04.16 11:56수정 2019.04.1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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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애도하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장례식장에 갈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 어떤 위로를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 했던 기억이 한번쯤 있을 텐데요. 기획 '애도하는 법'을 통해 나의 애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편집자말]
결혼기념일을 앞둔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결혼한 지 얼마나 됐지?" 날짜는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데 우리가 몇 년 차 부부인지가 정확히 헤아려지지 않았다. 남편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어. 결혼식 올리고 나서 세월호가 그렇게 됐는데."


5년 전 이맘때 우리는 신혼여행지인 일본 오사카의 호텔 방에서 아침을 맞았고,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어느 뉴스에서 '한국'이라는 자막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일본어를 조금 아는 내 눈은 속보, 진도, 배, 침몰, 사고, 고교생, 세월호 같은 단어를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끔찍한 자막 뒤로 시퍼런 망망대해에 떠 있는 여객선 한 척이 보였는데, 비스듬히 기울어져 거대한 몸집의 절반만 수면 위로 드러난 상태였다. 그다음은 모두가 아는 그대로다.

결혼한 다음 해 12월, 나는 아이를 낳았다. 겨우 출범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의 첫 청문회가 열린 달이었다. 아이가 첫돌을 맞았을 때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고, 내가 복직하며 아이를 처음 어린이집에 보낼 무렵 정권이 바뀌었다. 아이가 4살이 되던 해에 그제야 세월호가 육지에 바로 세워졌다.

올해는 결혼 5주년이자 세월호 5주기다. 나는 그동안 일과 육아 사이에서 허둥대는 엄마로 살며 크고 많은 변화를 겪어냈지만, 세월호는 여전히 진실의 전모가 밝혀지지 않았다. 유가족들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다.

변하지 않을 줄 알았던 나의 변심


결혼 후 삶의 궤적과 맞닿아 있어서 절대 잊을 수 없을 줄 알았건만, 어느새 세월호가 내 일상에서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스스로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과거보다 덜하고 있었다.

'세월호'가 언급된 기사를 발견해도 제목만 보고 넘길 때도 있었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군가의 가방에 달린 노란 리본을 봐도 아무런 자각이나 동요 없이 '아, 노란 리본이네' 하고 스쳐 지나가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세월호를 대하는 자세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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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6일 오후 광화문 광장 세월호 천막들 ⓒ 김시연

 
나의 변심을 분명히 확인한 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였다. 회사가 광화문 쪽으로 이사한 지난해 가을로 기억한다. 점심을 먹은 뒤 산책 겸 세종대로 사거리로 향했다. 광화문역 7번 출구 쪽 횡단보도에 서 있는데 이순신 장군 동상 앞쪽으로 설치된 세월호 분향소가 보였다.

가끔 광화문에 볼일이 생기면 세월호 분향소에 들러 노란 리본과 바람개비, '아직 돌아오지 못한 가족이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희생된 아이들의 얼굴을 눈에 담고 갔다. 시간이 별로 없어도 굳이 그쪽으로 지나가며 하얀 천막 안을 들여다보곤 했다. 한 사람의 몫이라도 더 보태 세월호를 잊지 않으려 이곳을 찾는 행렬이 끊기지 않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보행자 신호가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교보문고 방향으로 우르르 나아가는 사람들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했다. 횡단보도가 중간에 끊기더니 광화문광장으로 가는 인도가 드러났다.

여느 때처럼 곧장 몸을 왼쪽으로 돌리면 세월호 분향소로 갈 수 있었지만, 아주 잠시 망설이다 마저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는 그곳에 들르지 않았다. 광장 한쪽에 설치된 커다란 노란 리본 조형물을 무심히 지나치던 그때, 속으로 혼자 했던 말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늘은 굳이 안 가도 되지 않을까. 배도 인양됐고 정권도 바뀌었으니까, 시간이 꽤 지났으니까 이젠 괜찮지 않을까.'

유가족의 아픔에 비할 바는 절대 아니지만,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기억을 계속 되살리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 세월호를 다룬 기사를 읽거나 노란 옷을 입고 거리에서 싸우는 유가족들의 사진을 볼 때면 슬픔에 사로잡히곤 했다. 아이들을 구하지 못한 이유를 아직 밝히지 못했다는 걸 알면서도, 시간을 핑계 삼아 개인적인 일상으로 온전히 돌아오고 싶었던 것 같다.

이후로 나는 광화문 세월호 분향소를 찾지 않았다. 그런 마음이 죄스럽고 부끄러워 더욱 다가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내가 본 세월호 분향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유가족들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를 추진하는 서울시와 합의해 지난 3월 18일 천막들을 걷었다.

슬픔을 함께 견뎌주는 일

세월호 5주기임을 뒤늦게 알게 된 날, 서점에 들러 <애도일기>를 집어 들었다.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를 잃은 후부터 쓴 글들을 모은 책이다. 프랑스 사상가의 일기를 굳이 읽기로 마음먹은 건 풀리지 않는 고민 때문이었다.

다섯 번째인 4월 16일. 이번에는 또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애도 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이 책에서 답을 얻을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단숨에 다 읽었지만, 어떤 그럴싸한 방법을 얻지는 못했다. 다만 그의 말들로 인해 내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이런 말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슬픔도 차츰 나아지지요. 아니, 시간은 아무것도 사라지게 만들지 못한다. 시간은 그저 슬픔을 받아들이는 예민함만을 차츰 사라지게 할 뿐이다." (111쪽)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은 뒤로 "중단된 적이 없이, 그러니까 한 번도 불행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고, "근심은 늘 제자리"라고 털어놨다. 속을 태우는 문제가 해결돼야 마음이 풀리는 법인데, 어머니의 부재는 해결될 수 없으니 그의 근심 또한 나아질 길이 없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보다 눈물을 덜 흘렸지만, 여전히 슬펐다. 제과점에서 피낭시에를 사려다 예기치 않게 기습해오는 추억에 오랫동안 혼자 울기도 했다. 시간은 슬픔을 해결해주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자꾸 우울을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길 원했다. 롤랑 바르트는 때로 분노했다.
 
"우리의 사회가 안고 있는 패악은 그 사회가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65쪽)

세월호 유가족들도 일상에서 불쑥 찌르고 들어오는 슬픔에 여전히 가슴 아플 것이다. 아이가 돌아오지 않는 한,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한 진실을 찾지 못하는 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슬픔이니까.
 
"2018년 2월에 제훈이 동생이 졸업을 했어요. 둘째한테는 너무 기쁜 날인데 제훈이 생각이 안 날 수가 없더라고요.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두 번째 졸업식이었을 텐데. 하나를 건너뛰고 둘째 졸업식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눈물이 멈추지가 않았어요. '아… 결혼식도 이렇겠구나. 손주가 생겨도 이렇겠구나'"

세월호 유가족과 생존자 가족을 인터뷰한 책 <그날이 우리의 창문을 두드렸다>에 실린 제훈 엄마(이지연씨)의 이야기다. 시간이 지났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넘겨짚었던 내가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은 대목이다.

애도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일이다. 슬픔의 동의어는 통증이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로 인해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를 억울하게 잃은 사람 곁을 지키며 그의 분노와 비애를 있는 그대로 견뎌주는 것, 어렵고 힘들어도 계속 함께 아픈 것. 그게 지금 내가 세월호를 위해 할 수 있는 애도 아닐까.

잊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세월호를 타고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476명 가운데 304명을 잃었다.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 2학년 학생 324명 중 250명은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도 못 한 채 삶을 마감했다. 미수습자 5명의 가족은 그들의 유품으로 대신 장례를 치러야 했다.

나는 이 숫자의 의미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안산 합동분향소에 처음 조문하러 갔을 때,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비현실적인 광경에 걸음을 멈춰버렸다. 출구가 점처럼 저 멀리 보일 정도로 넓고 긴 공간의 벽면을 교복 차림의 영정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남아버린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와서 한동안 많이 슬펐다. 그 슬픔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 숫자를 되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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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4년 8개월간 서울 광화문광장을 지킨 세월호 천막이 떠난 자리 12일 서울시의 추모시설인 '기억·안전 전시공간'이 문을 열었다. 이 공간은 79.98㎡(약 24평) 규모의 목조 건물로 전시실 2개와 시민참여공간, 안내공간으로 구성된다. ⓒ 연합뉴스


지난 12일 점심을 먹고 오랜만에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세월호를 추모하는 '기억·안전·전시공간'이 문을 여는 날이었다. 천막이 있던 자리에는 나무로 단단하게 지은 1층 건물이 들어섰다. 개관식을 준비하는 4.16 가족들의 모습도 보였다.

앞으로는 이곳을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렇게 계속 남은 가족들 곁에서 세월호를 애도하고 함께 아픔을 견디며 그래도 나아갈 것이다. 슬픔을 잊지 않는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잊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애도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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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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