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단이 가능해졌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낙태죄 폐지'는 끝이 아닌 시작

등록 2019.04.25 21:08수정 2019.04.25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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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 "여자 몸엔 관심없음, 그저 즐긴다"는 10대 남자아이]


- 지난번 심쌤 아이의 말이 잊히지가 않네요. '낙태'가 '뱃속의 아기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거'라고 했던. 아이의 말이 너무 솔직하고, 생각하지 못했던 반응이라 아이와 어떤 아이와 나눴을지 더 궁금했어요. 빨리 말해주세요.
"후훗. 그랬군요. 계속 대화 형식을 빌려 말해볼게요.
 
"근데 엄마, 낙태가 죄면 여태까지 우리나라에서 임신한 여성들은 다 애기를 낳았어? 한 명도 안 빼고?"
"아니!"
"그럼?"
"낳을 수 없는데 임신중단은 불법이라고 하니까 결국 몰래 중단하는 거지."

"어디 가서?"
"원래는 약을 먹거나 병원에 가서 제대로 수술을 받아야 돼. 그런데 병원에서도 불법이라고 임신중단을 도와주지 않거든. 그러다보니 몰래 해주는 데 가서 도움을 받거나 수술을 하는 거지."
"오, 그럼 됐네!"

"그런데 아무래도 일반병원보다는 안전하지 않거든."
"그럼 죽을 수도 있어?"
"응, 실제로 어떤 여성이 안전하지 않은 치료 시설에서 임신중단을 시도하다가 의사가 실수를 한 거야. 얼른 다른 병원에 가서 치료 받으면 살 수 있었는데 그렇게 안 해서 그 여성은 죽고 말았어."

"헉, 왜 안 보낸 거야?"
"왜냐면 임신중단은 우리나라에서는 죄니까. 몰래 임신중단을 도와준 게 걸리면 자기도 벌을 받잖아. 그러니까 안 걸리려고 적절한 조치를 안 해준 거지."
"아, 그 의사 나쁘다."
"근데, 그 의사가 나쁘다고 보기만 어려운 거 같아. 법이 무조건 임신중단은 죄라고 하니까 제대로 된 치료를 할 수도, 받을 수도 없게 된 거니까."
"아, 그럼 어쩌라는 거야, 진짜."
"그치, 너도 답답하지! 그래서 법이 바뀌어야 하는 거야. 태아는 생명이니까 임신중단은 무조건 죄다! 무조건 낳아서 키워라! 이렇게 해버리면 임신한 여성은 임신을 중단했을 때 어떤 보호나 치료도 받을 수가 없어. 그런데 태아의 생명이 중요한 만큼 임신한 여성의 생명도 중요하거든."

"엄마."
"어?"
"복잡해."
"오, 진짜 핵심을 말했다. 임신이나 임신중단/유지는 사실 복잡한 일이 맞아. 근데 복잡한 걸 세세하게 살피지 않고 단순하게 '죄'라고만 하니까 부작용이 많은 거야. 그건 엄마가 네 사정도 모르고 무조건 화를 내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일단 '임신중단은 무조건 죄다'는 '임신중단하든 유지하든 여성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결정을 존중 받아야 한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어려운 말로 '낙태죄 폐지'라는 거고, 그 결정이 오늘(4월 11일) 나는 거야."
"근데 엄마는 그게 왜 떨려?"
"음... 왜냐면 낙태죄가 폐지된다는 건 여성들이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존중받는 세상에 또 한 걸음 다가간다는 뜻이니까!"
"음..."
"지금 다 이해 못해도 돼! 나중에 또 이야기하면 되지!"
"엄마, 일단 한동안은 하지 말자, 오늘 너무 무리했어."

아이에게 최대한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려고 했지만 다 성공한 건 아닌 거 같아요. 하지만 아이와 함께 '임신중단'을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참 좋았어요."


- 저는 못해준 말이 몇 대목 걸리네요. 나중에 제 아이에게도 꼭 말해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 대화가 낙태죄 위헌 결정이 나기 전 상황이잖아요?
"네, 맞아요. 4월 11일 오후 2시경 66년 만에 '낙태죄 폐지'라는 반가운 소식을 들을 수 있었죠. 아이도 아침에는 대충 듣는 줄만 알았더니 집에 와서 '어떻게 됐냐?'고 묻더라구요! 나름 희망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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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위헌여부 선고를 위해 11일 오후 서울 재동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유남석 소장과 재판관들이 입장해 있다. ⓒ 공동취재사진

 
- 드라마 <시그널>에 나와 유명해진 대사처럼 "그래도 20년이 지났는데 뭐라도 달라졌겠죠?"라는 물음에 조금은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 다행이에요. 잠시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에 대해 짚고 넘어가 볼까요? 
"헌법재판소에서 '낙태는 죄가 아니다'라고 기존의 낙태죄를 폐지하는 결정을 내렸지만, 임신중단과 관련한 구체적인 법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결정문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이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확보돼야' 하는데 '그 시간은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이 가능한 시점인 22주 내외가 타당해 보인다'고 말한 상태예요. 그러나 이 기준은 강제성을 띤 법이 아니라, 판사들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거예요.

이에 따라 임신중단 가능 기간을 두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어요. 기간을 구체적으로 정해서 주수에 따라 임신중단에 제한을 두자는 의견도 있고, 어느 기간이든 임신중단을 법으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어요. 사실 이번 '낙태죄 폐지' 결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에요! 형법상 임신중단이 가능해졌지만 실제적인 적용을 위해 사회, 문화적으로 많은 부분들의 변화가 함께 가야 하거든요."

- '낙태죄 폐지' 결정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게 어떤 의미에서 그렇죠?
"예를 들어 임신중단이 가능해진 만큼 애초에 원치 않는 임신을 줄일 수 있도록 실질적인 성교육을 확장하고, 피임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국가 차원에서 나서고, 임신 당사자인 여성의 결정이 실제적으로 존중받고 임신중단과 관련해서 신체적, 정신적 안전을 보장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해요.

또 오랜 세월 낙태죄를 적용해온 사회가 가지고 있는 왜곡된 가치관, 성차별적 문화라든지, 정상 가족에 대한 기준이라든지, 그에 따른 편견 등등 바꿔나가야 할 게 많아요. 무엇보다 그동안 필요하지 않다고 여겨져 대비하지 못했던 임신중단과 관련한 교육/의료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해요."

- 가장 대표적인 임신중단 방법인 소파수술(자궁의 내막을 기계로 긁어내는 수술) 이외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요.
"오, 꼭 알아야 할 이야기네요. 임신중단 방법에는 외과적인 수술 방법과 약물을 이용한 방법 2가지가 있어요."

- 지난 시간에 본 동영상에서 한 여성이 경험한 방법이군요.
"네, 약물을 복용해서 임신중단을 유도하는 거예요. 임신을 유지할 때 나오는 프로제스테론이라는 호르몬이 있는데요, 이 프로제스테론의 생성을 막는 '미페프리스톤'이라는 약물을 사용하면 임신을 중단할 수 있어요. 이런 임신중단 유도약에는 여러 장점이 있는데요, 수술을 따로 할 필요가 없고 성공률도 90~98%로 매우 높아요. 또 세계보건기구(WHO)의 필수의약품으로 등록, 사용을 권장하고 있어 안전을 보장할 수 있어요.

이미 많은 선진국에서는 임신중단 유도약을 도입했다고 해요. 비용도 저렴해서 약물 사용이 가능한 나라에서는 수술 대신 약물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해요. 무엇보다 임신 8주 이내에 사용할 경우, 그 어떤 시술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이런 임신중단 유도약들은 'RU486', '미프진', '미페프렉스' 등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어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아직 승인이 되지 않아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낙태죄 폐지'에 힘입어 하루 빨리 도입이 되어 필요한 사람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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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위헌 판결을 앞 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법 유지' 촉구 집회가 열리고 있다. ⓒ 이희훈

 
- 고민인 건, 제가 아이에게 '낙태죄가 없어졌다고 해서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일은 없을 거야'라는 말을 해줄 때였어요. 낙태죄와 태아의 생명을 논할 때, 어느 것이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의 문제로 봐선 안 되는 거지요?
"'태아의 생명'과 '임신중단'을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야 하는 경쟁구도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에 대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인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이렇게 말했어요. '태아에게는 권리와 자유의지를 부여하면서 인간인 여성에게는 자유의지에 반하는 원치 않는 출산과 양육을 강제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또 '태아와 모체는 떨어뜨릴 수 없다. 임신과 출산이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머니의 생존권이 보장돼야 태아가 생명으로 탄생할 수 있다. 둘을 떨어뜨려 대립 구도로 생각하는 것은 이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요. 

'임신중단'과 '태아의 생명'을 경쟁과 대립구도가 아니라 연결과 상생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되었을 때 궁극적으로는 당사자에 의한 주체적이고 안전한 임신과 출산이 가능해지고 그것이 곧 태아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될테니까요.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렵더라도 이 새로운 시각을 가지고 아이들과 이야기해 보면 어떨까요?"

- 저도 노력해 봐야겠네요. 
"20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에서 66년 만에 '낙태죄 폐지'라는 성과를 이룬 날이에요. 이 성과는 저절로 이뤄진 게 아니에요. '임신중단'을 문란한 여성들의 이기적인 행동이라 생각하며 손가락질했던 사람들 속에서도, '임신중단'과 '태아의 생명권'을 대립구도로 만들어 끊임없이 저울질 하는 사회의 거대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낙태죄 폐지'를 외친 사람들이 있었어요. 인간의 기본권리를, 재생산권을 요구했던 그들의 목소리가 계속 있어왔고 지금도 있기에 가능할 수 있었어요.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각자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이 목소리들에게 조금씩은 빚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앞서도 말했지만, '낙태죄 폐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에요. 빚도 갚을 겸 이 새로운 시작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보면 어떨까요?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요. 많은 사람이 솔직하고 실제적인 성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그날까지 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목소리를 낼 거예요! 이상 여러분의 심쌤이었습니다."
#심에스더 #성교육 #낙태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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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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