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음식 '갱시기'를 아세요?

보릿고개를 넘기던 시절 온 가족이 똑같이 나눠먹던 음식

등록 2019.04.17 09:11수정 2019.04.17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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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친정 엄마가 동생과 함께 우리 집에 놀러 오셨다. 봄나들이 겸 한강 유람선에서 불꽃놀이도 보시고 밤늦게 오셔 주무셨다. 일요일 아침 봄비도 내리고 근처에 나가기도 귀찮아서 집에서 간단히 이른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그럴 때마다 해먹는 '가족 음식'이 있다.


바로 '갱시기'다. '갱시기'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김치죽 비슷해요'라고 하면 어떤 음식인지 상상이 가는 눈치다. 우리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북도 김천이다. 김천은 경상도의 다른 지방에 비해 자랑할 만한 음식이 없는 동네이다. 하지만 어려서 엄마가 해주시던 '갱시기'라는, 사람 이름 같기도 한 정체불명의 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한겨울이나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멸치 육수에 국수를 넣은 갱시기가...
 

포털 사이트에서 '갱시기'로 검색하면 나오는 이미지들 중 일부. ⓒ 포털 사이트

 
우선 멸치와 다시마, 북어 대가리, 파뿌리를 넣어 팔팔 끓여서 육수를 만든다. 이미 냉장고에 얼려놓은 것이 있으니 녹여내면 된다. 김장 김치와 콩나물, 고구마, 밥 또는 국수를 준비한다. 육수가 데워지면 김장 김치를 반찬으로 먹을 때보다 잘게 썰어서 넣고 끓인다.

김치와 육수가 어우러지게 적당히(음식에서 가장 어려운 것) 끓여내고 깍두기 크기로 썰어 둔 고구마와 콩나물, 파와 마늘을 넣고 다시 끓이는데 콩나물의 아삭함이 딱 사라지는 순간에 밥을 넣는다. 밥알이 국물에 반쯤 풀리면 불을 끄고 그릇에 퍼 담으면 된다.

새콤하게 익은 김치 맛과 시원한 콩나물 국물, 달작 지근한 고구마와 국물이 스며들어 반쯤 퍼진 밥알이 내 영혼을 따뜻하게 해준다. 내 고향은 경기도이지만 '갱시기'를 먹을 때면 김천 외가가 생각난다. 어느새 나도 김천 사람이 되어있다.

딸아이가 왜 이런 음식을 먹었냐고 할머니에게 물어본다.

"할머니 어렸을 때는 밥이 항상 모자랐어. 여러 사람이 먹으려면 김치랑 고구마랑
다른 채소들을 넣고 한 솥 가득 끓여서 모자란 밥을 나눠 먹었지. 제사 지낼 때
무와 다시 등을 넣어 끓인 국을 갱이라 말하는데, 밥을 또 끓인다고 '갱죽'이라
부르기도 했어."



슬픈 사연을 가진 음식인데 딸아이는 맛있다며 두 그릇이나 먹는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이 어린 시절 먹었던 음식, 어려웠던 시절 먹고 싶었던 음식이나 질리도록 먹어서 다시는 먹지 않을 거라던 음식을 찾곤 한다. 먹을 것이 풍요로운 세상이고 경제적 여유도 있지만 자신의 몸과 마음이 헛헛할 때 생각나는 것은 겨우 '갱시기' 정도인가 보다. 가난과 결핍이 일상이던 시절 밥상에 온 식구가 골고루 공평하게 똑같은 '갱시기' 한 그릇씩 먹던 그때를 그리워한다.

부모님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음식으로 위로하고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추억하면서 세포 하나하나에 음식의 영양분과 옛 기억들을 수액처럼 주입하고 계신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음식이 세대를 이어 내 몸과 정신을 성장시키고 키워왔다. 나를 뒤돌아보게 하는 추억의 사진처럼 모두가 어렵고 힘들게 살던 시대에 함께 나눌 음식을 만들어 먹던 배려의 마음을 나의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다.
#갱시기 #소울푸드 #배려의 음식 #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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