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 군락에서 나를 압도한 건 꽃이 아니다

[만고땡의 식물 이야기] 동백꽃과 동박새의 공존

등록 2019.04.19 20:56수정 2019.04.19 21:20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저 막연한 풍경처럼 슥슥 마음으로 그려보는 것과 실제 맞딱뜨리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동백나무 이미지는 추운 겨울에 꽃을 피우는 '예쁘고 애잔한' 것이었다. 사진이나 그림으로 익숙하게 봐 오던 동백나무는 짙은 녹색의 반질거리는 잎에 붉은 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 질감이 벨벳처럼 도톰하고 매끄러워 고전적인 미가 느껴졌다. 화분에서 키우고 있는 동백나무를 봤을 때도 그런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냥 겨울에 꽃 피우는 예쁜 생명체 정도였다. 거기에 송창식의 선운사 노랫말이 더해진 정도다.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바람 불어 설운 날에 말이에요.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에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동백꽃은 통꽃이다. 꽃잎 몇 장으로 이루어진 꽃이 아니라 꽃 하나가 전체다. 그러니 꽃이 떨어질 때 무지막지하게 뚝, 떨어진다. 꽃이 시들면서 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답게 만개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고개를 떨군다. 그 모습이 하도 애처롭고 처량해서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하트 모양을 만들기도 하고 사철나무나 회양목 위에 얹어 아쉬움을 달래기도 한다.
 

순천에서 만난 동백꽃 떨어진 동백꽃을 누군가 주워 회양목 위에 곱게 올려놓았다. ⓒ 김이진

   

동백 군락지 곳곳에 사람들이 떨어진 동백꽃을 주워 글자나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라도 아쉬움을 달래고 싶은 걸까. ⓒ 김이진

  
시든 기색 하나 없이 절정의 모습으로 고개를 떨구는 동백꽃은 원통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상징하는 경우도 많다. 제주 4.3 사건을 상징하는 꽃이 붉은 핏빛같은 동백인 것도 그런 이미지가 스며든 까닭이다.

요즘에는 동백을 원예종으로 개량해 색깔도 다양해지고 겹꽃으로 피우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꽃이 화려하고 풍성하지만 동백 특유의 단아한 매력은 떨어진다. 겹꽃은 꽃이 시들면서 떨어져 통꽃의 가슴 철렁한 낙하 몸짓은 만날 수 없다.


나는 전남 지역으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동백나무 숲을 만났다. 그렇게 울창하고 거대하게 펼쳐진 야생의 날 것 같은 동백나무 숲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 순천이었을 것이다. 어느 절이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절을 포근하게 감싸듯 넉넉하게 둘러주고 있었다. 한 눈에 다 들어오지 않아 걸음을 옮겨 바라봐야 했다.
 

절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동백나무 군락 ⓒ 김이진

 
빙 둘러쳐진 동백 병풍 앞에 서 있자니 꼼짝없이 압도되었다. 정작 나를 압도한 것은 꽃의 아름다움이나 군락을 이루고 있는 동백나무의 어마어마한 스케일이 아니라 입체 서라운드로 웅웅 들려오던 '새소리'였다.

경박스러울 정도의 하이톤으로 째째째짹짹 지저귀고 퍼드득 거리는 날갯짓에 귀가 멍할 정도였다. 오, 이럴수가. 동백나무 숲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박새들이 살고 있었다. 그 작은 새들이 어찌나 대차게 소리를 내고 움직이는지 깜짝 놀랐다.

그랬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가 살아가는 방법은 동박새와 공생하는 거였다. 그이들의 생존 비법! 나비도 벌도 사라진 겨울에 살아 있는 곤충이 뭐가 있겠는가. 동박새가 동백꽃의 수분을 돕는다. 동백꽃 수술과 암술이 고개를 쑥 내밀듯 기다랗게 뻗은 것도, 달달한 꿀을 품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새를 불러들이기 위해.

나는 멀리서 보는 동백나무의 우렁찬 기운에 반했다. 이제 동백꽃을 보면 함성같은 소리가 먼저 달려든다. 그리고 동백꽃의 이면을 안다. 그저 아름답고 처연하기만 한 꽃이 아니라 동박새와 함께 왁자지껄하게 겨울을 이겨내는 강인하고 씩씩한 생명이라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보는 이들은 한없이 가슴 아프게 느낄 수 있지만 어쩌면 동백꽃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 갈 길을 가는 거라며 아랑곳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가슴 절절하고 애통한 마지막으로, 결기 어린 퇴장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동백꽃은 동박새가 충분히 수분을 마치면 "아 하얗게 불태웠어, 내 임무는 끝났다 세상아 즐거웠어 이제 안녕~" 하고 아무런 미련없이 경쾌하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동백꽃 #제주43사건 #전남 여행 #동백 군락 #순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