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걸을 확률 1.7%, 그는 붓을 잡고 일어섰다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 추락사고 이겨낸 민중화가 박야일

등록 2019.04.20 15:41수정 2019.04.20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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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3일~19일까지 경인미술관에서 'into'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연 박야일 작가. ⓒ 조호진

 
"장애인이 되면서 비장애인이었을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길과 시설물과 건물의 낮은 턱부터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섞여 살 수 없는 사회적 구조, 비생산적이라는 시선과 편견, 수혜를 전제로 하는 복지제도,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차별들까지…. 장애인들이 왜 사다리와 쇠사슬로 스스로를 묶고 그 불편한 몸으로 죽을 듯이 자신들의 권리와 삶을 위해 싸우는지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게 됐고요."

화가 박야일(54)은 중도 장애인이다. 청년 시절엔 미술운동단체인 '서울민족미술협의회' 사무국장으로 각종 시위와 그룹 전시에 참여했다. 그의 붓은 변혁을 위한 무기였다. 벽화와 조형물 등 공공미술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변혁을 꿈꾸었다.


그러다 생계에 쫓겼고, 목수로 일하다가 추락했다. 일어나 걸을 확률 1.7%, 그는 바늘귀만큼의 확률에 기대지 않았다. 장애인의 아픔을 통해 삶의 의지를 다진 그는 장애인 인권 개혁을 위해 붓으로 연대하기로 했다.

4월 20일은 제38회 장애인의 날이다. 이날부터 일주일은 '장애인 주간'으로, 각종 기념행사와 더불어 유공자에게 훈장과 포장이 수여된다. 하지만 장애인 인권운동가들과 인권단체들은 '장애인의 날'을 '장애인 차별 철폐의 날'이라고 바꿔 부른다. 공허하고 기만적인 '장애인의 날'에 대한 반발심이다. 올해 장애인의 날 슬로건은 '동행으로 행복한 삶'이지만 슬로건은 슬로건일 뿐이다. 그래서 박야일은 '동행' 대신에 '연대'를 선택했다.

"재활을 마치고 이제 사회에 복귀했고 개인전도 일단락 지었으니 장애인의 보편적이고 당당한 삶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림 등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고 합니다."

고통을 통해 다져진 삶의 만족
  

송경용 신부의 '걷는 교회' 교우들이 박야일 전시장에서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다. ⓒ 조호진

 
지난 2월 17일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경인미술관에서 박야일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는 지난 2월 13일~19일 경인미술관에서 'into'(들어가기)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10년 만에 연 전시회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하반신이 마비되는 고통을 딛고 아픈 현실로 들어갔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그에게서 착한 성직자 느낌을 받았다. 그의 선한 눈매와 함께 소개인 때문에 '영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소개인은 성공회 송경용 신부다. 송 신부는 이날(2월 17일) 자신의 '걷는 교회' 교우들과 박 작가의 전시장에서 주일예배를 열었다. 빈민운동가 출신으로 한국사회가치연대기금 이사장을 맡고 있는 송 신부의 '걷는 교회'는 반올림 농성장을 비롯한 아픔의 현장 등을 찾아가 예배한다. 송 신부가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작가를 축하하기 위해 경인미술관을 찾은 것도 그런 이유다.
 

사고 발생 4년 전, 아들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야일 작가 ⓒ 박야일

 
"2015년 10월 14일 오후 2시 반, 하늘이 파랗던 가을이었어요. 멀리 남한강도 선명하게 보이는 산 중턱에 목조주택을 짓고 있었어요. 블루투스에서는 윤도현의 <나비>가 흘러나오고 있었죠. 2층에서 방화블록을 붙일 자리를 체크하다 추락을 했어요. 정신을 차리니 등이 엄청 아프더라고요. 순간 다리를 꼬집어 봤어요. 감각이 없더라고요. 이런, 마비구나. 정신이 아득했죠."


박야일은 '서울민족미술협의회' 사무국장 시절에 벽화와 조형물 등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두 번의 개인전·그룹전에 참여했다. 열심히 미술 활동을 했지만 생계에 어려움이 닥쳤다. 붓을 놓고 목조주택 목수로 일했다. 그리고 추락사고가 발생했다. 흉추 10번 신경이 손상돼 하반신이 마비됐다. 수술하면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재활 난민'으로 병원 세 군데를 떠돌다 500일 만에 귀가했다. 절망이 희망으로 쉽게 바뀔 리 만무하다. 그는 아내의 헌신과 사랑에 힘입어 아픈 세상으로 들어갈 용기를 얻었다.

"병원생활을 정리하면서 앞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다만 고마워하기로 했죠. 다친 후에 달라진 것 중 하나는 고마워할 줄 아는 인간이 됐다는 거예요. 그 전에는 뻔뻔하게도 미안해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았거든요. 집에 돌아온 직후 아내가 말했어요. '미안해하지 마라. 할 수 없는 일을 하지 못해 마음 쓰지 말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처음엔 절망했지만 지금은 다치기 전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어요. 심리적으로도 안정됐고 가족들과의 관계도 돈독해졌죠. 무엇보다 나에 대해, 내 삶에 대해 주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죠.

긍정적 마인드 따위가 아니에요. 고통을 통해 삶이 달라진 거죠. 다치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원하지 않는 삶을 등 떠밀려 살고 있을 거예요. 늘 그랬듯이 지나온 나날들을 후회하고 다가올 시간들에 불안해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살지 못했을 거예요."


초등학생 아들이 270만 원 주고 산 아빠의 그림
 

박야일 작가의 어린 아들이 구매한 '희한한 짐 2'. 캔버스 위에 오일 페인팅. 65.1cm x 90.9cm ⓒ 박야일

  
"아빠, 그 그림 있잖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 제목은 모르겠고. 왜 있잖아. 사람들이 이고 가는 파란 의자 위에 눈물 있는 거. 그거 팔렸어?"

그에겐 친구 같은 아들(11·초등 4학년)이 있다. 결혼 11년 만에 낳은 귀중한 아이다. 전시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 '희한한 짐 2'이 팔렸냐고 물었다. 안 팔렸다고 하자 매우 좋아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사겠다고 했다. 농담으로 생각했는데 진지하게 몇 번을 물었다. 그는 "아빠 그림을 네 돈을 주고 사겠다고?" 하며 확인차 되물었다. 아들은 이렇게 답했다.

"내가 태어난 뒤로 세뱃돈 받은 거랑 생일이나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때 그리고 이럴 때 저럴 때 어른들한테 받은 돈이 매달 한 4만 원쯤 된다고 쳐 봐? 그럼 1년에 50만 원이고 내가 10년 살았으니까 음, 500만 원은 있을 거 아냐. 엄마가 꼬박꼬박 내 통장에 저금해줬으니까. 그 돈이면 충분히 살 수 있지?"

아이는 엄마와 함께 은행에 가서 아빠 통장으로 그림값 270만 원을 이체했다. 아내가 아이에게 "아빠 그림 사니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뭔가 황홀하고 뭔가 뿌듯하다"고 대답했다. 최근에는 아빠의 연꽃 작품도 사고 싶다고 했다.

그의 작품 '들어가는 사람_옷'을 구매한 이는 청소 노동자다. 그는 "생애 최초로 그림을 소장하게 됐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야일 작가의) 전시가 끝나고 생각이 나서 연락해보니 '들어가는 사람_옷'은 팔리지 않았다고 들었을 때 기분이 이상했다. 너무 감격스러웠다. 나는 요즘 휴양림 청소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특별히 계획했던 지출 내역을 빼고, 3개월 임금을 모으면 작품을 받을 수 있다. 작가의 모든 그림이 좋았지만 유독 이 그림은 내 거 같았다. 작품이 탐나보긴 처음이다."

척박한 현실 속으로 '들어가기'
 

경기도 양평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박야일 작가 ⓒ 박야일

 
이번 개인전의 숨은 주역은 아내다. 그가 매일 6시간씩 1년간 작업하는 동안, 아내는 이젤에 캔버스를 올려주고 내려주었다. 좁은 작업실에 작품이 쌓이면 아내가 정리했다. 아내 도움 없이는 작업도 전시도 불가능했다.

아내 덕분에 전시에 대한 평가도 좋았고 작품 판매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한겨레>는 지난 2월 13일자 기사에서 "몸의 고난을 겪은 작가가 이제 다시금 세상의 틈새로 제대로 들어가 보겠다는 의지와 바람을 농축한 그림들"이라고 평가했다.

"희망이 있든 없든, 울든 웃든 우리는 척박한 현실을 걸어가고 있고 또한 걸어가야 합니다. '들어가는 사람' 연작도 궤를 같이 하려고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겪고 있는 아픔과 사회 곳곳에서 보게 되는 세월호 참사 등의 슬픔과 눈물 속으로, 어둡고 뼈아프더라도 그 진실과 실재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개인적인 다짐 같은 것이기도 하고요. 이번 전시에서 이를 환기시키고 싶었습니다."

전시회에 대한 작가의 말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 5주기 추념전 '바다는 가라앉지 않는다'에도 참여했다. 노동자 생활문예지인 <삶이 보이는 창> 2019년 봄호, 표지와 갤러리 꼭지에 그림이 소개되기도 했다.

사회 변혁을 꿈꾸던 청년 작가는 어느덧 쉰 넷이 됐다. 비록 휠체어를 탔지만 아픈 현실 속으로 들어가 적극적으로 소통할 계획이다. 진실을 치유하기 전에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아픈 세상과 연대하려는 박야일의 작가정신과 연대하고 싶다.

"예술의 역할에 대한 다양한 갈래들이 있는데 저는 '공감'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진실을 밝히고 치유하기 전에 내가 먼저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고 같이 슬퍼하는 것. 아마도 이 기조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될 것 같아요.

공감하기 위해서는 이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있는 아픔과 슬픔을 들여다봐야겠지요. 그림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지점에서 스스로 신호를 보내고 촉수를 뻗어 세상과 만날 계기를 마련하려 합니다."

 

박야일 작가 '검은 가방'. 캔버스 위에 오일 페인팅. 90.9cm x 72.7cm ⓒ 박야일

 
#박야일 작가 #장애인의 날 #장애인 #민족미술협의회 #경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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