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엔딩? 우리에겐 아직 법주사가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 한국의 산지승원 ④] 속리산 법주사

등록 2019.04.22 07:49수정 2019.04.22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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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가는 길 말티재에서 속리산 법주사까지는 벚꽃명소이다. 인근지역보다 4-5도가량 낮아 벚꽃시기가 일주일 가량 늦다. ⓒ 변영숙


"와… 벚꽃이다." 

함성이 터져나왔다. 

지난 16일 속리산의 남쪽 관문인 충북 보은군 말티재 고개 입구에 다다르자 갑자기 도로가 환해지는가 싶더니 막 피어나기 시작한 벚꽃들이 눈꽃처럼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말티재에서 법주사로 이어지는 길은 벚꽃길로 유명하다. 청주나 대전지역보다 일주일가량 늦게 피기 때문에 늦게까지도 벚꽃구경을 즐길 수 있다. 

고갯길 입구에는 '대궐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여러차례 법주사를 찾았던 세조가 머물렀던 행궁이 있던 자리다. 세조는 임금의 연을 끄는 말이 힘겨워하자 말에서 내려 걸어서 말티재 고개를 넘었다고 전한다.

수백 년 아름드리 명품 소나무길인 '오리숲길'을 지나 속리산 깊숙히 자리잡은 법주사를 찾아들었다. 

천왕문 앞에 하늘로 치솟은 전나무 두 그루가 여전했다. 전나무에 뒤질새라 높이 솟은 철제당간지주도 그대로다. 높이가 22m에 달한다. 앞마당으로 들어서니 높이 33m의 동양최대의 금동미륵대불과 국내 유일의 목조탑인 팔상전이 반겼다. 

이제 겨우 겨울잠에서 깨어나
  

법주사 경내 법주사는 흰목련과 벚꽃이 아름다운 절이다. ⓒ 변영숙

 
무엇보다 경내 곳곳에 하얀방울처럼 피어난 하얀 목련이 반가웠다. 법주사의 산벚꽃은 이제 겨우 꽃망울이 발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여기 벚꽃은 아직 일러. 저 아래쪽 정이품송 옆 멋진 벚나무에 꽃이 펴야 여기 벚꽃도 피어나. 아마 이번 주말 쯤에나 피려나…"

법주사 스님의 말씀이다. 스님 말씀대로 법주사는 이제 겨우 겨울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도 간간히 개나리와 진달래도 보이고 벚나무의 붉게 부푼 봉우리도 금방이라도 터질 기세다. 곧 법주사는 꽃대궐로 변신할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 우리나라의 유일한 법주사 팔상전. 국보 제 55호이다. ⓒ 변영숙

 
세상과 이별했다고 해서 '속리'산이라더니 법주사가 이렇게 깊은 산중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법주사는 산중사찰이라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평하고 넓다. 그 넓은 터에 전각들이 들어 앉은 모습이 대궐을 연상시킨다.  

법주사는 미륵사찰로 초기 법주사의 가람배치는 미륵신앙이 구현된 구조였다. 18세기에 그려진 법주사 그림에 팔상전과 용화보전을 잇는 축선상에 석연지, 석등, 희견보살상이 일렬로 놓여진 모습에서 탑-석물-불전을 잇는 구성을 강조하려는 배치가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으로 전소된 후 중창과 보수 작업 등을 거치며 법주사의 가람구조는 왜곡되고 전체적인 질서는 흐트러졌다.
  

법주사 쌍사자석등(국보제5호) 통일신라때 만들어진 쌍사자석등, 현존하는 쌍사자석등 중 조형미가 가장 뛰어나다. ⓒ 변영숙

 
1990년 청동미륵대불이 조성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청동대불의 위치를 남쪽으로 옮기고 석연지와 희견보살상 석등의 위치를 옮김으로써 미륵신앙의 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법주사에 들어서면 너른 터에 국보와 유물로 지정된 전각들과 석등들이 멀치감치 떨어져 앉혀져 있어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없고, 밋밋하고 휑하게 보였던 이유다. 
  

법주사 전경 철확 뒤에서 바라본 법주사 전경, 속리산의 연봉과 함께 어우러진 법주사 풍광이 시원스럽다. ⓒ 변영숙

 
이 밋밋함을 달래주는 방법은 금강문 우측 구석에 놓인 철솥(보물 1413호) 뒤로 가능한 한 멀찍히 물러나 속리산 봉우리들과 법주사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물결치듯 흐르는 속리산 관음봉과 연봉들이 어우러진 법주사는 그제서야 짜임새를 갖춘 천년고찰의 웅장함으로 다가온다. 가람배치는 헝클어졌어도 그 시원한 눈맛만은 일품이다. 

법주사 – 불법이 머무는 곳
  

법주사 전경 새벽 동이 터오는 법주사 ⓒ 변영숙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이라는 스님이 흰노새에 불경을 싣고 속리산으로 들어왔다. 법주사 자리에 이르자 흰노새는 소리를 지르며 꿈적도 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명당이라 여긴 의신은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 후에 '불법이 머물게 되었다'라는 뜻으로 법주사라 하였다. 

720년 성덕왕 때 중건되었고, 760년경 진표율사와 그의 제자 영심스님에 의해 미륵도량으로 중창되었다. 

금산사를 중창한 진표율사는 '속리산으로 가서 미륵불을 세우라'는 미륵보살의 계시에 따라 속리산으로 와서 길상초가 난 곳에 절터를 정하고 금강산으로 떠나 발연수사를 창건하였다. 후에 그의 제자 영심, 융종, 불타 스님이 진표율사의 가르침을 받고 길상초가 난 자리에 절을 세우고 길상사라 하였다. 길상사는 속리사 등으로 불리다가 법주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법주사가 미륵신앙의 요람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금동미륵대불이다.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법주사 금동미륵대불은 1990년대 조성된 청동대불에 2000-2002년 개금불사를 한 것으로 동양 최대 미륵불이다. ⓒ 변영숙

 
미륵대불은 진표율사가 조성한 청동대불로 천 년간 내려오다 대원군에 의해 당백전제조에 쓰이기 위해 훼손되었다. 일제 강점기였던 1939년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조각가 김복진이 시멘트로 불상을 만들다 머리부분만 완성한 채 장티푸스로 사망하고 만다. 

그후 전란과 자금부족으로 오래도록 작업은 중단되었다가 1963년 정부에서 시멘트를 지원받아 1964년 완성되었으나, 시멘트를 썼다는 이유로 부수고 1990년 청동미륵대불로 주조되었다. 쓰여진 청동의 무게가 160톤에 달했다.

2000~2002년 개금불사를 통해 금동미륵대불로 재탄생되었다. 8m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진 총 높이 33m에 달하는 동양최대의 미륵불이다. 

내부에는 석굴암을 모티브로 지어진 용화전이 있다. 

호서제일가람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 55호)우리나라 유일한 목조탑 ⓒ 변영숙


'호서제일가람(호서 제일의 사찰)' 법주사의 경내와 주변 암자에는 다수의 국보와 보물 및 지방문화재 등이 있다. 국보만 3점이나 되고 보물 12점과 지방 문화재 등을 포함하면 30여 점이 훌쩍 넘는다.

경내에서 가장 눈에 띄는 유물은 국내 유일한 목조탑인 팔상전이다(국보 제55호). 부처님의 생애를 8개의 장면으로 그린 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밖에서보면 5층이지만 내부는 통구조로 되어 있어 탑내부도 둘러 볼 수 있다. 착공부터 완공까지 22년이 걸렸다. 탑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다. 

대웅보전(보물 제 915호)도 눈여겨 볼 만하다. 무량사 극락전, 마곡사 대웅전 등 우리나라에 4개 밖에 없는 이층구조를 가졌다. 국내 소조불 가운데 가장 큰 3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법주사 대웅보전 삼존대불이 모셔져 있는 2층구조의 법주사 대웅보전. ⓒ 변영숙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석련지(국보 제64호) 등과 같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유물들은 규모와 세련된 조형미를 통해 당시 법주사의 위상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왕실과의 인연을 보여주는 유물들도 다수 남아 있다. 

수정봉 밑 능인전 '세존사리탑'과 복천암에 남아 있는 공민왕의 친필 현판이 대표적인 고려시대 유물이다.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까지 피난왔다 환궁하는 길에 법주사에 들려 불은에 감격해 통도사의 불사리 1과를 가져오게 하여 법주사에 봉안토록 했다고 한다. 

대웅보전 옆에 담장과 솟을 삼문이 있는 선희궁원당은 조선시대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위패가 모셔졌던 곳이다. 유교와 왕실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선희궁원당 법주사와 왕실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왕실과의 인연을 말해주는 유물과 일화가 법주사 곳곳에 남아 있다. 왕실의 비호와 지원은 법주사가 호서제일가람으로 성장하는 데 큰 밀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왕의 오솔길 '세조길'
 

법주사 세조길 법주사에서 복천암까지 '세조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 길은 세조가 신미대사를 만나러 다니던 길이다. 숲과 산상호수가 아름답다. ⓒ 변영숙

 
법주사 옆쪽에는 '세조길'이 조성되어 있다. 세조가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 복천암을 향해 걸었던 오솔길이다. '왕의 오솔길'이 이제는 모두를 위한 산책길이 되었다. 

소나무와 전나무가 우거진 숲길따라 펼쳐지는 풍경이 무척이나 고요하고 맑다. 얼마간 걸으면 사슴 눈망울만큼이나 맑은 호수를 만날 수 있다. 호수전망대에 서면 법주사의 주봉인 수정봉이 눈에 담긴다. 

수정봉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전한다. 

당 태종이 세수를 하는데 세숫물에 거북이 형상이 어른거려 알아보니 동쪽의 명산에 거대한 거북이 형상이 당나라를 향해 있어 당나라의 재물이 동쪽으로 흘러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에 당태종은 사신을 보내어 온 나라를 샅샅이 뒤져 거북이의 목을 자르게 하고 부도탑을 세워 거북의 정기를 끊었다.

1653년 이러한 얘기를 들은 목천군수 이두양의 지시로 잘려나간 머리를 붙이고, 이후 탑까지 부수어버렸다고 한다. 

호수를 지나 얼마간 더 오르면 세조가 목욕을 하였다는 목욕소가 나온다. 이곳에서 목욕을 한 세조의 피부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세심정을 지나 가파란 경사길을 오르면 복천암에 당도한다. 복천암은 깍아지른 듯한 바위 위에 걸려 있다. 복천암에는 신미대사의 영정과 세종대왕이 하사한 아미타 삼존불상, 신중탱화, 후불도가 남아 있다. 
  
세조가 왜 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고 신미대사를 만나러 왔을까. 세종대왕은 왜 복천암에 삼존불상을 하사했는지 궁금하다. 
 

복천암 신미대사의 영정과 세종대왕이 하사한 아미타삼존불상, 신중탱화, 후불도가 남아 있다. ⓒ 변영숙

 
이에 대해 혹자는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론을 답으로 내놓는다. 

세종대왕이 학식이 높고 범어에도 능통했던 신미대사를 집현전으로 불러들여 신미대사가 범어의 음과 뜻을 빌어 한글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불교를 억압하던 시대적 상황과 기득권 학자들의 이해가 얽혀 신미대사의 존재는 철저히 숨겨졌다는 것이다. 불교계와 학계에서 꾸준히 연구되고 있는 문제다. 

신미대사와 한글창제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가 현재 제작 중이다. 송강호, 박해일이 주연을 맡았다. 법주사 초입 정이품송 옆에 신미대사와 한글을 모티브로 한 '훈민정음마당'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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