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1만2730원 받는 날, 아버지가 제일 먼저 가던 곳

봄나물 가득한 양양 오일장... 시간은 흘러도 추억은 그 자리에

등록 2019.04.24 15:36수정 2019.04.2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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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저녁산골짜기 화전에서 캔 냉이와 달래, 씀바귀를 얼음이 채 풀리지 않은 도랑가에 앉아 씻어 집에 가져오곤 한다. 노부부도 그런 골짜기 도랑에서 더덕을 씻을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 정덕수

 
사람 발길 들기 쉽지 않은 곳에서 두릅을 봐두었던 게 생각나 따러 나섰다. 도랑을 건너려 할 때 트럭이 멈추더니 아주머니 한 분과 아저씨가 내려 제법 큰 봉지를 힘겹게 차에서 내리려 했다. 다가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하고 봉지를 들어 내려놓자 아주머니가 그중 하나를 힘겹게 들고 도랑으로 향했다. 내친김에 남은 봉지를 아주머니가 멈춘 곳까지 가져다드렸다. 슬쩍 안을 보니 방금 캔 더덕이 가득하다.
  
"웬 더덕이 이렇게 많아요? 장아찌라도 담그시려고요?"
"장날 팔려고 밭에서 캔거유."


칠순도 한참 넘어 보이는 두 분이 양양 오일장에서 팔 더덕을 캐서 물에 씻으러 나오신 것이다.

"그런데 이대로 흙이 묻어 있으면 더 싱싱해 보이지 않나요? 물에 씻으면 전 오히려 수입인지 국산인지 구분이 안 가 안 살 거 같은데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요즘 사람들 껍질을 까야 사요. 흙이 있으면 만져보지도 않우."


종일 더덕을 캐고도 다시 이틀 동안 일일이 껍질을 벗겨야 더덕이 팔린다는 뜻이다. 봄날 노을 아래서 양양장에 내다 팔 더덕을 다듬는 노부부를 보니 아버지 생각이 났다.  

양양 오일장에 서린 추억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시던 시절, 겨울은 유독 혹독한 계절이었다. 날이 추워지면 집을 짓는 사람이 없고, 그만큼 아버지의 일감도 줄어드니 형편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설이나 정월 대보름 목전에는 '대목장'이라고 해서 양양장이 크게 열렸지만, 주머니가 한갓지니 장을 보러 가기조차 쉽지 않았다. 자식들 끼닛거리가 떨어지면 장에 나가는 누군가에게 부탁해 겨우 쌀이나 조금 구해오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봄이 오고 산벚꽃이 피면 아버지는 벼르고 별렀던 양양장에 가기 위해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목수 일이 없는 겨우내 복냥(복령)을 캐거나 주걱·바가지를 깎아서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을 마련했고, 그렇게 몇 푼 벌어 장을 보고자 했다.

우선 대보름 무렵부터 산을 휘돌아 캔 봉냥부터 자루에 담아 챙겨놓았다. 황철나무를 베어다 깎은 주걱은 끈을 꿰 보자기에 쌌다. 주걱은 아이들 손바닥 크기만 한 것부터 장 담글 때 쓰는 것, 소 여물을 쑬 때 쓰는 것 등 용도에 따라 크기가 다양했다. 더러 미리 주문을 받았음직한 소여물구박이나 여물바가지도 있었다.

아버지는 짐을 다 싸놓고 나서야 세숫대야에 물 한 바가지를 뜬 뒤 면도를 시작하셨는데, 이것도 나름의 절차가 필요한 일이었다. "가미솔(면도기) 어디 뒀냐?"부터 시작해서 "색경(거울) 좀 닦아 놓지" 정도의 타박은 일상이셨다.
 

양양장장날에는 양양군은 물론이고 인근 인제와 속초, 강릉 사람도 만날 수 있다. 제철 맞은 산나물은 물론이고, 두부와 순두부, 된장, 들기름까지 온갖 농산물을 산촌 아주머니들이 가져와 판다. ⓒ 정덕수

 
장날이면 버스는 출발부터 미어터졌다. 아이들은 으레 어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했는데, 덜컹대는 신작로를 달리는 버스가 커브를 돌 때마다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 십 리 길 걷지 않는 것만도 감지덕지했다.
  
아버지가 장에 가신 날 저녁. 생선구이나 국거리로 쓸 생태, 또는 돼지고기라도 짐 속에 들어있기를 바라며 마중을 나가곤 했다. 과자나 눈깔사탕 같은 건 애초 기대도 하지 못했다. 물건을 제대로 처분해야 그나마 아버지는 기분 좋게 약주 한잔 하시고 봄을 넘길 장을 봐 오셨지만, 외상으로 물건을 넘기는 경우도 있다 보니 다음 장에 다시 나갈 때도 있었다.

나무가 우리를 먹여 살리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서부터는 겨울마다 동생과 팬 장작을 마을 여관에 내다 팔아 그 돈으로 장을 봤다. 당시 참나무 장작 한 평에 12000원을 받았는데, 정부미 한 말에 700~800원 할 때니 제법 큰 돈이었다.

이런 목돈을 만질 수 있던 데는 지리적 조건이 큰 역할을 했다. 설악산 오색약수는 언제부터 널리 알려졌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기록이 없지만 상당한 역사를 지녔으리라 본다. 더구나 양양군은 조선 시대 당시 양양도호부로 제법 관할권이 큰 고장이었고, 설악산이라는 금강산에 버금갈 만한 산도 품어 많은 이들이 찾아들었다.

또한 박달령(단목령)과 소동라령(나중에 오색령으로 불리다 1970년대 도로를 새로 닦으며 한계령으로 불리게 됨)이 오색마을을 경유하니, 언제고 사람이 머물기 좋은 여관이 여럿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1970년 이전의 오색에는 약수여관과 오색여관, 망경여관, 수원여관이 있었다. 충남여인숙과 공주여인숙, 서울여인숙 등 규모는 좀 작은 숙박도 약수터 위에 자리했다. 규모가 큰 일반 가정집들도 장기 요양을 하러 오는 이들이나 등산객을 상대로 방을 빌려줬다.

이들은 한여름에도 많은 손님을 치르려면 가마솥을 여러 개 때어서 음식을 만들어야 했기에 늘 장작이 필요했다. 참나무 장작만 있으면 여관이나 숙박업자들을 상대로 돈을 벌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일부 여관 주인은 이런 부탁을 하기도 했다.

"덕수야, 네가 나무를 한다며? 아줌마가 불 피울 관솔(소나무 죽은 뿌리나 옹이로 송진이 많아 불쏘시개로 이용됨)이 필요한데 할아버지가 나이가 많잖아. 아줌마가 섭섭지 않게 쳐줄게 관솔 좀 해다 줘."

잘게 쪼갠 관솔을 비료포대 하나에 담아 가져다주면 천 원은 받았으니 제법 넉넉한 용돈이 됐다.

그 덕에 초등학교 5학년 이후론 굶지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남의 집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너희 아버지 목수라 돈 잘 벌었잖아, 그런데 왜 굶어"라 묻는다. 목수 품삯을 관솔 한 포대 값도 안 쳐주는 인심, 봄에 일한 삯을 가을까지 못 받기 일쑤여서 기나긴 겨울이나 춘궁기엔 굶기도 했다는 현실을 알기나 할까. 

아버지의 월급
 

표고(화고)참나무에 종균을 넣고 재배한 표고버섯은 4월과 10월 하순이 가장 좋다. 이땐 등이 거북등처럼 갈라진 화고가 나온다. 꽃처럼 보인다고 해서 화고(花菰)라고도 한다. 표고버섯의 표고도 한자어인데 사전에서도 찾기 어렵다. ⓒ 정덕수

  

더덕껍질을 벗긴 더덕을 포장해 놓아야 사 간다니 먹을 때 직접 필요한 만큼만 방망이로 두들긴 뒤 껍질을 벗겨 이용하는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렵다. ⓒ 정덕수

  

고사리와 음나무순(개두릅)햇고사리가 나왔다. 생선조림에 고사리 넉넉히 넣고 조리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 음나무순는 엄두릅이나 개두릅이라고도 한다. ⓒ 정덕수

 
아버지는 나중에 플라스틱 주걱이 나오면서 겨울철에 주걱 깎는 일을 그만두셨다. 플라스틱 바가지의 등장으로 더는 여물바가지도 만들지 않게 된 아버지는 청소 일을 새로 시작하셨다. 양양군에서 국립공원인 오색마을에 청소부 1명을 배정했는데, 젊은 사람이 못하겠다고 그만두자 아버지께서 "월급을 받는 일인데 아무도 안 한 다면 내가 하겠다"며 자청하셨다.

1975년 아버지 월급이 1만2730원 하던 게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다음해에는 올라서 1만3750원이었다. 그 월급을 손에 쥐고 "자식들 안 굶기게 됐다"며 기뻐하시던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월급날은 곧 장을 보는 날이 됐다. 감자를 심다가도 면 직원이 나오면 곧장 불려가야 했으니, 특별히 장 볼 일이 있으면 아들을 시켜야 했다. "자식들 굶길 일 없으면 청소 일 그만둔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될 때 그 말을 실행에 옮기셨다.

그 뒤로 아버지의 장날 나들이는 뭔가 특별히 구입할 물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는 얼굴들 만나 술 한잔 나누기 위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어시장 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뒤 오징어회 한 접시 시켜놓고 반가운 얼굴 보이면 불러 소주 한 잔이라도 권하셨다. 그게 아버지의 즐거움이었을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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