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물칸 실려 강제이주 당한 독립운동가... 60년 걸린 '귀환'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독립운동, 역사·한글 연구 매진한 계봉우 지사

등록 2019.04.23 16:19수정 2019.04.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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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으로 봉환되는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 ⓒ 청와대

독립운동가 계봉우 부부가 독립운동가 황운정 부부와 함께 해방 74년 만에 고국 땅을 밟았다. 21일(현지 시각) 카자흐스탄에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유해 봉환식을 거행한 뒤, 22일 아침 태극기로 감싸진 계봉우 부부의 유골함과 영정이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2호기를 통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계봉우(1880~1959)는 한반도 동북쪽인 북만주와 블라디보스토크 쪽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그의 유해가 한반도 서쪽인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왔다. 그것도 별세 60년 만이다. 인생 역정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계봉우의 삶을 들여다보면, 신채호와 주시경이라는 두 인물이 떠오를 만하다. 신채호 같기도 하고 주시경 같기도 한 면들이 인생 궤적에서 진하게 묻어나기 때문이다.

위험해도 '불온서적' 집필했던 계봉우
 

신채호. ⓒ 위키백과(퍼블릭 도메인)

<조선상고사>에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관점으로 고대사를 서술한 신채호의 이미지는 계봉우의 역사연구에서 드러난다. 당시로서는 고학력인 중학교 졸업 뒤인 1903년(23세)부터 한국사와 중국사를 공부한 계봉우는 해외 활동을 하는 와중에도 <조선역사> <조선지리> <의병전> <조선 문학사>을 저술하는 한편, 한국인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거나 한국인 신문을 통해 역사 기사들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하의 역사서 집필은 지금과 달리 위험한 일이었다. 계봉우처럼 <만고 의사 안중근전> 같은 글을 신문에 발표하는 것은 "나 잡아 가시오!"라고 시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이 일 때문에 일본 경찰의 수사를 받았다.

만주나 연해주에서 집필 활동을 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으므로, 그 어디서 한다 해도 위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선총독부 관점에서 볼 때, 역사서 집필은 '불온서적 집필'과 다름 없었다.

신채호의 역사연구를 비판하는 일부 학자들은 "독립운동 같은 정치활동을 한 사람의 학술 연구가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겠느냐?"라며 부정적으로 말한다. 앞으로 계봉우의 역사 연구가 국내에 많이 소개되면, 그를 향해서도 이와 유사한 비판이 나올지 모른다. 그도 신채호 못지않게 역사연구 결과물을 많이 남겨놨기 때문이다.
 

서울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에서 찍은 주시경 묘비. ⓒ 김종성

계봉우가 단순한 흥미나 취미로 역사를 연구한 게 아니라 뚜렷한 민족정신을 갖고 그렇게 했다는 점은, 주시경이 그러했던 것처럼 한글 연구 및 교육에도 열정을 쏟았다는 사실에서 유추된다. 독립운동 와중에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 및 언어 연구 양쪽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은 그가 뚜렷한 민족적 목표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언어학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시대에 따라 글자 모양이 바뀐 한글뿐 아니라, 글자 모양이 거의 그대로인 한자로 적힌 역사서를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각 시대마다 한자의 뜻이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언어학자가 되지 않고는 역사를 연구할 수 없다.

계봉우 역시 그 같은 필요성에서 언어학에 관심을 가졌겠지만, 그는 그 정도 수준에서 언어학을 끝내지 않았다.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김두봉과 함께 독립운동사와 국문법 등 연구활동을 전개하였다"고 언급한 데서도 드러나듯이, 계봉우는 한글에 대한 책을 쓰고 한글을 가르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한글 운동 역시 전문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김두봉은 최현배와 더불어 주시경의 대표적인 제자다. 해방 뒤 남한에서 주시경의 뜻을 계승한 대표적 제자가 최현배라면, 북한에서 그 뜻을 계승한 대표적 제자는 김두봉이다. 그런 김두봉과 함께 계봉우는 한글운동에 참여했다. <국어> <고려어 교과서> <조선 문법> 등을 저술하는 한편, 해외 한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데 심혈을 쏟았다.

독립운동 조직활동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한국사·한국어 연구에 힘썼다는 것은 그의 학문 활동이 뚜렷한 민족적 목표 아래 수행됐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강점으로 인해 무너진 한국학 혹은 조선학의 체계를 수립하고자 애썼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가난과 강제이주, 그가 온몸으로 겪은 시련들

그런데 계봉우의 삶에서 학자적 면모가 풍겨나다 보니, '양반가 자손이겠지' 하는 선입견이 생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공노비(관노비) 집안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관청에서 이런저런 사무를 담당하는 노비 출신 사령(使令)이었다. 조동걸(1932~2017) 전 국민대 교수가 쓴 독립운동사 서적 <선열의 자유·정의·통일의 유산> 제9장 '북우 계봉우의 생애와 저술'은 이렇게 시작한다.
 
"계봉우는 1880년 9월 15일 함경도 영흥읍에서 태어났다. 사령이던 아버지와 어머니 장씨 사이에 여러 남매가 태어났으나 모두 홍역·천연두·콜레라 등으로 병사하고 혼자 남아 독자로 자랐다. 북우도 5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살짝 얽었다. 백부도 교노(敎奴)인 것을 보면, 집안은 대대로 영흥부의 관노였던 것 같다."
 
노비의 신분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를 기준으로 결정되므로, 어머니 신분을 알아야 계봉우 본인의 신분을 확정할 수 있다. 하지만, 관노 집안 출신의 남성과 결혼한 것을 보면, 어머니 역시 노비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반인 여성이 노비 남성과 결혼하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노비로 출생한 것이 훗날 계봉우가 학자적 능력을 갖는 데 도움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아버지처럼 관청 사령으로 근무하려면, 한자나 이두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힘들었다. 큰아버지 역시 향교 같은 데서 교노로 근무했다고 했다. 집안 어른들이 글을 상당히 많이 배웠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7세 때인 1887년부터 서당에서 공부하고, 28세 때인 1908년부터 영생중학교 교사로 복무할 수 있었던 데는 그런 집안 분위기도 한몫 했을 가능성이 있다.

계봉우는 어린 시절 고난에 노출됐다. 형제들은 병으로 죽어가고 본인도 병으로 고생했다. 10세 때는 아버지마저 돌아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갖은 고생을 하면서 생존해나갔다. 채무 때문에 집을 빼앗기기도 하고, 화전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런 인생 고난은 독립운동가가 된 뒤로도 이어졌다. 그가 당한 특징적인 시련은, 외세들에 의해 육체가 이리 옮겨졌다 저리 옮겨졌다는 하는 것이었다. 외세들에 의한 신체적 '강제이주'가 그의 인생에서 상당히 특징적인 면모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외세'가 아니라 '외세들'이란 표현은 이 글 뒷부분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영생중학교 교사였던 그는 1910년 12월 독립운동가 이동휘(훗날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따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한 뒤, 북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쪽)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자택을 습격한 일본 영사관 경찰들에 체포돼 식민지 한국으로 송환됐다.

1916년 11월 벌어진 이 일 때문에 영종도에서 1년 금고형을 받은 뒤 고향 영흥에서 3년간의 거주제한 조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의 육체는 일본 경찰에 의해 만주에서 서울 남산 경무총감부 유치장으로, 다시 영종도로, 다시 함경도 영흥으로 강제로 옮겨졌다. 북만주에서부터 영종도까지, 다시 함경도로 올라가는 '강제이주'를 경험했던 것이다.

이때의 감시와 탄압을, 계봉우는 '하나님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1919년 3.1운동 직전의 일이이었다. 서울에서 무르익어 가는 항일 열기가 그에게 그런 결단과 용기를 주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의 논문 '러시아혁명 전후 시기 계봉우의 항일민족운동, 1919~1922'는 이렇게 서술한다.
 
"계봉우는 일본 당국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평양신학교에 입학 수속을 밟는다는 핑계로 2월 27일 서울로 올라가 남문 안 봉래정의 신학생 숙소인 신행여관에 머물렀다. 계봉우는 3월 1일 1시에 반일운동이 일어날 것이며,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행렬 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 - 인하대 한국학연구소가 2011년 발행한 <한국학연구> 제25집.
 
하나님 핑계를 대고 일본의 감시에서 벗어난 그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약 1년간 의정원 의원 생활을 하다가, 다시 북만주 및 연해주로 가서 한국사·한국어 연구 및 교육 활동에 매진했다. 이 외에 독립운동 조직 활동과 한국인 정착 지원에도 참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른 외세가 그의 육체를 저 멀리 중앙아시아로 옮겨놨다.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끄는 소비에트연방(구소련)이 한국인들을 지금의 카자흐스탄 땅으로 강제이주시킨 것. 일본에 이어 소련이란 외세가 나타나 계봉우의 육신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옮겨놨던 것이다. 공권력의 필요에 따라 백성들의 거주지를 강제로 변경하던 왕조시대의 사민정책이 소련공산당의 정책으로 부활해 계봉우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됐다.

소비에트연방이 한국인들을 강제이주시킨 데는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었다. 연해주에서 터전을 잡는 한국인들이 많아짐에 따라 이곳이 '코리아 타운'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소수민족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생각, 한국인들이 일본 첩자가 될지 모른다는 염려, 중앙아시아를 개발해야 한다는 판단 등에 따라 계봉우를 포함한 한국인들을 열차 화물칸에 싣고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철우 고려대 평화연구소 연구교수의 논문 '시베리아철도와 고려인들의 이주 과정-스탈린 시대의 강제이주를 중심으로'에 이런 글이 있다.
 
"1937년 늦가을 한인들은 자연환경이 완전히 다른, 생활기반이 전혀 없는 반사막지대인 이곳으로 시베리아횡단열차의 화물칸에 실려 강제이주 당하였다. 18만 명에 이르는 대부분의 한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강제이주 당하였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한인들은 이산가족이 되거나 노약자와 어린이가 병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체험했다." -재외한인학회가 2006년 발행한 <재외한인연구> 제16호.
  
계봉우 선생의 '기분좋은 강제이주'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했던 계봉우는 자서전 <꿈속의 꿈>에서 그때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위 반병률 논문에 인용된 <꿈속의 꿈> 일부를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일본놈들에게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마른 하늘의 벼락이었다. 서울은 만세 소리의 서울. 서울의 만세소리는 나의 유(留, 머물다)하는 여관에서 가장 가까운 남대문통을 울리면서 나왔다. 나의 발은 나는 듯이 어느 겨를에 저절로 거기로 향하여 갔다. 나는 몇 천 만이라고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수한 손등이 태극기를 들면서 대한독립 만세를 일제히 우렁차게 높이 부르는 소리의 속에 들어섰다."
 
계봉우는 1919년 3월 1일 이 날, 참으로 기분 좋은 '강제이주'를 경험했다. 동포들이 외치는 대한독립 만세 소리에 이끌려 "어느 겨를에 저절로" 시위 현장으로 끌려갔던 것이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1937년, 그는 또 다른 외세인 소련에 의해 신체의 자유를 억압당하고 멀리 중앙아시아로 끌려가게 된다.

사후 60년 뒤인 2019년 4월 21일, 그는 이번엔 참으로 기분 좋은 '강제이주'를 경험하게 됐다. 고국 대통령의 전용기에 실려 유해 상태로나마 고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이면서, 한편으론 신채호처럼 역사연구에도 매진하고 주시경처럼 한글 전파에도 매진했던 계봉우 선생. 그의 독립운동 행적과 더불어 그의 보따리에 들어 있을 역사 연구와 한글 연구의 결과물을 들여다보게 될 행운을 우리가 누릴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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