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와 함께 산 지 10년,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구나

[2019 명랑한 중년] 세월이 흘러도 왜 이별은 늘 뜻밖의 일이 될까

등록 2019.05.05 20:13수정 2019.05.0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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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실수하고 내일은 그만큼 지혜를 쌓으며 살아가는 중년의 좌충우돌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반려견 미미와 미나가 가족이 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미미는 흰색 푸들이고 미나는 갈색 포메라니안이다. 둘은 비슷한 시기에 우리 집으로 왔다.

미미는 활발하고 밥도 잘 먹고 샘도 많고 무엇보다도 감성이 넘친다. 단조곡만 흘러나오면 두고 온 고향이 그리운지 하울링을 엄청 한다. 미나는 반대다. 미미에 치여 항상 멀찌감치 앉아있고 밥도 새 모이처럼 겨우 몇 알갱이만 먹는다. 미미는 4킬로그램, 미나는 2킬로그램이니 미미가 미나의 두 배다.


겨우내 미미와 미나는 집에만 있었다. 날도 춥고 미세먼지도 많다는 게 주된 이유였지만, 솔직히 나가기 귀찮았다. 그러다 보니 유난히 작고 연약한 미나는 다리에 힘을 점점 잃어 미끄러운 마룻바닥을 잘 걸어 다니지 못했다. 걷기 편하라고 요가 매트를 거실 곳곳에 깔아 놓았지만 화장실 갈 때를 빼고는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가족들 품을 전전했다.

온전히 누리고 싶은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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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풀리고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 3월부터 나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산책에 나섰다. ⓒ unsplash

 
날이 풀리고 진달래가 피기 시작한 3월부터 나는 이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산책에 나섰다. 아파트 뒤쪽으로 야트막한 산이 있어서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아직은 쌀쌀하니 반려견용 옷을 입히고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강아지 배변을 치울 휴지와 비닐봉투를 작은 가방에 챙긴 후 목줄을 채운다.

아이들은 목줄만 봐도 BTS를 만난 듯 흥분한다. 자기 먼저 목줄을 채우라고 머리를 서로 들이미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겨우 준비를 마치고 승강기에 오르면 아이들은 문 앞에 바짝 서서 대기한다. 문만 열리면 밖으로 튀어나갈 기세다.

산에 오르는 길, 하루하루가 다르게 꽃이 피어나고 새 잎이 돋아난다. 갈색에서 연두로, 연두에서 초록으로, 이렇게 금방금방 옷을 갈아입는 산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두 마리를 한꺼번에 산책시키기는 간단치가 않다. 아이들이 왔다 갔다 하며 줄이 엉키거나 때로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출발하고 이십여 분 동안은 배변을 치우고 쉴 새 없이 엉킨 줄을 푸느라 어수선하다. 그 후론 신기하게 줄이 꼬이지 않게 서로를 봐 가며 보폭을 맞춘다.

30~40분 산길을 걷다보면 앉아서 쉬기 좋은 지점이 나온다. 목줄 손잡이를 가까운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나도 아무데나 걸터앉아 스마트폰에 저장된 클래식 음악을 낮게 틀어놓는다. 그리고 텀블러에 담아온 커피를 마신다. 아이들은 코를 킁킁거리며 봄의 냄새를 만끽하고, 나는 커피 향을 음미하며 나만의 '산타벅스 카페'를 만끽한다.


피아노 연주와 새 소리와 강아지들이 밟아서 내는 낙엽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어떤 앙상블보다도 조화로운 선율을 자아낸다. 혼자 듣긴 아깝지만 그렇다고 나누고 싶지는 않은 이 평화롭운 고요함. 나는 되도록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은 주로 걱정이니까. 어떤 생각에 빠져들어 이 행복을 놓칠까봐. 오로지 이 순간에 머물고 싶다.

실컷 탐방을 끝낸 아이들이 내게 모여들어 뒷발을 구른다. 이제 그만 출발하자는 이야기다. 남은 커피를 원샷하고 아이들과 다시 산을 내려온다. 올라올 때와 다른 길을 선택한다. 이미 길을 다 알고 있는 아이들이 앞장서서 나를 이끈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걷는 뒷모습은 얼마나 귀여운지 나는 참지 못하고 매번 카메라 버튼을 누른다.

산책을 재개한 지 3주 정도가 지나자 미나는 마룻바닥을 잘 걸어 다니더니 지금은 뛰어다닐 정도로 다리 힘이 좋아졌다. 문제는 뜻밖에 미미에게 찾아왔다. 나는 처음엔 미미가 관심을 더 받으려고 연기를 하는 줄 알았다. 그동안 종종 그래왔으니까.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겠구나

미미의 복수는 오줌 싸기. 미미는 내가 조금이라도 미나를 더 챙기는 것 같으면 여지없이 내 방에 들어와 실례를 했다. 그리고는 내가 엎드려 닦는 걸 보고 있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눈빛으로.

애교도 많은 미미는 내가 외출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서둘러 뛰어 나오는지 꼭 넘어진다.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아이구 천천히 와, 다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도 쪼그려 앉아 두 팔을 벌리고 미미를 안을 준비를 한다. 얼마나 격정적인지 로미오와 줄리엣도 울고 갈 판이다. 매번 나를 향한 사랑이 뜨거운 우리 미미. 아무리 밀어내도 꼭 내 몸 어딘가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는다. 내가 말을 걸면 대답하는 것처럼 꽁알꽁알 소리를 내니 대체 정체가 뭘까 싶을 때도 있다.

그랬던 미미의 행동이 좀 이상해졌다. 눈빛이 멍했고,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밤에는 잠을 안 자고 낑낑대더니 부르는 소리에 대한 반응이 점점 느려졌다. 진단명은 인지장애. 수의사는 병을 최대한 늦추려면 새로운 곳에 데려가 산책을 하는 식으로 좋은 자극을 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미의 인지장애를 격하게 부정하며 연기라고 우기던 두 아들도 표정이 어두워졌다.

밤마다 낑낑대는 미미를 내 침대로 데리고 왔다. 미미는 내 품에서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며 잠들었다. 나는 잠들지 못하고 미미를 바라봤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겠구나.

아침이 밝아왔다. 미미와 미나에게 밥을 주고 나갈 준비를 했다. 다시 나서는 산책 길. 미미가 자꾸 두리번거린다. 십년을 다니던 산책길인데.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미미에게 말을 건다. "바보 미미, 아직 길도 몰라?" 그런데 내 목소리는 자꾸 갈라지고 떨린다. 미나는 늘 그렇듯이 가만히 서서 미미를 기다리며 아기사슴 같은 눈동자로 나를 위로한다.

다시 정신을 바짝 차린다. 아직 우리가 함께하고 있는 이 시간마저 마침내 다가올 슬픔에 미리 넘겨주고 싶지 않다. 쉬기 좋은 지점에 머물며 다시 아이들은 봄에 취하고 나는 볕에 취한다. 오늘의 선곡은 안 슬프고 이름다운 곡인 쇼팽의 <즉흥 환상곡>. 턱을 괴고 앉아 아이들을 바라본다.

하산하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 발을 씻기고 말린 뒤 물과 간식을 챙겨준다. 미미는 꼬리를 내리고 빙글빙글 돌더니 누워서 멍 때리기 시작한다.

스윽 훑고 가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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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들지 못하고 미미를 바라봤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겠구나. ⓒ unsplash

출근하려던 남편이 돌아서서 미미를 보고 "다녀올 테니 잘 있으라" 인사한다. 아들 둘도 시간차로 나가며 미미 이마에 뽀뽀를 한다. 미미는 우리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면벽수행을 할 뿐이다.

앞으로 우리가 몇 번의 봄을 함께 할 수 있을까. 미미가 찢어놓은 벽지, 미미 냄새나는 소파, 미미의 흔적이 가득한 이 집에서 미미가 없는 시간들은 어떻게 보내야 할까.

아무리 깨어 있으려 노력해도 현실을 온전히 산다는 것은 이토록 어려운 일이구나. 바보같이 나는 매시간, 매분, 이별이 오기도 전에 이별을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또 나를 마주한다. 살아도 살아도 이별은 늘 뜻밖의 일이 되는 나약한 나를.

요즘 음악 차트 역주행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룹 잔나비의 노래를 들었다. 히트곡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의 첫 소절이 인상 깊다.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스윽 훑고 가셔요."

나는 다치기 쉬운 마음이다. 그러니 이별도 슬픔도 머물지 말고 훑고 지나가길. 스윽, 그렇게 빨리...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반려견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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