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이슬' 글자는 몇 번 만에 완성됐을까?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 강병인 서예가 겸 멋글씨예술가 인터뷰 ②

등록 2019.04.28 11:38수정 2019.05.1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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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작업실에서 글씨를 써내려가는 강병인 멋글씨예술가 ⓒ 강병인글씨연구소

 
혹독한 노력 속에 피어난 멋글씨

잡지 폐간 후 광고회사에 입사한 그는 로고나 광고의 타이틀을 캘리그라피로 써서 제안하면서 광고주와 시장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2001년에는 그동안 준비했던 캘리그라피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글씨 하나로 술술 통하는 세상을 만들자'는 뜻을 담아 작업실 이름을 '술통'으로 정하게 된다.

처음 캘리그래피를 선보일 때만 해도 그 가치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 시장 진입이 어려웠던 것이 사실. 그러나 광고주와 사용자로부터 서서히 호응을 얻으면서 작업 의뢰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3년에 온누리교회 전도 집회 포스터를 만드는데 '해바라기' 글씨를 쓰게 됐어요. 해바라기가 형상화하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간절히 바라는 애틋함을 담고자 했죠. 당시 김혜자씨가 모델이었는데 광고주들의 반응이 정말 좋았어요. 캘리그래피의 효과에 대해 체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시장도 점차 확대됐죠."
 

tvN드라마 미생/2014년/글씨 강병인 ⓒ 강병인글씨연구소

 
그렇게 그가 창조해낸 멋글씨들은 '참이슬', '산사춘', '화요' 같은 제품부터 TV 드라마 '정도전', '미생', '대왕세종'은 물론이고, 소설 '초한지', '객주' 등 다양한 영역으로 스며들어갔다. 그의 손끝에서 많은 글씨들이 피어났지만, 어느 하나도 쉽게 쓰인 것은 없다.
 

참이슬3종 /2006-2012 /강병인글씨 ⓒ 강병인글씨연구소

 

"참이슬은 거의 천 번 이상 썼을 거예요. '참이슬'의 '차'까지는 잘 썼는데 종성 'ㅁ'이 이상해서 다시 쓰고, '참'은 또 마음에 드는데 '이'자의 동그라미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쓰고, 쭉 가다가 마지막 '슬'의 종성 'ㄹ'이 잘못되면 또 다시 쓰고요. 참이슬의 세 자가 조화를 이루지 않으면 또 다시 쓰고요. 아주 짧은 획 안에도 만 근의 화살을 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돼요. 또 힘만 있으면 안돼요. 근육도 있고, 피도 흘러야 해요. 안 그럼 죽은 글씨나 다름없어요. 남다른 조형미와 독창성이 있어야 그 글씨의 생명력이 있는 거잖아요? 그만큼 산고와도 같은 작업이죠."
 

문자 이전의 표현을 주제로 문자의 소중함을 표현하고 있는 '세계문자심포지아 2018' 황금사슬 오프닝 퍼포먼스/2018년/글씨 강병인/사진 윤용기 ⓒ 강병인글씨연구소

 
20년의 내공을 가진 멋글씨예술가로서 이제는 안주할 법도 하건만, 그는 결코 자신이 쓴 글씨에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이전에 쓴 글씨를 돌아보며 더욱 나아지는 내일을 꿈꾼다.

"제가 해놓은 작업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낄 때도 있지만,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결과물들도 분명 있어요. 그렇지만 끊임없이 제 자신을 공부의 길로 내몰고 글씨를 쓰는 이유는 남의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을 만들기 위함이잖아요. 글씨는 나의 삶이고 어쩌면 전부이고 너무도 큰 즐거움이기 때문에 잘된 것만 나열해놓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초기에 쓴 낯부끄러운 글씨들도 제가 걸어온 하나의 과정이기 때문에 홈페이지에도 그대로 둡니다. 제자들에게 교육할 때도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90년대에 썼던 글씨를 보면 정말 엉망이다' 하면서 초기작을 보여주기도 하죠."

갇힌 틀을 깨고, 새것을 창조하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한글학회, 세종대왕 생가터, 주시경 집터, 광화문광장 등 한글 관련 시설이 풍부한 세종대로 일대를 한글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관광 중심지가 조성됐다. 그는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 위해 추진한 '한글마루지사업'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홍대에서 서촌으로 작업실을 옮겼다. 한글이 태어난 곳이자, 한글의 최종 성지인 이곳에서 한글을 더욱 가치 있게 빛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작업실을 '세종의 한글 정신을 잇는 이들이 꿈꾸는 터'로 규정하고, 교육을 통해 많은 이들과 그 가치를 나눠왔다.
 

종로에 위치한 강병인 작업실 ⓒ 강병인글씨연구소

   
후학 양성에 심혈을 기울인지도 어언 15년, 흔들림 없이 강조해온 것은 '기본기를 탄탄하게 닦는 것'이다.

"처음부터 멋진 글씨를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제 수업의 70%는 기초 서예를 배우고, 나머지 30%가 응용 공부를 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옛것을 배워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을 창작의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좋은 선생의 글씨를 공부하는 임서(臨書)를 거쳐 마지막은 자기만의 글씨를 쓰는 것이죠. 그러나 서예의 기본기만 익힌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구요. 한글을 서예나 캘리그래피로 표현하고자 한다면 한글에 대한 제자원리도 반드시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해요.

우리 문자는 세계 어느 문자에도 없는 제자원리를 밝혀 놓은 책이 있지요. 바로 훈민정음해례본이죠. 이 책에는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배경과 그 원리를 자세하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어 놓았어요. 하늘과 땅, 사람이라는 체계를 가지고 있지요. '콩콩'의 모음을 돌리면 '쿵쿵'이 되고 '엉엉'의 모음을 돌리면 '앙앙'이 되듯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순환의 원리로 적을 수 있도록 하였고, 음양오행의 이치와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니 반드시 공부해야 하지요.

그리고 창작의 태도도 중요해요. 스승이나 누군가가 써 놓은 글씨를 그대로 답습할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생각과 해석, 이야기를 담을 줄 알아야 해요. 꽃을 심으려고 땅을 파는 것과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땅을 파는 것이 완전히 다르듯이, 같은 사물도 보는 시점에 따라 감정이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좋은 글씨를 쓰려면 인간계와 자연계를 많이 넘나들어야 합니다. 글씨도 결국은 인간과 자연의 삼라만상을 획 안에 붙잡아 두는 거거든요. 사람들도 많이 만나야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녀야 해요. 머리 위에 360도로 도는 안테나를 달고 있어야 한다고도 말해요. 세상의 모든 움직임을 꿰뚫고 있어야 만이 살아있는 자기만의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세종의 한글 정신을 잇는 이들이 꿈꾸는 터’로 규정하고, 많은 후학들과 그 가치를 나눠온 작업실 ⓒ 강병인글씨연구소

 
캘리그래피를 통해 한글의 디자인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확장시켜 온 노력을 인정받아 2012년 '대한민국디자인대상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한 데 이어 2013년과 2014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꾸준한 저서 출판으로 한글의 미학과 우수성을 널리 알려왔다.

특히 지난해 출판된 한글 그림책 <한글꽃이 피었습니다>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선정하는 '2018 문학나눔 도서'로 선정되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디자인과 서예를 접목한 캘리그래피, 즉 멋글씨의 선구자로서 걸어온 지도 올해로 20년, 지난 시간의 정리와 앞으로 실천할 새로운 계획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한글의 디자인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확장시켜온 강병인 ⓒ 강병인글씨연구소

  
"지난 작품들을 정리하는 전시와 책 출판을 계획 중이고요. 앞으로는 순수작품 작업에 더 몰두하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로는 국내 서예시장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어요. 서예가 일필휘지이다 보니 품이 들어간 것에 비해 너무 비싼 것이 아니냐고 오해하시는 분들도 많은데요. 서예는 그 짧은 시간에 작가의 정신과 그동안 갈고닦았던 수양, 노력이 일시에 들어가는 거거든요. 중국 같은 경우에는 서예시장이 엄청난 규모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중국화의 거장, 치바이스(제백석) 작품 같은 경우에는 천억이 호가하는 작품도 있어요.

물론 작품 가격만으로 시장의 규모를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조형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캘리그래피를 가볍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캘리그래피를 통해 서예시장을 확대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예전부터 한글서예가 우리 서예의 미래라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최근 서예하시는 분들도 한자 위주의 작업에서 한글로 넘어오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 길목에 바로 캘리그래피가 있었고요."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2017년부터 (사)세계문자연구소 이사이자, (사)국립한글박물관 후원회 이사로 일하면서 한글 사랑의 정신을 몸소 실천해온 그는 미래의 세대가 찬란한 유산과 함께 건재할 수 있도록 쓰고 기록하며 흐트러짐 없이 전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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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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