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자필 편지 "누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발굴] 1987년 전두환 정권 사찰 폭로하며 그가 남긴 인권침해 기록

등록 2019.04.28 15:29수정 2019.04.2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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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4월 고 김홍일 전 의원이 당시 내무부장관과 법무부장관에게 보낸 편지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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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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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본인은 김대중씨의 장남으로 현재 정부가 가친(家親) 김대중씨와 직계가족에 대해 취하고 있는 일련의 불법부당한 인권탄압 및 불법조치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즉각 시정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지난 20일 타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1987년 4월 18일에 작성한 친필 편지 중 일부다.

당시 김 전 의원은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게 일던 1987년 봄, 경찰에 의해 감시와 미행을 당했다. 심지어 아버지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이에 김 전 의원은 그해 4월 내무부장관과 법무부장관에게 자필 편지를 보내 '시정'해 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20여 일이 지나도록 김 전 의원은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다. 다음 달인 5월 8일, 김 전 의원은 당시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이던 문인구 변호사에게 자신이 당하고 있는 불법행위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며 "현행법상 적법한지를 따져달라"는 또 다른 자필 편지를 보냈다.

김홍일 전 의원의 장례가 엄수된 지난 23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영면하신 김홍일 의원 관련 소식을 접하고 그가 남긴 편지가 떠올라 제보한다"면서 관련 내용을 <오마이뉴스>에 알려왔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오마이뉴스>에 건넨 김 전 의원의 편지 두 통은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작성됐다.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그가 군사정권으로부터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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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남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이 20일 오후 5시께 별세했다. 향년 71세. 사진은 1970년대 초 무렵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가족의 모습. 오른쪽 두 번째가 김 전 의원. ⓒ 연합뉴스

 
두 통의 자필 편지
 
내무부 장관, 법무부장관 귀하
제목 : 김대중씨와 직계가족에 대한 부당한 인권침해에 관한 항의


본인은 김대중씨의 장남으로서 현재 정부가 가친 김대중씨와 직계가족에 대해 취하고 있는 일련의 불법부당한 인권탄압 및 불법조치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즉각 시정해 주시기를 강력이 요청하오니 선처있기를 바라며 다음 항목별로 회신하여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1. 가친 김대중씨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매주일 서교동 성당 미사에 참석해 오셨는데 지난 주일부터 단순한 종교예식인 미사에마저 참석치 못하게 하는 등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자유마저 박탈하는 행위를 자행하고 있는데 즉각 시정하여 주시기를 강력히 요망합니다.


2. 본인은 가친 김대중씨의 장남으로서 당연히 부모님을 모시고 동거봉양해야 되는 입장이나 사정상 독립 별거하고는 있으나 매일 문안을 드리면서 생활해온 바 지난 4월 13일 12시 30분부터는 가친 댁에 출입이 경찰에 의해 강제봉쇄금지 되고 있는 바 천륜을 끊는 이와 같은 조치는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지 즉각 시정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본인뿐만 아니라 가친의 자부와 손자가 되는 본인의 처, 자녀들마저 출입이 봉쇄되고 가친의 친동생인 혈육마저 출입이 금지되고 있는 것 등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인간의 지엄한 사생활 권리 침해라고 단정하며 즉각 시정을 요청합니다.

3. 본인의 가친 댁 출입이 봉쇄된 직후부터 본인이 육안으로 확인한 것만도 다음과 같이 경찰과 차량이 본인을 집요하게 미행 감시하고 있는 바 이는 무슨 까닭인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으므로 이와 같은 불법부당한 조치를 즉각 시정해 주실 것을 강력히 요구하며 회신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4월 13일...
이상 장관님의 적절한 조치가 있기를 바라면서, 김홍일 올림

김 전 의원은 내무부장관 및 법무부장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친 김대중씨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주일마다 서교동 성당 미사에 참석해 오셨는데 지난 주일(1987년 4월 초)부터 단순한 종교예식인 미사마저 참석치 못하게 하는 등 헌법상 보장된 종교의 활동마저 박탈당하고 있다"면서 "본인뿐 아니라 가친의 자부와 손자가 되는 본인의 처, 자녀들마저 출입이 봉쇄되고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인간의 지엄한 사생활 권리침해다. 즉각 시정을 요청한다"라고 호소했다.

이어 "본인은 가친 김대중씨의 장남으로서 사정상 독립해 있으나 매일 문안을 드리면서 생활해 왔다"면서 "4월 13일 12시 30분부터는 가친집에 출입이 경찰에 의해 강제봉쇄금지 되고 있는 바 천륜을 끊는 이와 같은 조치는 어디에 근거하는 것인지 즉각 시정해 주시기 바란다"고 요구했다.

특히 김 전 의원은 "가친집 출입이 봉쇄된 직후부터 경찰과 차량이 본인을 집을 집요하게 미행 감시하고 있"다며 미행 및 피해를 사례별로 언급, '항목'별로 회신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한다고 썼다. 사복경찰의 인원과 차량 정보까지 일자별로 정리해 덧붙였다.

4월 13일 서울 4거 9539호, 서울 1모 8835 / 사복경찰 4명 탑승
4월 14일 서울 4거 9539, 서울 1모 8835 / 사복경찰 4명 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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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 전 의원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시 경찰을 총괄하던 내무부장관은 전두환의 육사 동기인 정호용이었다.

정호용은 전두환이 1979년 12.12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대구 주둔 육군 제50보병사단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는 전두환 신군부 쿠데타 후 영전해 특전사령관이 됐다. 이후엔 육군 대장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으로 예편했다. 군을 떠난 뒤인 1987년 1월 처음으로 맡은 직책이 전두환 정권의 내무부장관이었다.

1987년 4월, 사복경찰로부터 미행과 사찰을 당하던 김 전 의원이 전두환의 가신 정호용 내무부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김홍일 전 의원은 내무부장관 등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답장이 없자, 5월 8일 문인구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게도 자필서신 '관에 의한 인권 및 사생활 침해에 관하여'를 보내 비슷한 호소와 요구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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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홍일 전 의원은 1987년 5월 문인구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에게 호소문 형태의 국한문 혼용 편지를 남겼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0년엔 고문, 87년엔 사찰

김 전 의원은 앞서 1980년 5월 17일 신군부에 의해 중정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당시 김 전 의원은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책상 위에 올라가 땅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자해를 기도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 전 의원은 고문 후유증으로 거동에 상당한 불편을 겪었고, 의원 시절에는 파킨슨병까지 얻었다.

1979년 10월 박정희 사후 12.12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이듬해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내리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체포했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헌병단에 체포됐는데, 학생 및 노동자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김 전 의원도 체포된 것이다.

이어 신군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주동자로 김대중을 지목하여 내란 혐의로 기소하고, 1981년 1월 대법원은 군사재판에서 김대중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당시 교황인 요한 바오로 2세 등 국제 사회 지도자들이 나서 사형 중단을 요구, 여론에 밀린 신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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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고인을 추모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7년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오자 신군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홍일 전 의원을 다시 집중 감시·미행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김 전 의원은 "관에 의한 인권 및 사생활 침해가 심각하다"며 위와 같은 편지를 남긴 것이다.

지난 20일 영면한 김 전 의원은 23일 오후 광주 민족민주열사묘역(5·18 구묘역)에 안장됐다. 향년 71세.
#김홍일 #김대중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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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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