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런 건 나도 그려" 피카소 무시하는 당신이 모르는 것

[그림의 말들] 질문을 멈추지 않은 거장, 파블로 피카소

등록 2019.05.08 16:27수정 2019.05.08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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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게르니카(1937) ⓒ 소피아 왕비 미술관

 
죽은 아이를 안고 우는 여자, 창에 찔려 비명을 지르는 말, 누워있는 시체, 무릎을 꿇은 채 절규하는 사람,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명들. 이들의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흑백이라 음울한 분위가 더욱 진한 이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최고의 걸작이라 불리는 '게르니카'다. 그림 위의 전등은 태양을, 바닥의 부러진 칼은 민중의 패배를 상징하는 이 그림은 스페인 내전 당시 게르니카 지역에 실제로 벌어진 일을 주제로 다뤘다.

이건 당신들이 그린 그림이야

1937년 4월 26일, 공화당의 반대파인 프랑코 정권의 요청을 받은 나치는 24대의 폭격기를 동원해 스페인의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참히 폭격했다. 이 폭격으로 2000명이 넘는 지역주민이 죽거나 다쳤다. 남자 대다수는 전선에 투입된 상태라 마을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이 있었다.

게르니카 주변의 다리와 도로를 파괴해 병력이동과 군수품 보급에 지장을 주려는 게 당초 계획이었지만 나치는 방향을 틀어 마을을 공격했다. 무차별 공격으로 공화주의자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면서 동시에 독일의 무기를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바스크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문화 전통의 중심지인 게르니카가 어제 오후 반란군의 공중폭격으로 완전히 초토화됐다. 폭격은 방어 능력이 없었으며 전선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이 도시에 45분간 계속됐다. (중략) 그런가 하면 전투기들은 밭으로 달아나는 주민들에게도 무차별 기관총을 쏘아댔다. 이리하여 게르니카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변했다. - <런던타임스> 보도 내용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는 이 사실에 격노했다.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할 그림을 의뢰받았던 피카소는 이 뉴스를 듣자마자 하던 작품을 멈추고 게르니카 제작에 돌입했다.

전쟁을 다룬 그림은 이전에도 많이 그려졌다. 현실 속 장면을 재현해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여타의 그림들과는 달리, 피카소는 각각의 상징을 담은 조각들을 그려 개인들이 전쟁으로 겪는 극단적인 고통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게르니카는 반전의 상징이 됐다. 7번의 수정 과정을 사진으로 남긴 피카소는 주옥같은 말을 남겼다.

"예술가는 정치적인 존재인 동시에 처참한 상황이나 세상의 모든 역경이며 기쁨에 공감할 줄도 알고 자기방식대로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사실이 이러할진대 예술가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할 수 있으며 무슨 배짱으로 여느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에 무심할 수 있는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림은 결코 아파트를 치장하려고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림은 적에게 맞서서 싸우는 공격과 방어의 무기입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을 당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이 그림을 당신이 그렸냐'고 물었다. 피카소는 답했다.

"아니, 당신들이 그렸지."

게르니카는 가로 776.6cm, 세로 349.3cm에 달하는 벽화 크기의 대작이다. 이 그림은 스페인이 민주화될 때 고국에 반환하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까지 뉴욕 현대 미술관에 보관하다가 이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피카소의 시간이 '거꾸로' 간 이유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의 루이스는 아버지 성, 파블로는 어머니 성이다. 피카소는 어머니의 성만 따와서 19세 때부터 파블로 피카소로 사인했다.

그는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났을 때 숨을 쉬지 않아 산파는 아이가 죽었다고 생각했으나 먼 친척뻘의 의사였던 돈 살바도르가 살려냈다. 방법은 물고 있던 담배 연기를 아이 얼굴에 뿜은 것. 아기는 기침했고, 살아났다. 지금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지만 이 이야기는 피카소의 전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시립미술관 관리자이자 미술 선생님이었다. 무명 화가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피카소의 재능을 누구보다도 일찍 알아봤다.

그림에 필요한 기본은 아버지에게 배웠다. 피카소가 13세가 됐을 때 아버지는 비둘기를 그린 캔버스를 피카소에게 넘겨주며 비둘기 다리를 그리게 했는데,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모든 화구를 피카소에게 넘겨주고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

이미 아들이 자신을 넘어섰음을 본 것이다. 화구를 물려받은 피카소는 기류를 탄 새처럼 날아올랐다. 어느 미술학교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프라도 미술관이 그의 학교였고 그곳의 그림들이 그의 선생님이었다.
  

첫 영성체(1885~1856) ⓒ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이 그림은 피카소가 14세 때 그린 작품 '첫영성체'다. 피카소의 공식적인 대형 작품인 이 그림은 아카데믹한 종교화다. 1896년 이 그림은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가장 중요한 전시에서 일급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됐다.

다음해 '과학과 자비'로 피카소는 마드리드 국전과 말라가 지역에서 최우수상과 금상을 받았다. 바르셀로나도 마드리드도 그를 품기엔 좁았다. 예술계의 거장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소년 피카소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아이의 그림이 아니라 타고난 화가의 그림이었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에는 성인처럼 그렸고 말년에는 아이처럼 그렸다. 피카소 전시는 우리나라에도 자주 열리는데, 그의 전시 때마다 주변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다. "저런 건 나도 그리겠다." 그의 행로를 안다면 절대 할 수 없는 말. 그는 라파엘로와 같은 고전적인 그림들을 이미 어린 시절에 섭렵했고, 그 위에 새로운 양식인 큐비즘을 탄생시킨 천재 화가이기 때문이다. 

큐비즘의 탄생
  
르네상스 이래 원근법이 그림에 도입되면서 그림에 깊이가 생겨났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원근을 나타내는 표현은 오랜 시간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잔이 나타났고 세잔 이후로 그림을 실제와 똑같이 그리는 것은 의미를 잃었다. 대신 '내가 어떻게 보는가' 하는 주관적 표현이 더 중요하게 됐다.

"나에게 회화의 목적은 움직임을 그리는 것도 움직이는 세계를 그리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회화란 오히려 움직임을 고정하는 일이다. 이미지를 고정하려면 움직임보다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만 쫓을 따름이다. 나에겐 바로 그런 순간만이 현실이다."

피카소는 원근법을 없앴다. 사물이 보이는 각도에 따라 보이는 단면을 분석해 평면적으로 캔버스에 펼쳐 놓고, 여러 개의 시점을 한 화면에 구성했다. 이것을 큐비즘이라 한다. 어떤 면에선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초현실주의와 가장 구별되는 점이다. 초현실주의가 무의식의 표현이라면 큐비즘은 있는 사물을 해체하고 해체한 단면을 분석,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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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뇽의 여인들(1907) ⓒ 뉴욕 현대미술관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표현을 창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는 영역을 넘어서야 가능한 일이다. 피카소의 이름 앞에 '위대한'이란 수식어가 붙는 이유다. 이렇게 큐비즘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작품이 그 유명한 '아비뇽의 여인들'. 놀랍게도 그림을 완성한 당시 피카소의 나이는 26살이었다.

"내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릴 때 사람들은 잘못 짚었다고들 했지만, 어쨌든 나는 사람들이 내가 뭔가 짚기는 짚었다는 사실을 알도록 만들었다. 나는 나중에 사람들이 내가 잘못짚은 것이 아니었단 사실을 인정하리라 확신했다."

20살 이후, 피카소는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서 주로 활동했다.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 사랑에 빠진 그는 가난했던 타국 생활의 우울함과 절친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담은 '청색 시대'를 지나, 화사한 색감을 담은 '장미 시대'로 돌입한다. 그리고 연이어 큐비즘이 탄생했다. 피카소는 그렇게 일찌감치 성공 가도에 올랐고, 전 세계가 그에게 주목했다.

피카소와 한국의 인연
 

한국에서의 학살(1951) ⓒ 파리 피카소 미술관

  
1951년 피카소는 다시 한번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작품을 그렸는데, 황해도 신천 지역에서 벌어진 대학살을 주제로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전쟁을 다룬 그림이다.

그림의 왼편에는 아이를 안고 우는 여인, 체념한 듯 눈을 감은 임신한 여인, 놀라서 달아나는 아이, 이 상황이 뭔지 모르고 흙장난 중인 아이가 그려져 있고, 오른편에는 벌거벗은 사람들을 향해 로봇처럼 서서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들이 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여인들이나 투구를 써서 누가 총을 쏘는지 모를 군인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은 학살의 주체가 누구인지보다는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인간의 무자비함과 전쟁 자체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죽기 12시간 직전까지 그림을 그린 피카소는 회화뿐 아니라 조각, 도자기, 판화 등 총 5만 점에 달하는 작품을 남겼다. 끊임없이 익숙한 것에 질문하고 새로운 시각을 추구했던 피카소는 92세의 나이에 잠을 자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가능하면 사람들이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그리고,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유별나게 그리려 애를 쓴다. (중략) 내 작품에 산재한 요소들은 사물을 전통적 회화의 눈으로 보는 데서 출발하긴 한다. 하지만 표현의 방식이 예상을 벗어나고 안정감을 흔들어놓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참고서적]
인터발고 <파블로 피카소>(마로니에 북스, 정재곤 옮김)
프란체스코 갈루치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 피카소 무한한 창조의 샘>(마로니에 북스, 김소라 옮김)
피에르 덱스 <창조자 피카소>(한길아트, 김남주 옮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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