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에서 부다페스트 다음 가는 도시는? 정말 의외다

[유최늘샘의 세계방랑기 26] 서유럽이 되고 싶은 동유럽에서

등록 2019.05.18 21:55수정 2019.05.1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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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델라 요새에서 부다페스트 시가지를 바라보는 여행자들. ⓒ 최늘샘


헝가리는 헝그리해요, 배가 고파요

아프리카 서쪽 모로코에서 동쪽 이집트로 가는 비행기가 비싸서, 계획에 없던 동유럽을 경유하게 됐다. 동유럽에 와서야, 내가 지금껏 가지고 있던 '유럽'에 대한 생각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현대 문명의 모델이 된 유럽' 혹은 '온세계의 식민지배국이었던 부유한 유럽 세계' 는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서유럽 주류 강대국들의 일면일 뿐이었다. 서유럽과 동유럽은 어떻게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궁금해졌다.

동유럽과 서유럽의 구분은 국경처럼 명확한 것이 아니다. 오스트리아는 동쪽에 가깝지만 서유럽처럼 느껴지고 슬로베니아는 서쪽에 가깝지만 동유럽처럼 느껴진다. 주로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지역을 지금까지도 동유럽이라고 부른다. 지리적 경계와 사회적 경계에는 차이가 있고, 경계를 구분하기 어려운 지역도 많다. 러시아와 터키는 유럽일까 아시아일까. 아라비아, 중동이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 여행은 고국의 일상에서 생각지 않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다양한 세계를 고민하게 한다.

이왕 발을 디뎠으니,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던 발칸반도의 나라들을 거쳐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던 터키를 여행한 뒤, 이집트부터 다시 아프리카 여행을 이어나가자고 마음먹었다.

첫 기항지는 동유럽 중간에 위치한 헝가리. 저가 항공 답게 비행기는 늦은 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다. 벤치나 바닥에 누워 잠든 사람들과 함께 익숙한 공항 노숙을 했다. 은행 운영 시간에는 수수료가 조금이나마 덜 나올까 싶어서 아침 아홉시까지 기다렸다가 현금을 인출했다.

시간별 차이는 전혀 없는 건지, 고작 12만 원을 뽑았는데 수수료와 환율 차액이 2만8000원, 수수료로 악명 높은 아르헨티나 보다 더했다. 가만히 앉아서 돈 놓고 돈 먹는 건 은행 밖에 없는 듯, 답답해도 눈 뜨고 코 베여야 하는 금융자본의 세상임을 실감했다.


헝가리의 슈퍼마켓 상품이나 버스 광고에서 독일 국기가 붙어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수십 년 전 남한 사회에서 '일제'가 튼튼하고 좋은 것으로 여겨졌듯이, 동유럽 나라들에서는 이웃한 부자 나라 독일 제품이 좋은 것으로 생각되고 발전의 모델이 되는 모양이다. '서쪽이 되고 싶은 동쪽'이라는, 비교와 차이, 선망과 열등감을 담은 표현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씁쓸했다.

탈아입구,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해 구라파가 되기를, 남한은 일본 같은 경제 성장을 꿈꿨다. 동쪽이 꿈꾸는 서쪽 강대국들은 더 무엇이 되기를 꿈꿀까. 제2세계, 제3세계의 열등감 보다 무서운 자만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까. 계속해서 부를 유지하기를, 더욱더 강대하기를 바라는 것이 자본과 힘의 끝없는 욕망일 것이다.

다시 씁쓸하게도, 동유럽은 서유럽 보다 물가가 저렴해서 배낭여행자가 머물기에는 부담이 적었다. 하루에 5유로, 10인실 방이 십여 개, 그래서 아침 식사 시간이면 백여 명이 북적거리지만 무척 깨끗하고 편안하게 관리되는 대형 호스텔에서 열이틀을 쉬며 그동안의 여행기를 정리했다.

부다페스트 중심에는 대관람차 '런던 아이 London eye'를 본따 만든 '부다페스트 아이'가 있다. 매일 오전과 오후에 '프리 워킹 투어'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부다페스트 워킹 투어 주제는 주요 유적지, 유대인 역사, 공산주의 역사, 거리 예술 등으로 나뉘는데 나는 유대인 역사와 공산주의 역사 투어에 참가했다. 유대인 역사 투어를 선택하는 여행자들이 가장 많아서, 유럽인들의 유대인 학살 역사에 대한 경각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뉴브 강변에 설치된 유대인 학살 추모 기념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총살 당한 뒤 강물에 떠내려간 사람들의 신발이 놓여 있다. ⓒ 최늘샘


"헝가리는 2004년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경제는 좋아지지 않았어요.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새로운 기회를 찾아서 서유럽으로 떠나가지요. 헝가리에서 부다페스트 다음 가는 도시가 어딘지 아세요? 바로 런던입니다! 농담이지만, 그만큼 런던에는 헝가리 이주노동자들이 많아요. 만약에 당신이 런던의 어느 레스토랑에 간다면, 주문을 받는 직원은 십중팔구 헝가리사람일 거예요. 헝가리는 헝그리해요. 배가 고파요."

무너진 사회주의와 비정한 자본주의 너머
 

'자유의 다리'에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청년들. ⓒ 최늘샘

 
다뉴브강은 독일에서 시작해 헝가리를 지나 흑해까지 이어지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강이다. 부다페스트가 배경인 영화 <글루미 선데이>의 음율을 흥얼거리며 고풍스런 강변을 산책하다가 호스텔에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을 마주쳤다.

머리카락 모양과 옷차림이 독특해 보였는데 역시나 그는 거리의 로커, 가난한 예술가였다. 바린트 스제케레스씨는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음악을 시작했다. 낮에는 호스텔에서 청소일을 하고 저녁에는 다뉴브 강변 지하철역에서 홀로 거리 공연을 한다.

"어릴 때 짐 모리슨(도어즈), 커트 코베인(너바나) 노래를 들으면서 음악을 시작했어. 대부분 사람들은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는 내일 해야지'라고 하잖아. 그들은 절대 안 그랬어. 음악이든 마약이든, 멈추지 않고 끝까지 가려고 했지. 가족이나 친구들, 사회에서 하지 말라는 것만 하고. 그런데 이천 년 전에 예수도 그랬잖아? 지금은 칭송받지만 당시엔 완전 또라이 취급을 받았지. 예수도, 짐 모리슨도, 커트 코베인도 다른 사람들이 하지 말라는 것만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어버렸어. 사실 나도 중독 때문에 문제가 좀 있어. 음악을 좋아하냐고? 아니, 증오해! 푼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부다페스트 거리의 음악가. 바린트 스제케레스씨. ⓒ 최늘샘

  
나는 이름 없는 독립영화인으로서, 바린트 씨의 노래와 분노에 공감과 슬픔을 느꼈다. 바린트 씨는 너바나와 도어즈 같은 치열한 음악을 만들기를, 나는 왕가위나 짐 자무쉬 같은 독특한 영화를 만들기를 꿈꿨지만, 유행하는 표현처럼 '현실은 시궁창' 에 가깝다. 우리가 선망하는 특별하고 유명한 예술가들은 극히 소수일 뿐, 전 세계 대다수 무명 예술가들의 삶은 배고프고 막막하다.

'꿈은 이루어진다. 십 년을 한 우물만 파면 뭐라도 된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지만, 십 년을 하든 이십 년을 하든, 꿈꾸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아무리 배고프고 막막해도 우리는 아마 계속 노래를 부르고 영화를 만들 것이다.

남한 자본주의 사회, 경쟁과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살던 나에게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공선을 추구했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이상에 대한 약간의 동경이 있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붕괴 후 약 30년, 동유럽 사람들은 과거의 공산주의와 현재 자본주의로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대부분 사람들이 공산주의 시절보다는 지금이 낫다고 생각해. 그땐 비밀경찰이 활동했고 이웃끼리 감시했어. 여행도 못 가고 롤링스톤스도 못 들었잖아. 사람들이 일하려는 의욕이 적으니까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서 경제 발전도 어려웠지. 자본주의도 문제가 많다는 걸 모든 사람들이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다 같이 잘 살자고 시도했던 사회주의는 실패했고, 나만 잘 살면 되는 자본주의는 잘 굴러가고 있어. 역설적이지만, 어쩌겠어."
 

2011년 부다페스트 리버티 스퀘어(자유광장)에 세워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동상. ⓒ 최늘샘


부다페스트 자유광장에는 뜬금없는 로널드 레이건 동상이 서 있었다. 2008년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한 코소보 수도에는 역시 미국 대통령인 빌 클린턴 동상이 서 있었다. 그들은 과연 동유럽 사람들을 사회주의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일까. 강대국이 다른 나라를 돕는다면, 그건 선의가 아니라 이익을 위한 투자일 것이다.

남한 인천에도 여전히 맥아더 동상이 서 있는지 궁금했다. 맥아더가 밟고 선 땅 역시 레이건이 서 있는 땅처럼 '자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부다페스트 자유광장에서 인천의 자유공원까지, 냉전의 승리국, '자유'로운 자본주의의 제국, 미국의 권력은 전세계적이다.

이상은 아름다웠으나, 세계 곳곳의 사회주의 국가들에서는 독재와 억압이 벌어졌고 대부분이 무너져내렸다. 전세계를 지배하며 팽창하는 자본주의는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 걸까. 커다란 사회적 대안은 생각지 못하더라도, 돈과 자본에 억눌리고 휘둘려 숨막히지는 않는,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삶이 아무리 팍팍하고 막막해도,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다시 바란트 씨의 절규 같은 노래가 터널에 울려퍼졌다. 트램에서 내려 지하철을 갈아타는 퇴근길의 시민들은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노숙인들이 하나둘 터널 구석에 모여들어 박스와 담요를 펴고 잠자리를 만드는 시간. 부다페스트 강변에 밤이 내려앉았다.
 

부다페스트의 밤. ⓒ 최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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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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