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남자들이 제주도에서 벌인 일, 놀라지 마세요

[X의 오피스 살롱] 직장인들의 '여행의 이유'

등록 2019.05.11 12:34수정 2019.05.11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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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는 못했지만 나만의 미래를 꿈꾸며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는 낙관주의자입니다. 불안하지만 계속 나아가는 X세대 중년 아재의 좌충우돌 일상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 무엇을 해도 좋을 때이지만 여행을 떠나기에 더없이 좋은 시기다. 때마침 김영하의 신간 <여행의 이유>가 각종 서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작가의 명성이 주된 요인이겠지만 계절 또한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떠나고 싶어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는 직장인에게 5월은 잔인한 계절이 되기도 한다. 회사는 초일류 기업을 향해 다 같이 분발하자고 회사원들에게 강요하지만, 노동자의 권리는 아직도 초일류와 멀기만 하다. 그나마 20여 년 전 나의 직장 초년병 시절과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음을 느낀다.


현재 다니는 회사는 직급에 상관없이 눈치 보지 않고 한 달에 한 번은 자유롭게 휴가를 쓸 수 있는 분위기다. 그래서 나는 이번 5월 연차 휴가 때 30년 지기 친구들과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1993년 2월의 어느 날, 우리는 비둘기호를 타고 각자의 대학이 있는 도시로 떠났다. 졸업하면 서울에 있는 직장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다짐했다. 그 다짐대로 우리는 20대 후반 직장인의 신분으로 서울에서 다시 만났으며, 휴일마다 마티즈를 타고 춘천으로 양평으로 놀러 다녔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티즈는 중형차로 바뀌었고, 마침내 제주도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것.

흑돼지 먹다가 눈물 흘린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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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서 제주로 떠나는 날.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나이에 함께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행운 아닐까. ⓒ 이주영

 
김포에서 제주로 떠나는 날. 이만하면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의 나이에 함께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행운 아닐까. 가슴 깊은 곳에서 진한 감동이 올라오며 눈가가 시큰해졌다. 비행기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날 저녁. 다함께 흑돼지구이를 먹으러 갔다. 우리 테이블을 맡은 청년 종업원이 불판 앞에 둘러앉은 아저씨 네 명을 보며 밝고 힘차게 말했다.

"형님들! 그동안 돈 버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고기 맛있게 구워드릴게요!"


비행기에서 참았던 눈물을 엉뚱하게도 고깃집에서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별거 아닌 인사말에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 탓이리라.

그동안 우리는 나름의 여행계를 운영하며 회비를 모았지만 어디로도 떠나지 못했다. 시간을 맞추기 어렵기도 했지만,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함께 떠날 동력이 부족했다는 게 나의 판단이었다. 분명하고 명확한 목적이 필요했다. 내가 먼저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우리의 여행 목적은 너무나 미약했다. 따라서 이번에는 제주도에서 열리는 마라톤 10km 코스에 참가해 건강도 챙기고 추억도 만들자고 제안하는 바다."

나의 야심찬 제안은 친구들의 냉담한 반응과 수차례 무산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중년 남자 넷이 제주도 월정리 바다에 안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난과 역경은 멈추질 않았다. 때마침 비바람이 몰아치는 제주 바다는 낭만과 인적이 실종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함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가만히 보낸 시간 또한 즐겁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테이블에 펼쳐 놓으니 더욱 그럴싸해 보였다.

결국 우리는 다시 만났다

여행 둘째날, 아침부터 마라톤에 참가하기 위해 서둘러 채비했다. 출발 지점은 성산 일출봉. 형형색색의 화려함으로 한껏 무장한 푸른 청춘들 틈에서 우리는 가을날 거리의 은행잎 같았다. 우리도 한때 빛나던 시절이 있었는데... 하는 순간 60대 노부부가 사진을 찍어 달라며 내게 다가왔다. 아차 싶었다. 우린 아직도 젊다! 그리고 불현듯 아내가 보고 싶어졌다(혼자서 여행온 게 미안해서 형식적으로 넣은 문장이 아님을 알립니다). 다음에는 꼭 아내와 함께 제주를 달려 보리라. 

제주도 경치를 구경하며 유유자적하리라 다짐했던 두 명은 현장 분위기에 휩쓸려 비루한 몸뚱이를 이끌고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업 실패 후 10년 만에 모든 빚을 청산한 친구와 뛰다 걷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성산 일출봉과 바다를 바라보며 지난 10년을 되돌아봤다. 내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하기도 힘든 시련을 이겨낸 친구는 제주의 자연만큼이나 위대해 보였다. 그 시간을 잘 버텨주고 여기까지 와 준 녀석이 고마웠다. 윤상의 노래 '달리기'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유도 없이 가끔은
눈물 나게 억울하겠죠
일등 아닌 보통들에겐
박수조차 남의 일인걸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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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명 모두 각자의 속도로 달렸지만, 결국 같은 결승점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뜨거운 포옹 대신 목에 메달을 걸고 어색한 사진 한 장만을 남겼다. 이 시절을 청춘이라고 그리워할 시절이 또 오리라. ⓒ 김재완

 
네 명 모두 각자의 속도로 달렸지만, 결국 같은 결승점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뜨거운 포옹 대신 목에 메달을 걸고 어색한 사진 한 장만을 남겼다. 이 시절을 청춘이라고 그리워할 시절이 또 오리라.

2박 3일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길. 우리는 말 없이 창 밖만 바라보았다. 30년 지기들과 첫 제주 여행을 마치게 되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우리는 하나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출근하기 싫어!'

역시 직장인이 여행하는 가장 큰 이유는? 출근 안 해도 되니까!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2019


#여행의이유 #제주도 여행 #제주도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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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직 안 죽었다. 출간 찌라시 한국사. 찌라시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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