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는 핑크, 남자아이는 블루?

핑크=여성을 다시 생각하다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

등록 2019.05.06 14:33수정 2019.05.06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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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를 둔 부모님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자녀들에게 어린이날 선물을 해주셨겠죠? 아마도 자녀의 성별에 맞게(?) 선물을 준비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마트에 들렀다가 어린이 장난감 코너를 지나가는데 장난감을 성별에 따라 구별해 놓은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여자 아이들 장난감은 대체로 핑크색 계열이고, 남자 아이들 장난감은 파란색 계열입니다.
 

마트 어린이 장남감 코너 ⓒ 이훈희

 
장난감 코너를 이렇게 구분해 놓은 건 여자 아이들은 핑크색을 좋아하고 남자 아이들은 파란색을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성별에 따라 색상을 구분해 놨기 때문에 아이들이 선호하는 색상이 만들어지는 걸까요?

여자 아이 둘을 키우면서 딱히 색상에 대한 선호를 두지 않으려고 했음에도 아이들이 핑크색 장난감들을 좋아했던 것을 보면 유아기 때 선호하게 되는 색상은 타고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책표지 ⓒ 나눔의집

 
일본인 작가 호리코시 히데미도 어린 딸이 핑크색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서 의문을 갖기 시작해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라는 책을 썼습니다. 엄마가 블랙 마니아여도, 칙칙한 색 옷만 입어도 여자아이들은 유아기 때 대체로 핑크색에 빠져든다는 점을 저자는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딸 둘을 둔 아빠인 제게도 흥미로운 주제이고 의문이었습니다.
 
"국경을 초월해서 이렇게 많은 여자아이들이 핑크(혹은 프린세스, 반짝반짝거리는 것, 요정 등)를 좋아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사회적인 영향일까? 아니면 여자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핑크를 좋아하도록 타고나는 것일까? 설령 이것이 타고난 성질이라 할지라도 왠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핑크색에 왜 이런 찜찜함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과연 핑크색에서 또 다른 무엇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12쪽)

아이가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지 않기를

부모로서 아이들이 가능하면 특정한 틀에 갇히지 않고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이가 어느 한가지를 너무 좋아하게 되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특히나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어려서부터 성별에 따른 성역할에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되고 더 나아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그 틀에 갇혀 살아가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자 역시 자신의 딸이 미용, 소꿉놀이, 요리 등 기존의 여성 역할을 답습한 장난감들에 영향을 받아 고정된 성역할에 갇히게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민과 의문을 이 책에 차근차근 풀어냈습니다. 핑크가 어쩌다가 여자의 색이 되었는지 역사를 살피고, 기존 여아용 장난감과는 다른 접근을 하면서 핑크에 저항하는 운동을 소개합니다. 더 나아가 여성의 사회진출, 특히 이공계 분야로의 진출 문제까지 핑크와 연관지어 이야기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선 핑크색과 여자아이의 관계를 넘어 핑크와 남자아이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데, 이 부분을 통해 저도 '남자다움'이라는 기존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다는 점을 다시 환기할 수 있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나뉜 남성, 여성이라는 구분이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의 범위를 생각보다 크게 제한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이 이같은 틀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지각하고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재확인합니다.

핑크는 여성의 색? 역사는 짧다

18세기 프랑스 로코코 시대엔 여성 중심 문화가 활기를 띠었는데 이 때 귀부인들은 핑크색 옷가지, 가구, 식기 등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장미를 사랑한 마리 앙투아네트, '퐁파두르 핑크'라는 사기그릇 색에 이름이 사용된 퐁파두르 후작부인 등이 유명한 인물들입니다. 기원은 기껏해야 200여 년 정도이고 이런 경향이 심화된 것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고 하니 '핑크=여성의 색'이란 편견은 정말 얼마 되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여성적인 것으로 대표되는 보석, 스타킹, 하이힐, 리본과 레이스 등을 19세기 이전 서양에선 남성들이 권력 과시용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다윈의 진화론과 민족학이 계기가 되어 화려한 장식은 열등한/미개한 혹은 하류계층 남성들이 하는 것이란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어른 남성이 예쁜색이나 장식을 좋아하는 것을 '계집애 같은' 행위로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프랭클린 루즈벨트 ⓒ 나눔의집

 
무엇보다 신선했던 건 책에 실린 30개월 무렵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사진이었습니다. 1884년 사진인데 레이스 달린 치마, 끈 달린 구두, 긴 머리를 보면 딱 여자아이입니다. 당시엔 특별히 남녀 구분 없이 아이들에게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아동심리학이 등장하면서 남자 아이들의 자위, 동성애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가설 등으로 인해 남아들 옷이 '남자다워'지게 되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 미국에서 핑크는 여성스러움의 상징이 됩니다. 핑크와 여성이 밀접하게 연결된 역사는 결코 길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여자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핑크색 용품들로 둘러싸이게 된 이유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추정하는데 그럴 법합니다.
 
"전쟁에서 해방된 여성들은 무엇보다도 남성의 사랑을 받는 것이 풍요로움과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었을 것이다. 그러려면 자신이 전쟁에 지친 남성들을 위로해줄 수 있는 가정적인 존재임을 어필해야 한다. 그래서 핑크색 옷을 입고 남편에게 헌신하는 순종적인 모습,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스러움, 가정을 행복하게 만드는 적절한 백치미를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당시에 핑크가 여성성과 강하게 연결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찍이 여성들의 '입신 출세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42쪽)

아들이 핑크를 좋아하고 귀여움을 추구한다면?

책에서 다룬 여자아이와 핑크색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보다 관심이 갔던 부분은 남자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압박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여아용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브로니'들은 또래 아이들에게 조롱과 무시를 당한다고 합니다. 제 어린시절을 돌아봐도 그랬던 것 같고, 책을 읽으면서 남자아이가 핑크 인형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떠올려보니 뭔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여성스러움보다는 남성스러움에서 벗어나는 이미지에 보다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게도 기존의 성별 이미지가 고착되어 있는 것이겠죠. 남자아이에게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미국의 경우 귀여움을 추구하는 남자아이들이 심하게 차별을 당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여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남자아이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자는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취향에 대한 억압을 받게 되는 사회를 '숨막히는 사회'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을 줄여나가는 방법으로 남자아이에 대한 억압에 초점을 맞춰보면 어떨까 제안하는데 일리가 있습니다. 이는 여성이 사회로 진출하는 만큼 남성이 가정에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과도 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남자아이 자신이 '가와이'를 버리는 일 없이 그 영역에서 감성을 다듬어 간다면, 성장한 뒤에 여성에게 '순진무구한 객체로 있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남성 부재의 육아 현장에서는 남성성을 텔레비전 방송이나 소년 만화, 게임 등에서밖에 배울 수가 없다. 대중문화는 보다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도록 표현이 고정관념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점점 더 치우치기 마련이어서 배틀이나 경쟁을 좋아하지 않는 남자아이가 롤모델로 삼을만한 현실적인 남성상을 기르기 어렵게 만든다."(238쪽)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을 가진 부모들로 인해 자녀들이 억압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남자아이가 핑크색이나 귀여운 것을 좋아할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저자는 콜린 스톡스씨의 TED 토크를 인용하면서 남자아이를 겨냥한 영화에서 배우는 남성성은 주로 폭력으로 악인을 쓰러트리는 영웅이 주류라는 것을 언급합니다. 콜린 스톡스씨가 말한 것처럼 아들들에게 새로운 롤모델이 시급해 보입니다.
덧붙이는 글 기자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여자아이는 정말 핑크를 좋아할까

호리코시 히데미 지음, 김지윤 옮김,
나눔의집,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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