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3번째 죽음...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청와대 앞 눈물의 삭발

[현장] 가습기넷, 청와대에 공개서한 전달... "피해자 인정기준 완화해야"

등록 2019.05.07 17:15수정 2019.05.0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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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해 기업 엄단하라"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들이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삭발한 뒤 피해자 전신질환 일정과 판정기준 대폭 완화, 피해단계 구분 철폐와 현행 판정 근거 공개 등 요구 서한을 청와대에 전달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 유성호

 
"비참하게 죽어간 우리 아들과 1403명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아내에 이어 40대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 조오섭(73)씨는 남은 피해자들을 도와달라며 흐느꼈고, 삭발하는 동안 눈물을 꾹 참았던 박수진씨도 같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끌어안고 통곡했다. '동병상련',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7일 오전 청와대 앞에서 만장을 들고 삭발식을 벌인 이유다.

1403번째 죽음에 삭발로 호소한 피해자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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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 "정부와 기업은 사과하라"가습기살균제피해자 가족인 박수진씨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피해자 전신질환 일정과 판정기준 대폭 완화, 피해단계 구분 철폐와 현행 판정 근거 공개 등을 요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 유성호

  

1403번째 죽음에 삭발로 호소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들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들이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판정기준 철폐와 가해기업 엄단 처벌 등을 요구하며 삭발식을 진행했다. ⓒ 유성호

 
지난 4월 25일 폐렴으로 숨진 고 조덕진(48)씨는 열흘이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병원 영안실에 있다. 유가족을 비롯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여의도 옥시 본사 앞에 시민분향소를 차리고 6일째 농성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날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가습기넷)는 피해자들의 요구와 바람이 담긴 손편지와 공개서한을 청와대에 전달하면서, 피해자 두 명의 머리카락도 함께 바쳤다.

이날 삭발한 박수진씨와 이재성씨 가족 모두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을 사용했던 피해자다. 박수진씨 자신은 면역질환을 앓고 있고 1999년생, 2003년생 두 아들도  2003년 가습기살균제로 인한 질환이 발병해 장해등급 심의를 받고 있다. 이재성씨도 면역질환 등 전신질환과 폐질환 4단계 판정을 받았고, 2006년생 아들도 폐질환 4단계와 천식으로 '특별구제계정' 지원을 받고 있다.

5월 3일 현재 가습기살균제 피해 신고자는 6389명에 이르지만, 정부에서 인정한 피해자는 800명 정도에 불과하다. 환경부는 피해자를 5단계로 나누고 3·4·5단계는 각각 '가능성 낮음', '가능성 없음', '판정불가'로 보고 피해 지원을 하지 않다가, 지난해 말부터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에서 낸 돈으로 '특별구제계정'을 만들어 병원비 등을 일부 지원하고 있다.

피해 신고자 가운데 사망자도 1403명에 이르지만, 고 조덕진씨를 포함한 상당수는 피해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숨졌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정부가 자신들을 두 번 죽인다며 억울해하는 이유다.

고 조덕진씨는 가족이 사용하는 가습기에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을 사용했다. 이 때문에 지난 2012년 간질성 폐렴으로 어머니가 숨졌다. 조씨 본인은 지난 2016년 폐섬유화 진단을 받았지만, 정부가 4단계로 판정해 피해 지원을 받지 못했다. 아내와 아들을 먼저 보낸 아버지 조오섭씨도 천식과 폐질환을 앓고 잃지만 4단계 판정을 받았다.(관련기사: 어머니에 이어 아들도... 옥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사망 http://omn.kr/1ixly)

"정부의 '가능성 없음' 딱지가 피해자 두 번 죽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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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한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피해단계 구분 철폐하라"가습기살균제피해자 가족인 이재성씨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피해자 전신질환 일정과 판정기준 대폭 완화, 피해단계 구분 철폐와 현행 판정 근거 공개 등을 요구하며 삭발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조오섭씨는 이날 기자들에게 "비참하게 죽어간 우리 아들과 1403명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조씨는 "아들은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병원 왔다갔다 하다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는데, 정부로부터 병원비는커녕 장례비도 받지 못하고 영안실에 혼자 드러누워 있다"면서 "피해자가 300여 명인 세월호 참사는 정부가 구상권까지 행사하는데 사망자가 4배나 많은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을 위해서는 왜 기업에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나"라고 따졌다.

조씨는 "아내는 가습기살균제 때문에 죽었는데 정부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4단계로 판정했다. 아들은 돈이 없어 장례도 못 치르고 있고, 나도 지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면서 "대통령은 끝까지 해결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켜 달라, 기가 막히고 분통이 터져 살 수가 없다"고 흐느꼈다.

두 아들을 위해 첫 삭발을 한 박수진씨도 "자식들이 아프다는 건 어느 엄마든 가만있을 수 없는 문제"라면서 "태어날 때부터 아팠다면 나만 죄책감을 갖고 살 텐데, 자연발생이 아닌 인위적인 질환을 갖게 돼 국가에 대한 믿음도 상실된 상황"이라고 밝혔다.

박씨는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떨어지는 순간에도 울음을 억눌렀다. 그러나 삭발을 마친 뒤엔, 앞에 있던 같은 처지의 피해자를 끌어안고 참았던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이어 삭발한 이재성씨도 "가족이 다 피해를 입었는데 '폐질환 4단계', '특별구제계정 인정' 등은 아무 소용이 없다. '(피해) 가능성 없음'이란 딱지는 우리를 두 번 죽게 한다"면서 "처음부터 협소한 판정 기준으로 불인정자를 양산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거의 인정 안 되고 있다"며 3, 4단계 피해자도 정부 공식 피해자로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사회를 맡은 장동엽 참여연대 선임간사는 "삭발식과 같은 자극적인 장면을 만들지 않으면 국민은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해결된 줄 안다"면서 "세월호 참사 유가족처럼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도 잊지 말고 기억해 달라"고 호소했다.

장 간사도 이날 "우리 시민단체가 정치권력과 대기업을 제대로 감시했다면, 시민들이 희생 당하는 일이 반복되지 않게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면 이런 피해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울먹였다.

장 간사는 "지금도 정부와 국가가 책임져야 할 일이 남아있다. 피해자들이 이렇게 머리를 깎으며 호소한다"며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이 담긴 공개서한과 손편지를 청와대에 전달했다.

가습기넷 피해자들은 이날 청와대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 피해자 전신질환 인정과 판정기준 대폭 완화 ▲ 피해단계 구분 철폐와 현행 판정 근거 공개 ▲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를 위한 TF(태스크포스)팀 구성 ▲ 한 달에 한 번 피해자를 위한 정례보고회 개최 등을 요구했다.

가습기넷은 "가습기살균제 참사 해결은 뒤늦게 살인기업 관계자들을 형사 처벌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처벌은 시작에 불과하다"면서 "배상액 상한 없는 징벌적 배상제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기업들의 탐욕을 견제할 재발 방지 대책 없이는 이같은 참사를 절대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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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안고 통곡하는 가습기살균제피해자가습기살균제피해자 가족인 박수진씨가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 앞 분수광장에서 피해자 전신질환 일정과 판정기준 대폭 완화, 피해단계 구분 철폐와 현행 판정 근거 공개 등을 요구하며 삭발하자, 동료 피해자가 박씨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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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인권 분야를 주로 맡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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