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밤마다 느꼈던 공포, 나는 몰랐다

[주장] 공포를 정상으로 여기는 '그 세상'이 문제다

등록 2019.05.12 19:53수정 2019.05.12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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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아빠가 이런 질문을 했다.

"페미니즘이 뭐니? 남자를 증오하는 거라고 하던데?"
"아, 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대고 말았다. 

일흔에 가까운 아빠도 알 만큼 페미니즘은 '흔한' 말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남성인 친구나 지인, 친척들도 '요즘 여자들' 이야기를 한다. 다행히 욕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하늘 같은 남자에게 어디 감히" "페미니즘은 들을 가치도 없는 얘기야"라는 식으로 말하는 이는 거의 없다. 대부분 쭈뼛대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근데, 넌 페미니즘 어떻게 생각해?"

남성에게 페미니즘은 '잘' 몰라도 되는 문제?
 

ⓒ pixabay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표명하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자들이 그럴 만도 하지, 우리 엄마 저렇게 좀 안 살았으면 좋겠어" "나도 페미니스트야, 결혼하면 아내랑 똑같이 집안일 할 거야" "나도 딸이 있는데 당연히 여자 편이지, 뉴스 볼 때마다 가슴이 덜컹한다니까"라고 맞장구를 친다.

그러다가 슬쩍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근데 좀 심한 거 같긴 해,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 "솔직히 어떤 면에서는 여자들이 더 살기 좋지 않니? 여성차별 없앤다고 해준 게 한두 개야?" "어쩌다 일어난 일 가지고 평범한 남자들을 몽땅 가해자로 만들면 안 되지"라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낸다.

정리하면 이렇다.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하지만 지금 여성들은 많이 흥분한 것 같다. 그들의 요구는 과하고 과격하다. 이런 식으로는 남성들과 갈등만 커지고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질 것이다. 너무 이기적으로 굴지 말고 서로를 존중하며 평화롭게 문제를 해결해 나가자."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애초에 별 관심도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태어나고 살아온 30대 남성으로 페미니즘 같은 건 '잘' 몰라도 되는 문제였다. 애써 모르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만 일상화된 이 공포가 기이하게 보였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주위를 살피며 종종걸음을 걷는 게 일상의 풍경이라니 수상하지 않은가. ⓒ sxc


페미니즘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다. 별일은 아니었다. 아내는 밤늦게 퇴근할 때면 내게 마중을 나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가급적 상가 화장실을 이용하지 않았다. 밤길과 상가 화장실을 꺼리는 여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그즈음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집 앞 골목은 '여성안심귀갓길'이 되었고 '귀가도우미'라고 불리는 두 명의 여성이 밤늦게까지 자리를 지켰다. 경찰은 상가 화장실을 정기적으로 순찰하기 시작했다. 적절한 대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여성에게만 일상화된 이 공포가 기이하게 보였다. 매일 밤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에서 주위를 살피며 종종걸음을 걷는 게 일상의 풍경이라니 수상하지 않은가. 남성인 나는 같은 상황에서 공포를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왜 여성만 두려울까? 그 두려움은 왜 당연해 보일까? 왜 여성은 피해자이고 남성은 가해자인가? 성폭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일상에서 이동과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면, 특히 여성만 그런 일을 당한다면, 이는 기본권 침해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안심귀갓길과 귀가도우미, 상가 화장실 순찰 같은 중요하고 필요한 정책들이 한편으로 눈가림 같아 보였다. 공포는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고 있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왜 과하고 과격하게 들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됐다. 그들의 목소리는 법을 지키는 문제를 넘어 기존의 세상 자체를 겨냥하고 있었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문제 삼은 적 없는 일상의 풍경, 이 세계의 상식선을 위협하고 있었다.

'세상을 바로잡자'는 게 아니다. 공포를 정상으로 여기는 '그 세상'이 문제라는 이야기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은 도처에서 '정상적으로' 벌어진다. 밤길과 상가 화장실뿐만이 아니다. 가정은 물론 일터, 길거리, 학교, 온라인 공간, 심지어 단체대화방에서... 언론에 보도되고 법적으로 처벌받는 일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아직 많은 것이 말해지지 않았다.
  

2016년 5월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여자라서 죽었다"고 외쳤다. '언제든 여자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공포를 또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환원시키는 남성들의 세상에 대한 항의였다 ⓒ 권우성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여자라서 죽었다"고 외쳤다. '언제든 여자는 그렇게 될 수 있다(남자는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공포를 또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환원시키는 남성들의 세상에 대한 항의였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지 말라'며 억울해 했다. 그들은 남자도 공포를 느끼고 때로는 살해당한다며 남성혐오를 멈추라고 했다. 혐오하지 말라는 말과 남성이 피해자인 사건도 있다는 팩트 아래서 여성이 당하는 차별과 폭력의 심각성은 은폐된다.

여성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남성들을 이해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던,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던, 마음껏 누리던 것에 대한 항의를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항의는 주체적인 '인간'이 되려는 여성들의 정당한 요구일 뿐이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과격하다'는 이들에게 말해 주고 싶다. 지금까지의 상식으로는 알아채기도, 판단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가까이 왔다. 언제까지고 기존의 세상에 머물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질문을 바꿔 보면 어떨까? 질문거리가 아니었던 것들에 질문을 던져 보면 어떨까? 어떤 질문을 하면 좋을지 주위에 있는 여성들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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