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고학력 여성의 마음을 흔든 구인 공고

[쓸고 닦으면 보이는 세상 ①] 예술하던 나, 미화원으로 취직하다

등록 2019.05.11 12:35수정 2019.07.17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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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미화원으로 취직이 되었을 때 나는 '합격'의 기쁨을 혼자서 조용히 삭여야 했다.
   
나이 오십이 넘은 여자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그동안 연극인이자 작가로 살아오면서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구직을 위한 스펙으로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었다. 오로지 열린 마음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만 충만했다.


하지만 구인구직사이트에 등록을 하고 나니 내 이력서를 보고 적극적으로 전화해 온 곳은 유일하게 기획 부동산 영업과 보험 영업 쪽이었다. 몇 번을 거절하고 나서 생각한 끝에 이력서를 고쳐 썼다.

순수한 노동 인력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학력은 고등학교까지만 써넣었고 녹즙 배달이나 창고정리 등 노동의 경험을 강조하여 자기소개서를 작성하였다. 주어진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해내면 그 대가로 정해진 급여를 받게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면접관의 질문 "화장실 청소도 할 수 있어요?" 
 

미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을 때, 반드시 붙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 최명숙

 
내가 사는 지역의 아트센터에서 미화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았을 때, 반드시 붙어야겠다는 강한 의지가 생겼다. 일의 성격과 근무시간 그리고 급여조건이 그 어떤 일자리보다도 훌륭했다. 면접을 보러 갈 때 외모로 인해 편견이 생기지 않도록 나의 마른 체형을 보완해줄 풍성한 옷을 입었고 최대한 씩씩하게 보이도록 화장과 머리 모양에도 신경을 썼다.

그런데도 나를 본 면접관들은 여러 가지를 우려했다. 건물 청소를 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해 본 적은 없지만 정말 잘 할 자신이 있으며 생긴 것과 달리 힘과 강단이 있고 무엇보다 일머리가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이사나 정리 등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를 특별히 부를 정도라고 설득했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못 가 그만두더라는 말에 나는 '청소'에 대한 나의 가치관을 피력했다. 청소란 환경을 위생적이고 깨끗하게 관리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귀한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보람을 느끼며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미화원으로 취직되었다고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현실은 나로 하여금 내 생각과 믿음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 최명숙

 
마지막으로 화장실 청소를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내 업무 범위에 화장실은 없기를 바랐던 마음 깊은 곳 어딘가를 얼핏 보았던 것도 같다. 하지만 청소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화장실을 두려워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임을 나의 이성은 알고 있었다.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물론입니다!"라는 씩씩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전화로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무엇보다도 내가 원했던 바대로 '주어진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해내면 그 대가로 정해진 급여를 받게 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데에 감사했다. 가까운 거리의 직장 위치, 아침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면 저녁시간을 자유롭게 쓴다는 점, 4대 보험 지원과 급여조건까지 모두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그 기쁨을 가족들과 나눌 수가 없었다. 특히 팔십 세가 넘은 어머니는 소위 일류대학에 대학원까지 나온 딸이 이제 와서 건물 청소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생판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아트센터에서 공연에 관계된 물품 정리와 무대 정리를 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너는 그 무대에서 공연을 해야 할 사람인데 그런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구나"라며 한숨을 쉬었다.

대학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딸에게도 괜한 부담을 줄까 봐 밝히고 싶지 않았고, 예술 한답시고 근근이 살아온 나를 늘 애처롭게 보는 언니에게도 선뜻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화원으로 취직되었다고 당당하게 밝힐 수 없는 현실은 나로 하여금 내 생각과 믿음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지금 나는 혹시 발전하지 못하고 후퇴한 나의 삶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닌가,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기를 멈춘 채, 내 고유의 능력이 발휘되지도 않는 일에 안주해버린 것은 아닌가, 성찰해보았다.

생계 활동과 예술 활동을 구분하기로 했다
 

냉정하게 평가해보건대 지난 2년 동안 마을교사로 '연극' 혹은 '뮤지컬'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예술'을 가르칠 기회는 없었다. ⓒ Pixabay

 
스스로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미화원이 되었지?' 대답은 간단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그렇다. 나는 하고 싶은 연극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해 언제나 따로 돈을 벌어야 했다. 다양한 일을 가리지 않고 했지만 주로 연극과 관련하여 대학생에서부터 초등학생까지 두루두루 가르쳤다. 사실은 올해도 혁신교육지구의 마을교사로 초, 중학생 대상의 연극 수업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하지 않기로 했다.

첫째, 나의 생계를 감당할 만큼 충분한 수업시수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당 임금은 미화원의 세 배 정도 되지만 일 년 수입의 총액으로 따지면, 재작년 기준으로는 미화원의 1/5이고, 작년 기준으로는 1/10에도 못 미친다. 과거에 지방대학에서 시간강사를 할 때도 한 달 수입은 많아야 80만 원이었다.

두 번째, 더 중요한 이유는 내가 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친다는 명목으로 막연히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평가해보건대 지난 2년 동안 마을교사로 '연극' 혹은 '뮤지컬'이라는 제목의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에게 '예술'을 가르칠 기회는 없었다.

예술은 크게 두 개의 줄기에서 시작된다. 하나는 실용적 목적 없는 순수한 유희적 본능이고, 또 하나는 삶과 이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성찰이다. 순수한 유희를 위해서는 무한한 여유와 자유가 필요하고 새로운 각도의 성찰을 위해서는 하나의 문제에 대해 제한 없는 깊이와 넓이의 사유를 허용하는 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연극 혹은 뮤지컬 수업은 그럴 듯하게 보일만한 공연을 아이들로 하여금 습득하게 만들어 무대 위에서 발표하도록 만드는 천박한 목적을 달성하기에 바쁘다.

그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걸음을 잠시 멈출 여유는 없으며, 자신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다른 이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도 없다. 학교에서는 연극이나 뮤지컬 수업을 통해 자신감, 발표력, 표현력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능력들은 예술의 본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게다가 그런 능력을 키우고자 하는 목적이 예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래서 나는 이제 생계를 위한 활동에 어설프게 예술이라는 명목을 붙이지 않기로 했다. 생계 활동과 예술 활동을 구분하기로 했다. 하지만 돈 벌기 위한 일에서도 보람과 의미를 찾고 싶었다. 면접관 앞에서 자신 있게 말했듯이 청소에 대한 나의 가치관, 즉 '환경을 위생적이고 깨끗하게 관리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귀한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맡은 자리에서 그 정도의 양심은 지키고 그 정도의 보람은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 2회 청결의 이중성으로 이어집니다.
#미화원 #청소원 #예술가의 생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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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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