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잡는 건 늘 아저씨"... '남초' 정치 바꾸는 여성들

[원 밖의 여자들 ③] 페미당 창당모임 활동가들

등록 2019.05.11 11:10수정 2019.05.20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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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정치판이나 국회라는 '원' 안에서 벗어나, 치열하게 활동하는 여성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원 밖의 여자들'은 개성있는 여성 정치인이나 활동가 등을 조명합니다. 단순히 주류 정치판 밖에 있는 이들이 아니라, 새로운 목소리를 내며 그 '원'에 사소한 균열을 만들어가는 이들을 소개합니다.[편집자말]
"내 욕실에 여자가 하나 들어왔는데, 목욕 스펀지 말고는 나 자신을 가릴 게 아무 것도 없는 기분이었다."

윈스턴 처칠이 영국 최초로 하원에 입성한 여성 의원, 낸시 애스터가 등장했던 때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그녀가 '남성 의원들이 말을 걸지 않는다'는 불만을 터트리자, 처칠은 이런 적나라한 고백까지 덧붙였다고 한다. '우리는 당신(낸시 애스터)을 몰아내고 싶었다'. 

의회를 장악한 남성 정치인들에게 갑작스레 등장한 여성 정치인은 '우리들만의 리그'를 망치는 침입자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낸시 애스터에게 투명한 적개심을 드러낸 것이다(책 <민주주의는 여성에게 실패했는가> 참고).

시간이 흘러 2019년, 그 '남탕'의 사정은 좀 나아졌을까. 멀리 영국까지 갈 것도 없다. 한국의 전체 국회의원 300명 중 여성은 51명에 불과하다(17%). 세계 평균(24.3%)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페미당 창당모임' 등이 지난 3월 7일 세계여성의날을 하루 앞두고 국회 앞에서 "51명을 51%로 바꿔야 한다"고 외친 이유다. 

페미당 창당모임(아래 페미당 모임)은 '아시아 최초 페미니스트 정당 창당'을 목표로 이제 막 첫 발을 내디뎠다. 페미당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다섯 명의 여성 활동가들(이가현, 이혜민, 최여진, 채은, 토끼)을 지난 8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왜 페미니스트 정당이 필요한가', 때론 조롱이나 의심의 눈초리를 마주하며 들었을 질문을 다시 던졌다.   

이들이 진보 정당을 뛰쳐나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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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당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다섯 명의 여성 활동가들(왼쪽부터 이가현, 이혜민, 최여진, 채은, 토끼)을 지난 8일 오전 서울 광화문에서 만났다. 토끼(활동명)는 20대 여성을 다룬 <시사인> 기사를 들었다. ⓒ 김예지

"여성 정치를 꿈꿨던 사람들이 타협하지 않고 같이 권력의 길을 뚫어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존 정치판이 너무 남성 중심적이다 보니 여성으로 살아남으려면 타협하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 난관에 부딪히지 않으려면 같은 생각을 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야 했다." (이가현)

이가현과 토끼(활동명), 최여진은 진보정당에서 활동했다. 현재는 모두 탈당한 상태다. 이들은 성평등을 말하는 진보정당에서조차 내부적으로 한계에 부딪혔다고 말했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이후 2~3년간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를 거치면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정당 안에서도 이런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요구가 많아졌지만 여성 정책은 늘 '후순위'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또, 겉으로는 성평등을 주요 가치로 내걸지만 정작 여성 청년을 동등한 정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존재했다. 

"아무리 공동대표를 여성, 남성으로 구성한다고 해도 모이면 마이크를 잡고 있는 건 늘 40~50대 아저씨들이다. 진보정당 안에서도 여성들의 발언권이 많지 않다." (최여진)

"여성 청년이 정치한다고 하면 불편해 하거나 '아이고 잘하네'라는 식으로 기특해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동료는 될 수 없고, 대상화만 됐다." (토끼)

한편, 이혜민과 채은(활동명)은 지역과 학교 등을 기반으로 한 여성주의 소모임에 참여하며 "남성의 문제는 사회 문제가 되는데 여성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동시에, 기존 정치에 대한 물음표도 커졌다.

예를 들어, 미투 관련 법안은 2018년 한 해에만 50개 이상 쏟아졌지만 정작 통과된 건 손에 꼽힐 정도다. 이슈가 된다 싶으면 날림으로 법안을 발의하고, 이후 방치하는 일이 반복됐다. 뿐만 아니라 최근 선거법·공수처법 패스스트랙 처리를 두고 벌어진 정쟁이나, 틈만 나면 여성 정치인의 외모나 결혼 여부를 운운하며 '동료'로 여기지 않는 남성 중심적인 국회 문화도 이들의 실망감을 높였다. 

"만약 남성들이 혜화역 같은 집회를 열었다면 벌써 법안이 몇십 개쯤 통과됐을 거다. 기존 정당과 정치에 대한 불신이 컸다. 저만의 감정이 아니라고 본다. 주위에 많은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불신하지 않는, 믿을 만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혜민)

"정부 등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 여성 개개인들이 목소리를 내는데, 외면당한다는 느낌이었다. 다른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채은)

한국은 왜 스웨덴처럼 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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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서울 광화문에서 페미당 창당모임 활동가들을 만났다. ⓒ 김예지

합류한 시기는 제각각이지만, 이들이 '페미당 창당'이라는 구체적인 목표를 잡고 활동하게 된 건 지난 2018년부터다. 이가현이 2017년 페미니스트 캠프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2018년 지방선거에서 페미니스트 정치를 내걸고 출마해 보자'고 뭉친 게 시작이었다. 선거 제도에 대해 공부할수록, '기존 정당에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기존 정치판은 돈 많고 지역에서 입지가 있는 사람이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아서 출마 하는 시스템이다. 여성들이 등장하기조차 어려운 환경이다. 성별 임금 격차 등으로 인해 돈도 없을뿐더러, 가족들이 여성의 정치 참여 자체를 반기지 않는다.

또, 정당은 여성을 공천하지 않고, 만약 한다고 해도 불리한 지역구에 배정한다. 아니면 재선율이 낮은 비례대표 후보로 공천한다. 그나마 있는 비례대표 성비 규정도 지난 총선에서 안 지켜졌다*. 자기들 입맛대로다." (이가현)

(*지난 2016년 총선 때 더불어민주당은 '비례대표 후보 홀수 순번은 여성에게 배정해야 한다'는 공직선거법 규정을 어기고 15번에 남성인 이수혁을 배정했다. 당시 민주당의 정당 지지율을 따져봤을 때, 15번까지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할 가능성이 크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선거법을 어기면서까지 남성 후보를 앞순번으로 올렸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자주)


결국, '새로운 페미니스트 정당 창당'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들은 알음알음 동료를 모았다. 실제 이들만 새로운 정치에 대한 목마름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지난 2018년 4월, 페미당 모임은 약 한 달간 여성 정치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묻는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전체 응답자 1253명 중 94.7%(1154명)가 '페미니즘 정치 실현을 위해 페미니스트 정당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물론, 현실 정치는 심정적 지지자들만 모인다고 해서 가능하지 않다. 한국에서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선 먼저 200명의 발기인을 모아야 한다. 페미당 발기인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약 380여 명. 창당 자체에 동의한 이들은 500명 정도 된다는 게 모임 측의 설명이다.

창당까지 가기 위해선 앞으로 5개의 시·도당을 만들고, 각각 법정 당원 수 1000명 이상을 모아야 한다. 즉, 최소 5000명 이상의 당원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기존 정치판이 만들어놓은 높은 문턱이다.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등 유럽에는 페미니즘을 기치로 내건 정당이 이미 존재하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건 신생 정당의 탄생을 어렵게 만들어놓은 제도 탓도 있다. 

"스웨덴에서 페미니즘 정당 'Fi'를 만들 땐 300명의 발기인과 1000명의 서명만 있으면 됐다. 당원까지 필요하진 않았다. (정치 진입) 문턱 자체가 낮아서 다양성이 보장되는 구조인 거다. 이런 시스템을 만들지 않는 이상, 신생 정당을 만드려는 이들은 고통스럽고 기나긴 시간을 거칠 수 밖에 없다. 힘없는 사람들은 계속 정치에서 소외되고 만다." (이가현) 

"현재 국회 구성은 고학력·남성·서울·전문직·50대로 요약할 수 있다. 세대나 계급 문제에서도 보수적이고, 더 이상 권력을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국회에 있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들이 진출하는 게) 더 힘들지 않나 생각한다." (채은)

시작하자마자 벽을 마주했지만, 일단 2020년 세계 여성의 날인 3월 8일에 맞춰 페미당을 공식 출범시키는 게 이들의 목표다. 이에 맞춰 올 10월쯤 창립준비위원회를 등록할 생각이다. 현재는 창당준비위원회 결성을 앞두고 사전 준비를 맡는 '창당주비위원회'(創黨籌備委員會)를 모집하고 있다.

페미당 모임은 '여성 정치 캠프'를 주최하거나 지역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과 적극적으로 접촉해 예비 당원을 늘려나갈 생각이다. 한편으론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 소속 페미니스트 당원들과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며 여성 정치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있다. 

'누구만 챙긴다'는 배제의 정치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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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은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지난 8일 서울 광화문에서 페미당 창당모임 활동가들을 만났다. ⓒ 김예지

그렇다면 이들이 페미당을 통해 구현하고 싶은 정치는 무엇일까. '국회에 진출한다면 가장 이루고 싶은 것'을 묻자, 이들은 "국회 성비부터 고치고 싶다"고 입모아 말했다. 

"이런 얘기를 하면 '평등이 아니라, 우월해지겠다는 거잖아'란 댓글이 달린다.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은 뭐냐고, 다 남성 우월주의 아니냐고." (이가현)

물론 여성 정치인이 수적으로 늘어나는 것이 곧 여성 정치의 '완성'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들은 불균형한 정치 지형 자체가 낳는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에, 우선 '83 대 17'이라는 기형적 성비부터 손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울어진 국회 안에서 여성 의원들은 제힘을 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떨 땐 살아남기 위해 기존 권력의 구태를 답습한다. 또, 일부 여성 정치인의 실패나 흠결이 전체 여성들의 문제로 일반화되는 것도 문제다.  

"('이래서 여성 대통령은 안 된다'는 식으로 따진다면) 이승만 이후로는 남자 대통령은 나와선 안 된다." (토끼)

다섯 명의 활동가들은 이어 선거공영제 강화, 시민결합법 제정, 남성의 육아 참여 의무화, 동일노동 동일임금 실현, 스쿨미투 해결 법안 등에 대한 구상을 늘어놨다. 이들의 관심사는 정치 개혁, 노동, 교육, 가족구성권과 양육 패러다임의 변화 등 전방위에 걸쳐져 있었다.

성평등 이슈를 첫 번째 의제로 다루면서, 지금껏 당연하게 여겨져왔던 불균형한 정치 지형을 바꾸고, 새로운 정치 주체를 더 많이 출현시키는 것이 페미당 모임의 궁극적인 바람이다. 이들은 '배제의 정치'가 아닌 '확장의 정치'를 꿈꾼다. 

"개인적으로 성비를 맞추는 할당제 뿐만 아니라 장애인, 청소년, 인종, 지역 등 여러 집단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는 할당제가 실현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국회는 다양성이 없다. 획일화 돼 있다." (채은)

"가끔 페미당이 성소수자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이 정당에 가입하기 두렵다, 혹시 성소수자 배제하는 곳이냐'고 걱정하는 거다. 일각에서 '여성만을 챙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사회 전반의 여성혐오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것은 공감한다. 왜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성소수자 등을 배제하는 것은 정당 입장에서 동의할 수 없다. 내가 퀴어이기 때문에, 곧 나를 배제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토끼)

"'페미니즘을 표방하는 정당이 왜 다른 인권도 챙기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챙긴다'라는 표현은 보편 인권 개념과 맞지 않다. 다른 분들이 동의해줄지 모르겠지만, 인권 하나 챙긴다는 건 불가능하다. 보편 인권의 개념이 있기에 여성 인권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혜민)
#페미당 #페미당 창당모임 #페미니즘 정당 #페미니스트 정당 #여성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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