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의 속살이 펼쳐지는 길, 어찌 안 걷고 배기요

[남해 바래길②] 가천다랭이마을에서 앵강다숲길까지 걷다

등록 2019.05.20 15:46수정 2019.05.20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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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남해 어머니들이 바래(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해초나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하러 가던 길을 걷는다. 바래길은 남해 어머니들의 애환과 정이 담겨 있다. 어머니 품처럼 아늑하다.

가천다랭이마을은 남해의 걸작


1024번 지방도의 끝, 가천다랭이마을의 정겨운 풍경이 눈으로 들어온다. 밭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수만 번의 손길로 만든 '남해의 걸작'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산비탈에 계단 모양으로 층층이 들어선 다랭이논. 이곳은 국가 명승을 넘어 미국 뉴스전문채널 CNN에서 '한국에서 가봐야할 아름다운 50곳' 중 하나로 선정됐다. 
 

가천다랭이마을 산비탈에 계단 모양으로 층층이 들어선 것이 다랭이논. 이곳은 국가 명승을 너머 미국 뉴스전문채널 CNN에서 ‘한국에서 가봐야할 아름다운 50곳’ 중 하나로 선정됐다. ⓒ 최정선

 
가파른 산비탈을 깎아 만든 다랭이 논에서 마늘이 바람에 흔들린다. 봄에 심은 유채의 노란빛이 마늘의 청록빛으로 탈바꿈했다. 마늘은 쑥쑥 자라 벌써 수확을 앞두고 있다.

외딴 시골 마을을 '깡촌'이라 일컫는다. 가천다랭이마을이 그런 곳이 아닐까. 고립무원의 작은 어촌은 코발트 빛 바다를 품고 빛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남면 해안도로. 이 도로는 평산항을 시작으로 사촌해변, 가천다랭이마을, 앵강만 등 남해의 속살이 펼쳐지는 길이다. 특히 가천다랭이마을이 압권이다.

가천다랭이마을은 경사가 대략 45도. 이곳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척박한 산비탈을 깎아 논을 만들었다. 논이 얼마나 작은지 '삿갓배미'라는 이름도 있다. 이는 '삿갓 아래 쏙 들어갈 정도로 작은 논'이란 뜻이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설흘산(해발 488m)의 날 선 모습이 아찔해 보인다. 꼭 그대로 바다로 내리꽂을 것 같다. 설흘산에서 내려다보면 깊숙하게 들어온 앵강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앵강만에는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있다. 앵강(鶯江)은 '구슬픈 파도 소리가 꾀꼬리의 노래와 같고 그 눈물이 강을 이뤘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물론 정설은 아니다. 하지만 인근 지명에 꾀꼬리의 순우리말 '곳고리'가 있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을 듯. 
  

남해가천암수바위 마을 주민들은 ‘미륵불’로 여겨 각각 ‘암미륵’, ‘숫미륵’이라 부른다. 암미륵은 여인이 잉태해 만삭이 된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 최정선

 
아랫마을로 내려서면 '남해가천암수바위'가 반긴다. 마을 주민들은 '미륵불'로 여겨 각각 '암미륵', '숫미륵'이라 부른다. 아이를 갖지 못한 여인들이 아무도 모르게 숫미륵 밑에서 기도를 드리면 득남한다는 속설도 있다.


마을의 샤머니즘이 집결된 느낌이다. 암미륵은 여인이 잉태해 만삭이 된 모습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암수 바위는 투박하지만, 정감 있고 신비스럽다. 암수바위를 지나자 끝자락 정자까지 여유로운 발걸음을 잇는다. 각종 허브가 꽃을 터트려 향이 그윽하다.

앵강다숲을 걷다
 

가천다랭이마을 바다정자 남해 바래길 중 앵강다숲길이 시작되는 구간이다. ⓒ 최정선

 
우리는 가천다랭이마을에서 앵강다숲길을 걷고자 계획했다. 앵강다숲길은 다랭이마을의 바다장자에서 시작해 홍현해라우지마을과 숙호숲~두곡·월포해수욕장~미국마을~화계마을~바래길탐방안내센터~원천마을~벽련마을을 잇는 18㎞ 구간이다. 우리는 앵강다숲길 전 구간을 걷지 않고 바래길탐방안내센터까지 최종 목적지로 정했다. 앵강다숲, 참 예쁜 이름이다. 이 지명은 앵강만에 가까이 있어 따온 이름이다.
 

앵강다숲길에서 만난 벤치 짙은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벗어나면 넓은 초원에 쉬어가라고 벤치 있다. ⓒ 최정선

 
바다정자를 통과하자, 아찔한 해안 길이 여럿. 이 길은 이내 포근한 흙길로 안내한다. 해안선을 따라 걷는 길이 가볍다. 짙은 녹음이 우거진 숲길을 벗어나면 넓은 초원에 쉬어가라고 벤치가 마련돼 있다.

숲길 중간쯤, 옛 초소를 만났다. 숲과 어우러져 괴기스럽기까지 했다. 길은 제법 운치 있다. 20여 년 전 전투경찰대원들이 근무했던 곳으로, 당시 대원들이 초소와 초소를 이동했던 통행로가 바로 지금 우리들이 걷는 길이다.

간간이 바다 풍경도 볼 수 있어 좋았다. 해안과 숲을 몇 차례 바꿔가며 걷고 또 걸었다. 뜨거운 태양이 아스라하게 빛을 반사한다. 알베르트 카뮈 작품 <이방인>의 뫼르소가 된 착각이 들었다. 아랍인을 총으로 쏜 게 '강렬한 태양 빛' 탓이라 하듯. 잠시 멈춰 숲 한가운데서 잠깐 호젓하게 소설의 상념에 젖었다.
  

홍현 해라우지 마을을 방풍림 다랭이마을에서 홍현 해라우지 마을까지의 3.5㎞ 구간은 약간 난코스로, 천연 방풍림 숙호숲이 만들어 준 시원한 그늘을 한숨 돌리게 한다. ⓒ 최정선

 
녹음이 짙은 화려한 계절이 느껴진다. 홍현해라우지 마을을 방풍림에서 잠깐 땀을 닦았다. 홍현(虹峴)은 '무지개 고개'가 있어 붙여진 지명으로 '해라우지'는 홍현의 남해 토속어다.

다랭이마을에서 홍현해라우지 마을까지의 3.5㎞ 구간은 조금 어려운 난코스로 다들 지친 상태다. 천연 방풍림인 숙호숲이 만들어 준 시원한 그늘을 한숨 돌렸다. 나그네들의 안식처 같았다.
 

해라우지마을의 석방렴 바다 일부를 돌담으로 막아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 최정선

   
이곳 바다에 돌로 둥글게 축성한 조형물을 있다. 바로 석방렴(石防簾)이다. 창선교 옆 지족해협에서 죽방렴은 몇 번 봤지만, 석방렴은 처음이다. 석방렴을 봤을 때 어리석게도 어린아이들이 해수욕할 수 있도록 만든 자연 풀장인 줄 알았다.
  

도로에서 본 석방렴 200년 전 남해도 남쪽 앵강만에서 만든 돌담은 만조 시 물에 잠기고 간조 시 드러나는 전통 고기잡이 방식인 석방렴이다. ⓒ 최정선

 
축방렴은 좁은 바다 길목에 대나무 발을 세워 물고기를 잡는 방식으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기록이 남아있다. 이와 쌍벽을 이루는 남해의 물고기잡이 방식이 석방렴이다. 바다 일부를 돌담으로 막아 고기를 잡는 방식이다. 200년 전 남해의 남쪽 앵강만에서 성행한 바닷속 돌담은 만조 시 물에 잠기고, 간조 시 드러나는 어업방식이다.
  

두곡 월포 해수욕장 두곡의 몽돌은 파도를 따라 몽돌이 자갈자갈 소리를 낸다. ⓒ 최정선

 
모래가 고운 월포 해수욕장을 지나 몽돌이 자갈자갈 소리를 내는 두곡해수욕장으로 들어선다. 가는 길마다 만나는 마을은 작은 포구를 품고 있다. 파도 부딪히는 소리가 감미롭다. 모든 세상이 푸른 빛 그 자체, 그리고 평온이 깃들어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평온하게 잠든 듯했고 우리는 그 고요를 깨웠다.

숨 가쁘게 걸어온 여정을 미국마을을 지나 바래길탐방안내센터에서 마무리했다. 걷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과의 싸움이다. 포기하지 않고 종착점에 도착했다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바래길탐방안내센터의 인공연못 노오란 창포가 꽃핀 연못에서 거위들이 한가롭게 헤엄치는 모습을 끝으로 남해바래길을 마무리했다. ⓒ 최정선

  
<여행 귀띔>
*남해바래길 트레킹
-앵강다숲길: 가천다랭이마을 바다정자~선바위~바람부는 비릉~홍현해라우지마을~숙호숲~월포·두곡 해수욕장~미국마을~바래길탐방안내센터

*가는 법
· 버스
남해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남해공용터미널까지 약 66m 이동한다. 남해공용터미널에서 남해-가천(서상.장항.남면.평산.항촌) 행 버스 탑승해 가천다랭이마을에 하차하면 된다.

· 버스 운행시간
남해공용터미널에서 첫차 07:45, 막차 13:35이다. 배차간격은 평일 2회, 토요일 2회, 일요일 2회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생각없이 경주> 저자입니다. 블로그 '3초일상의 나찾기'( https://blog.naver.com/bangel94 )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남해 #바래길 #여행 #가천다랭이마을 #앵강다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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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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