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수' 지목된 두 시민군의 증언 "통합병원 시신 정말 이상했다"

[오월ing ②-2] '광수 36호'와 '184번' 양기남·곽희성씨 "내가 북한군? 지만원 황당"

등록 2019.05.15 22:17수정 2019.05.1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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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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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자유공원 둘러보는 곽희성, 양기남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활동한 곽희성, 양기남씨가 9일 광주광역시 5.18자유공원에 재연된 5.18당시 시민들을 가두고 고문한 영창을 둘러보고 있다. ⓒ 권우성

 
"그들의 증언은 39년간 어둠 속에서 살았던 우리에게 내려진 한 줄기 빛이다. 이제 진실이 모두 드러나길 바란다." - 양기남 (59, 당시 시민군)

39년 전에는 '폭도'로 불렸다. 1980년의 핏빛 5월, 열흘간의 항쟁에 참여했던 두 시민군 양기남씨와 곽희성(59)씨. 그들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는 증언이란, 5·18 당시 광주에서 미군 정보요원과 보안부대 수사관으로 각각 활동했던 김용장·허장환씨의 최근 증언을 말한다. 김씨는 당시 전두환이 광주를 방문했고, 목적이 사살명령을 내리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39년간 실추된 두 시민군의 삶은 아직도 제자리다. 그들을 아직도 '북한군'이라 지목하는 사람이 있는 탓이다. 이른바 '광수(광주에 침투한 북한 특수군 부대원)'.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극우인사 지만원씨가 그들에게 붙인 이름이다.

지난 10일, 그들을 만나러 광주로 갔다. 광주 5.18 자유공원 앞에 마련된 천막 안에서 두 '광수'와 마주했다. 먼저 '광수'라는 이름이 붙은 옛 흑백사진을 그들 앞에 꺼냈다. '광수 36호'로 지목된 양씨가 입을 열었다.

"3~4년 전, 5.18 기념재단에서 책을 들고 찾아왔다. 내가 광수로 지목돼있다고. 그걸 보는데, 그냥 미친 사람들 아닌가 하는 생각만 들더라. 시민군이었던 나를 북한군이라고 하는 거다. 최룡해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라고. 그럼 내가 북한 가서 2인자로 살았지 여기서 왜 이러고 살겠나."

폭도에서 북한군으로... 여전한 왜곡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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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한 양기남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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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한 곽희성씨. ⓒ 권우성

 
- 사진은 언제 찍힌 건가?
"시민군으로 활동했을 때다. 두 사진 모두 22~23일 중 찍혔을 거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사진이 있다. 본래 얼굴을 가리는 용도였는데, 계엄군이 물러간 뒤엔 머리에 둘렀다."

'184번 광수'로 지목된 곽희성(59)씨도 황당해하기는 마찬가지다. 80년 5월 당시 독일 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가 찍은 그의 사진은 권춘학 북한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으로 날조됐다. 덤덤히 인터넷에 오른 자신의 사진을 보던 곽씨는 "이 사진은 당시 YWCA 옥상에서 찍힌 사진"이라며 시민군으로 활동하던 때를 회상했다.


"옥상에서 캘빈소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독일 기자가 광주 시내 전경을 찍겠다고 옥상에 올라왔다. 그때 찍힌 사진이다. 도청에서 나오는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모습이다."

천막 안은 어느새 80년 5월의 광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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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활동한 곽희성, 양기남씨가 9일 광주광역시 5.18자유공원앞에서 오마이뉴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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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 1980년 5월 2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이 도로에 세워져 있다. ⓒ 연합뉴스


- 어떻게 시민군으로 활동하게 됐나.
곽희성(아래 곽) : "우리 둘은 원래 알고 지냈던 사이었다. 19일 오전에도 둘이 같이 있었는데, 상무대 앞 도로 쪽에서 탱크 소리가 들렸다. 엄청나게 많이 올라오고 있었다.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탱크가 지나가는 걸 볼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전쟁도 아니고... 그렇게 계속 따라가다가 통합병원 앞에 탱크가 줄줄이 서있는 걸 보게 됐다."

양기남(아래 양) : "그날 계엄군하고 테이블 하나 거리 정도만 두고 마주할 정도였다. 그때 우리가 본 계엄군들의 얼굴은 시뻘건 상태였다. 눈알도 한껏 충혈돼 있었다. 이상했다."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던 80년 5월 18일, 광주 전역에 신군부의 병력이 배치됐다. 군인들은 학생, 시민을 가리지 않고 잡아들였다. 진압봉을 휘두르고 대검으로 찔렀다.

탱크, 군용기 등 본격적인 병력이 광주로 들어온 것은 다음날(19일)이었다. 오후 4시 30분, 광주고 앞길에서 김영찬(19세·조대부고 3년)이 대퇴부 등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계엄군의 총에 맞은 첫 사망자였다. 20일 새벽에는 얼굴이 짓이겨진 두 번째 희생자 김안부(일용노동자)가 발견된다. 20일, 다시 금남로를 찾은 두 청년은 계엄군에 의해 쓰러진 채 리어카에 실려 온 시신 2구를 목격한다.

양 :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왔던 게 21일이다. 아직도 생생하다. 오후 1시, 전남도청 옥상에서 느닷없이 애국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뒤이어 총성이 막 쏟아졌다. 도청 앞 집단 발포다. 시위대 내부 분위기도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도 대항해야 한다고, 총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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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열린 민주성회에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21일, 금남로는 피로 흥건해졌다. 그날의 사망자 62명 가운데 총상 사망자만 53명이었다. 이때 시위대 내에서도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조를 편성해 시외로 빠져나가게 된다. 외곽에서 각종 무기들을 챙긴 이들은 그날 저녁, 광주로 돌아온다. 광주는 이들을 시민군이라 불렀다.

곽 : "나는 (무기를 가지러) 화순 방향으로 올라갔다. 경찰 초소가 있어서 들어갔는데 어째 경찰들이 하나도 없었다. 보니까 총은 또 있었고. 실탄이 없어서 찾아보는데, 무기고가 곧장 보이더라. 그래서 그걸 부수고 그 안에 든 실탄을 챙겼다. 그렇게 다시 광주로 올라왔다."

- 다른 경찰 초소에도 사람이 없었나?
양 : "다른 곳도 거의 같았을 거다. 그러니 그 빠른 시간에 무장을 할 수 있었지. 국회 청문회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우리가 광주를 빠져나가는 날(21일 오후) 계엄군들이 이미 광주 외곽을 다 에워싸고 있었다더라. 결국 우리가 외곽으로 나가서 무기를 가져올 수 있도록 유도한 거다. 무장을 한 시민들이 폭도로 보이도록. 보통 전시상황이면 경찰서나 군대 내 무기고를 싹 걷어가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 하지만 당시엔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나. 지키고 있는 사람 하나 없이."

그가 언급한 청문회란, 1988년에 열린 '광주 청문회'다. 이 청문회를 계기로 광주의 참상이 전국으로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증인으로 출석한 자들은 변명 및 모르쇠로 일관했다.

24시간 보일러 가동한 통합병원... "들어간 시신은 있었지만..."

어느덧 인터뷰를 시작한 지 한 시간이 넘었다. 인터뷰 장소였던 천막 내부의 온도는 더욱 올라갔다. 더위에 팔을 걷어 올리던 양씨는 불현듯 "보통 5월이면 난방이 필요 없지 않나, 지금도 이렇게 더운데"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5월도 비슷했다, 그런데 국군통합병원(아래 통합병원)의 보일러는 24시간 돌아갔다"며 말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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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활동한 양기남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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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적십자병원 시체 안치실의 모습. 1980.5.28 ⓒ 연합뉴스

 
"27일,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이후 조사 과정에서 연일 온몸을 두들겨 맞다가 뼈가 부러져서 70일 간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때 병원 위생병이랑 가깝게 지냈는데, 그가 병원 보일러실이 5월 내내 24시간 가동됐다고 했다. 내가 시민군 활동했을 때 이상했던 것도 이거였다. 당시 계엄군 퇴각 전까지 나온 시신들이 통합병원으로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온 시신은 보지 못했다.

81년도에 '암매장 진상본부' 활동을 했다. 행방불명 된 사람들 찾으려고. 그때 망월동 묘역으로 제보 들어온 곳에 가 보니까 뼈가 죄다 시커멓더라. 뼈가 그렇게 까매질 수가 없다. 아무리 오래돼도 누렇게 바래지는 게 전부니까. 통합병원 보일러에서 시신이 소각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다른 증거도 있나.
"병원 근방을 탐문 조사 했을 때였다. 보통 5월이 되면 장독을 연다. 독 안에 볕을 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주변지역 사람들이 80년 5월에는 장독을 아예 못 열었다 하더라. 재가 너무 많이 날려서."

지난 13일, 김용장 전 미군군사정보관이 특별기자회견에서 증언한 내용도 양씨의 것과 같았다. 김 정보관은 희생자 시신 소각과 관련해 "가매장한 시신 일부는 광주통합병원에서 소각했고, 일부는 최근 보도를 보면 김해 공항으로 수송됐다고 한다"며 "왜 김해로 갔겠는가, 틀림없이 거기서 수장됐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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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희생자 시신 소각 장소 찾은 김용장씨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군 병원 보일러실에서 소각했다는 증언이 나온 가운데 15일 오전 광주 서구 옛 국군통합병원에서 당시 미 육군 501정보단 소속 정보요원 김용장씨가 소각 장소를 보여주고 있다. ⓒ 연합뉴스

 
시민군도 무장했지만... "차마 사람을 쏠 수 없었다"

22일부터 26일까지, 광주는 서서히 질서를 찾아갔다. 학생, 교사, 정치인 등 20명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가 계엄사 측과 협상을 진행했다. 하지만 27일, 계엄군의 상무충정작전(광주재진입작전)에 의해 도청의 시민군은 최후의 항전을 벌이게 된다. 양씨는 시민군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27일 자정이었다. 광주시내 순찰을 도는데 뭐가 반짝거렸다. 이미 계엄군들이 전남도청 주변을 다 포위하고 있었던 거다. 오전 4시경, 계엄군들이 총을 쏘며 도청으로 진입했다. 그때 대다수 시민군들은 계엄군에게 사격을 가하지 못했다."

- 총으로 무장을 했는데도 쏘지 못한 건가?
"방어차원에서 위협사격만 했다. 우리도 계엄군을 죽이려 했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수류탄 1~2개씩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마 사람이 사람을 쏴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날 우리는 계엄군을 향해서 수류탄을 던지지도 않았고 조준사격도 하지 않았다."

양씨는 이날 오전 5시 10분 계엄군에게 체포돼 상무대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징역 7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80년 12월 28일 '다시는 이런 일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는 조건으로 석방됐다. 양씨는 이날의 후유증으로 한동안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5월만 되면 그때 일들이 생각나서 가슴이 답답해진다. 트라우마다. 그런데도 우리에 대한 왜곡이 엄청 심하지 않나. 그런 걸 보면 속이 썩어든다. 우리가 세금 먹는 괴물 단체다, 뭐다 그렇게 얘기하는데... 당시 생존자들 가운데 대다수가 빈민층이다. 구청에 신청해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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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1980.5.27 ⓒ 연합뉴스

 
죄인처럼 과거를 숨긴 채 살아온 생존자들

그 27일, 곽씨는 양씨와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곽씨는 그날 계엄군의 눈을 피해 간신히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일상도 일그러지기는 마찬가지였다.

- 27일에 집으로 돌아간 이유가 있나.
"26일까지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했다. 도청에 쌓인 무기들을 회수하는 역할이었다. 그날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 도로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여자를 봤다. 맨발에 월남치마를 입고 있던 여자. 가까워져서야 알았다. 우리 어머니였다. 내가 죽은 줄 알고 영안실만 계속 찾아다니셨다고 했다. 줄곧 그 수많은 시신들 속을 찾아 헤매셨던 거다. 그 모습을 보고 하루 내내 고민 하다가, 다른 이들에게 말을 꺼냈다. 집으로 가겠다고."

- 당시 주변인들의 반응은 어땠나.
"조심히 가라고만 하지. 꼭 살아서 가라고... 그때 계엄군의 눈을 피해 근 이틀에 걸쳐서 집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다. 가족, 친구들 모두 나한테 숨어있으라고만 했다. 취업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두려움이 생긴 거다. 혹여 잡혀가지는 않을까, 내 가족에게 불똥 튀지는 않을까 싶어서."

- 시민군이었다는 건 언제 밝혔나.
"아내에게도 오랫동안 말하지 못 했다. 아이 둘 낳을 때까지도 말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영세민 아파트에 살기 전까지는 그랬다. 우리 네 가족 형편이 너무 안 좋아서 그곳으로 들어갔던 건데, 도저히 못 살겠더라. 너무 열악했다. 그때서야 둘러대듯 얘기를 꺼냈다. 내가 광주항쟁 관련자니까 보상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 양씨를 다시 만난 건 언제인가?
"그 영세민 아파트에서 만났다. 정말 놀랐다. 항쟁 당시에도, 그 후에도 그렇게 다들 힘들게 살아왔던 거다."

곽씨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천막 입구 쪽을 향했다. 짧은 정적 후,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이런 말하는 게 정말 힘들다. 당시 계엄군들의 총질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거, 그때 느꼈던 공포감 같은 기억들이 올라와서.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닌가. 우리가 증언 안 하면 누가 하겠나. 지금도 우리 사진보고 북한군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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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활동한 곽희성씨. ⓒ 권우성


지만원과 두 '광수', 법정에서 마주하다

지난해 두 사람은 서울중앙지법에서 지만원씨와 마주했다. '허위사실 유포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된 지씨 재판에 증인 신분으로 참석했던 것이다. 해당 소송은 3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진행 중이다. 이들에게 당시 지씨와 마주했을 때의 기억을 물었다.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졌다.

양 : "재판에서 지만원 변호사가 묻는 질문이 초등학생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 제일 황당한 게 당시엔 광대뼈가 튀어나왔는데 지금은 왜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듣다 못해서 판사한테 한 마디 했다. 당신들이 5개월 넘도록 죽기 직전까지 맞아 봤냐고. 눈만 뜨면 그런 모진 고통을 받는데 어떻게 사람 얼굴이 변하지 않겠느냐고."

곽: "당시 우리(증인)와 지만원과의 거리가 2미터도 안 됐다. 재판정에서 한다는 소리가 '하이바(헬멧) 어디서 났냐', '콧수염은 왜 길렀냐' 뭐 이딴 말인데... 뛰쳐나가고 싶었다. 결국 못 참고 판사한테 '피해자들 불러다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이게 재판이냐'고 따졌다. 호적, 군대서 찍은 사진, 증명사진 다 첨부했는데 왜 이딴 재판을 질질 끌고 있냐고."

 - 이런 혐오와 왜곡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양 : "결국은 진상규명이다. 이제는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우리가 명예 같은 게 뭐 중요하겠나. 적어도 우리가 직접 보고, 피해 받은 사실에 대한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곽 :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제주 4.3사건만 해도 진상규명까지 70년이 걸리지 않았나. 광주의 진실이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라도 밝혀졌으면 한다. 내가 바라는 건 내 자손들만큼은 옳은 역사를 알았으면 하는 거다. 그래야 나도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우리 할아버지 이랬던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그래서 더 이상 언론이 우리를 취재 안 하는 날이 왔으면(웃음), 이게 내 바람이다."

[기획 / 오월ing]
① 죽은 시민군 엄마가 산 시민군에게..."살아야제, 29만원 전두환도 골프치는디" (http://omn.kr/1j9so)
②-1 해남 땅끝마을 사는 '여자 광수' "지만원 그놈이 나를..."(http://omn.kr/1jau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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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민주화운동 희생자 묘지에서 오열하는 가족. 1980.5.30 ⓒ 연합뉴스

 
#5.18 #광주 #김용장 #지만원 #계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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