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일 회담 요구하는 황교안이 알아야 할 '함정'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대통령 '일대일 회담' 고수하는 황교안 대표... 이회창 사례 살펴보니

등록 2019.05.15 14:03수정 2019.05.1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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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전국순회 장외투쟁 돌입패스트트랙 처리에 항의하는 자유한국당이 2일 오전 서울역앞에서 '문재인 STOP! 서울시민이 심판합니다' 집회를 시작으로 전국순회 장외투쟁에 돌입했다. (자료사진) ⓒ 권우성

자유한국당의 장외투쟁으로 정국이 꼬인 가운데, 청와대가 '5당 대표 회담'을 제안하자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일대일 회담'을 역제안 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가 '선(先) 5당 대표 회담, 후 일대일 회담'이라는 수정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1년 전인 1998년 10월에도 회담 형식을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총재는 일대일 여야 영수회담을 희망하고, 여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일이 있었다.

그해 8월부터 이회창 총재는 세풍(稅風) 사건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1997년 대선 때 이석희 국세청 차장 등이 이회창의 대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현대·SK·대우 등 24개 대기업으로부터 166억7000만 원을 모금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8월부터 검찰 수사가 시작됐다.

동생 이회성씨가 이석희 차장과 대선 문제를 논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회창 역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회성은 2004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5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이렇게 동생의 혐의가 확실했기 때문에, 1998년 하반기에 이회창은 위기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회창이 띄운 승부수가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야당 파괴 공작으로 규정하고 장외투쟁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민주 수호 및 야당 파괴 저지 1천만 명 거리 서명' 등의 방법으로 그는 장외투쟁(원외투쟁)을 벌였다.

이회창은 왜 '영수회담'을 바랐나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의 장외투쟁을 보도하는 1998년 9월 19일자 <한겨레신문>. ⓒ 한겨레신문

당시 이회창은 국회의원이 아니었다. 국회에 입성한 것은 이듬해인 1999년이다. 1999년 6월 3일 치러진 서울 송파갑 재선거에서 당선됐다. 1998년 장외투쟁 당시의 그는 원외 인사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원내보다는 원외가 더 친숙한 그였지만, 장외투쟁을 무한정 계속하기 힘든 사정이 있었다. 10월 들어 총풍 사건이 터진 것이다. 1997년 대선 직전에 청와대와 한나라당 측이 베이징에서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박충 참사를 만나 '무력 시위를 해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배우 황정민 주연의 2018년 영화 <공작>에 이 장면이 나왔다. 안보 문제를 일으켜 이회창을 당선시킬 목적으로 휴전선 총격을 요청했던 것이다.

세풍에 더해 총풍까지 맞으면서 이회창의 장외투쟁은 힘을 잃어갔다. 이런 상황을 돌파할 목적으로 추진된 게 여야 영수회담이다. 장외투쟁을 접고 상황을 수습할 명분을 만들고자 김대중 대통령과의 일대일 영수회담을 희망했던 것이다. 이미 9월부터 영수회담에 대한 희망을 내비쳤던 그는 10월 9일 기자회견에서 "저쪽에서 제의가 오면 그때 검토해보겠다"는 말로 그 희망을 간접적으로나마 또다시 표시했다.

이회창의 일대일 회담 희망에 대해 정치권은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동기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일대일 형식을 통해 세풍·총풍을 피함과 동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제고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1998년 10월 10일자 <한겨레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정치권에선 이 총재가 내심으론 야당 대표의 위상을 과시할 수 있고, 국세청 불법 모금 사건, 판문점 총격 공작 사건 등 주요 현안을 정치적으로 풀 수 있는 영수회담의 조기 개최를 바라고 있다고 보고 있다."
  

1998년 10월 10일자 <한겨레신문>. ⓒ 한겨레신문

여당인 국민회의는 시큰둥했다. 정균환 국민회의 사무총장은 '세풍·총풍에 대해 사과 한마디 없는데 무슨 영수회담이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회창이 세풍·총풍에 대해 책임을 지기보다 일대일 영수회담으로 위기를 피하고, 동시에 정치적 영향력을 제고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김대중 대통령의 결단에 따라 11월 10일 영수회담이 열리기는 했지만, 이회창은 싸늘한 시선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회창의 '격'을 떨어트리려던 김영삼
 

1998년 11월 11일자 <경향신문>에 보도된 여야 영수회담. ⓒ 경향신문

회담 형식을 둘러싼 이회창의 신경전은 김대중 대통령뿐 아니라 전임자인 김영삼 대통령과도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관대함을 보인 데 반해, 김영삼 대통령은 이회창의 요구에 대해 원리원칙에 충실하는 면을 보였다.

1997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는 같은 편인 김영삼 대통령과의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민심을 잃은 김영삼을 맹렬히 공격하는 방법으로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하고자 했다. 그해 9월 30일 전당대회를 통해 김영삼이 이회창에게 총재직을 넘겨주었지만, 이회창은 김영삼의 한나라당 탈당까지 요구하면서 차별화 전략을 밀어붙였다.

이로 인해 위기에 몰린 김영삼이 정국 안정을 목적으로 안출해낸 게 대선 후보들과의 연쇄 회동이다. 정국을 수습하고 대선 관리 문제 등을 논의한다는 명분으로 각당 후보들과의 연쇄 회담을 추진한 것이다.

이때 김영삼은 '회담 형식은 일대일로 하되, 각 회담을 병렬시키고 회담 순서를 조정하는 방법'으로 이회창의 이미지를 깎아내리고자 했다. 여당 총재인 이회창과의 일대일 회담을 열어주되, 야당 총재인 김대중과의 일대일 회담을 그 앞에 배치하는 방법으로 '이회창을 여러 후보 중 하나'로 보이도록 하려 했다. 1997년 10월 24일자 <한겨레신문>은 김영삼이 그런 기획을 하게 된 것은 "이 총재와의 정면대치 상황에서 빠져나와 국면을 전환하려는 의도"라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회담 형식을 개별 회동으로 함으로써 이 총재를 집권 여당의 후보가 아니라 '후보들 중의 하나'로 격하시켜버린 대목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 후보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각 후보들과 명목상 등거리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중립 의지를 부각하는 효과도 노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개별 회담의 1순위를 의도적으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로 선정한 것이나, 아직 창당도 하지 않은 이인제 전 경기지사를 초청 대상에 넣음으로써 대선 후보로서의 실체를 분명히 인정한 점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이회창 후보의 격을 떨어트리고자, 이 후보와의 회동 순서를 국민회의 후보와의 회동 뒤에 배치하고 아직 공식 후보도 아닌 이인제와의 회담까지 함께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이회창 측은 처음에는 그런 의도를 포착하지 못한 듯하다. 10월 23일 청와대의 제의를 받은 이회창 측은 회동 날짜를 25일로 잡았다. 23일 저녁에는 날짜를 11월 1일로 연기했다. 그러더니 25일에는 회담 거부 의사를 명시적으로 표시했다. 김영삼이 깔아놓은 함정에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던 듯하다.

이처럼 이회창은 여느 정치인에 비해 일대일 회담에 특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이를 통한 정치적 효과에 상당히 세밀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 이회창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은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김영삼 대통령은 각별히 조심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난 12일 홍익표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기자들에게 고위 당정협의회 결과를 설명한 뒤 "대통령과 일대일 영수회담은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특히 제왕적 총재 정당일 때 있었던 방식"이라고 말했다. 황교안 대표의 일대일 회담 요구를 비판한 것이다.

"정당은 각당 대표와 원내대표 중심으로 운영되므로 국회 정상화를 위해서는 각당 대표, 원내대표가 회동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일대일 회담과 같은 톱다운 방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민주적 정당 운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대일 영수회담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과거 한국 정치의 폐단이었다. '대표'도 아니고 '총재'라는 직함이 있었던 시절, 제왕적 총재가 당을 이끌고 정국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 중 하나가 일대일 영수회담이었다. 김용호 인하대 교수의 논문 '최근 한국 정당의 개혁조치에 대한 평가'는 이렇게 말한다.
 
"제왕적 당 총재 체제에서는 국회의원들이 자율적으로 법안을 진지하게 심의하고 토론하여 타협안을 내지 못하고, 대통령 당이 날치기 등 편법으로 법안을 통과시키거나 대통령과 반대당 영수 간의 회담 등을 통해 타협안을 내는 경우가 많아 국회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한국정당학회가 2008년 발행한 <한국정당학회보> 제7권 제1호.

그 영수회담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

여야 대표 간의 일대일 회담이 필요한 경우도 물론 있다. 하지만 1998년 이회창 사례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개인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수단 혹은 단순히 정치적 위상을 높이기 위한 수단 정도로 악용되는 것은 당연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당 내부의 의사결정 과정을 존중하지 않고 대표와 여타 당직자 간의 권한배분까지 무시하면서 일대일 회담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태도는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헌법 제8조 제2항은 "정당은 그 목적·조직과 활동이 민주적이어야 하며, 국민의 정치적 의사 형성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조직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이 정신이 관철되려면 정당의 대외 교섭에서도 민주적 절차가 중시되어야 한다.

정당 운영이 민주적이 되려면 상향식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대외 교섭을 처리하고, 대표와 여타 당직자 간에 권한을 배분하는 방식에 익숙해져야 한다. 불요불급한 상황에서 일대일 영수회담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것은 낡은 정치적 인습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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