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집 쳐다보던 고3 아들... "죽을 생각하고 그랬는갑서"

[오월ing ④-5] 5.18미성년사망자 전수조사, 광주 곳곳에서 처참히 죽은 아이들

등록 2019.05.18 11:12수정 2019.05.18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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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오마이뉴스>는 5.18 당시 숨진 미성년 사망자를 전수조사해 그들이 겪었을 고통과 잔혹했던 학살자들의 면모를 되새기고자 한다. ▲ <5.18 관련 사망자 검시내용>(광주지검) ▲ <광주민중항쟁비망록> 5.18광주민중항쟁 유족회 편 ▲ <피해자신고서> 사망자 편(평민당) ▲ 2001년 유전자 감식 결과를 토대로 사망자 203명를 확인한 결과 약 30%인 60명이 1960년 5월 18일 이후 출생자였다. (위 자료에 기록되지 않은 사망자, 무명열사, 행방불명자 등 고려하면 사망자는 더 많다) - 기자 주

*<총알 박힌 채 버려진, 5월 광주의 '4세 아이' http://omn.kr/1jbxw>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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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신 속 아들 모습 가리키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만 15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문재학의 바로 아래 교련복을 입은 인물은 고 안종필(당시 만 15세, 광주상고 1)이고, 그 아래는 고 박성용(당시 만 17세, 조대부고 3). ⓒ 권우성

5월 21일 전남도청 집단발포, 23일 주남마을 버스 집중사격, 24일 송암동 학살 현장뿐만 아니라 5.18 최후 항전일인 27일에도 미성년자들은 전남도청과 시외곽을 지켰다. 27일 미성년 사망자 중 10명이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잔혹한 진압 작전에 희생됐고, 1명은 시외곽에서 경비를 서다 목숨을 잃었다.

[27일 최후 항전] '저 안 갈랍니다' 전남도청 끝내 지킨 그들

27일은 5.18의 끝이면서 시작이었다. 이날 계엄군에 짓밟히고 만 최후의 항전은 독재에 굴하지 않는 광주정신이 되어 지금도 기억되고 있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이들 중 미성년자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안종필(남, 1964년생), 문재학(남, 1964년생), 박성용(남, 1963년생), 염행열(남, 1963년생), 김종연(남, 1961년생), 김종철(1962년생), 이강수(남, 1961년생), 유동운(1961년생), 홍순권(남, 1960년생), 서호빈(1960년생)이 그들이다. 김부열(남, 1963년생)은 전남도청이 아닌 지원동 인근 산에서 경비를 서다가 최후를 맞이했다.

조대부고 3학년이던 박성용은 18일 집 밖으로 나갔다가 21일에야 돌아왔다. 3일 동안 아들을 찾아다녔던 엄마는 전남도청에서 온갖 잔혹한 모습을 목격했던 터라 더 이상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 엄마의 간곡한 호소에 아들도 수긍했다.

"우리는 오직 니 하나만 믿고 산다잉. 니가 죽으믄 나도 죽어블 것이여."
"엄마, 이참에 나가 죽으믄 개죽음 당해. 찾도 못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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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하지만 엄마의 바람과 아들의 마음은 자꾸 엇갈렸다.


"문득 이놈이 주먹을 불끈불근 쥐믄서 '엄마,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디 집에서 요렇게 있어야 쓰겄소' 자꾸 그럽디다. 그래서 나는 '그래도 가만히 있어야, 집에 가만히 있어'라고 달랬제라. 근디 26일날 오후에 갑자기 '엄마 나 친구집 좀 갔다올라요' 그럽디다. 갔다가 올 줄로만 알았제 도청으로 갈 줄은 생각도 안 혔제라. 근디 옆에집 할머니가 와서 그래요. 할머니가 본께는 큰길가 전신주에서 우리 성용이가 딱 서서 우리집을 한창이나 보고 서 있었대요. 모르긴 몰라도 지가 도청으로 갈 결심을 하고, 지 죽을 것까지 생각하고 그랬는갑서."
  
아들은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숨졌다. 검시조서엔 '배흉부 맹관총상(체내에 박힌 총상), 우대퇴부 관통총상'이라고 그의 사인이 나와 있다.

"고놈이 덩치가 크그등이라. 그 당시 도청에서 어린애들을 다 나가라 했답디다. 근디 갸는 덩치가 큰께 안 나간다고 했다고 누가 그럽디다. 한 번은 누가 망월동 묘지에서 '이 애가 그때 나가라고 그래도 안 나가드만 죽어브렀네' 그러드랑께. 나는 지금도 아늘 놈이 도청서 어뜨케 죽었는가 알아볼라고 5.18 비디오를 상영하믄 하나도 안 빠지고 다 가본디 도청에서 싸운 것은 안 나오드만. 근디 도청에서 죽은 우리 성용이 사진이 카톨릭센타 사진 전시한 디서 나왔어라. 중흥동 아들(문재학, 광주상고 1학년)하고 청식당 아들(안종필, 광주상고 1학년)하고 나란히 누워있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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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자 전수조사 ⓒ 고정미

 
[곳곳에서 숨진 시위대] 헌혈하고 오던 고3 학생까지 총에 맞아

이외에도 수많은 시위대가 곳곳에서 사망했다. 그 중 총상, 차량추락사, 자상(찔린 상처) 및 좌상(타박에 의한 손상) 등으로 미성년자 13명이 숨지고 말았다.

이성귀(남, 1964년생), 양창근(남, 1964년생), 박금희(여, 1963년생), 김영두(남, 1963년생), 김재형(남, 1962년생), 서종덕(남, 1962년생), 임정식(남, 1962년생), 김병연(남, 1962년생), 이종연(남, 1962년생), 김경환(남, 1961년생), 황성술(남, 1961년생), 김현규(남, 1960년생), 홍인표(남, 1960년생)이 그들이다.

안타까운 사연도 많다. 춘태여고(현 전남여상) 3학년이던 박금희는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헌혈을 하고 나오다 총을 맞고 숨졌다. 목사가 꿈이었던 임정식은 '고난의 현장에서 민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21일부터 시위에 참가했다가 자신을 찾으러 온 어머니를 구하던 중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서종덕은 담양으로 가서 광주의 참상을 알리려다 광주교도소 인근에서 총을 맞고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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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한 장면 ⓒ (주)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영암에 살던 김영두는 21일 점심을 먹은 후 친구들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구경을 나가본다며 집을 나섰다. 엄마는 아들이 들어오지 않다 걱정스런 마음에 터미널로 나갔다.

"총을 메고 온 사람도 있고 구경나온 사람도 있고 해서 엄청 복잡합니다. 광주에서 왔다는 청년들이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찢어 죽이자' 하믄서 돌아다녔제라. 사람이 많아서 아들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근디 친구 하나가 '영두가 공수부대와 싸운담서 해남에 무기 가질러 가는 차를 탔다'는 거요. 글고 소식이 없었제라."

가족들은 영암, 나주, 광주 등을 샅샅이 뒤졌지만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 30일이 돼서야 조선대병원에 아들의 시신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광주 송정리 쪽에서 아들을 막 찾아다닌디 군인들이 (차를 향해) 총을 엄청 쏴브렀답디다. 그때 다친 사람들이 '조의원'이란 병원에 갔다고 해서 거그를 가본께, 의사가 어떤 학생 하나가 죽기 전에 고향을 말하랑께 '영... 영...'만 되풀이 해싸서 (나주) 영산포가 고향인줄 알고 거따가 (시신을) 갖다뒀다는 거요. 시신을 한참을 안 가져간께 나주경찰서가 가매장해브렀다가, 여러 군데서 가매장한 것이 문제가된께 조선대병원으로 옮겼는갑더라고. 암튼 죽었단 소식을 듣는 순간 가슴이 미어터지고 팔짝팔짝 뛰어블 것 같드만.

[시위와 무관한 죽음들] 사라진 형제,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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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5.18 힌츠페터 스토리>의 한 장면. 금남로에서 가만히 서있던 시민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 ⓒ KBS

 
시위와 무관하게 숨진 이들도 많다. 총상, 타박상, 차량사 등으로 미성년자 6명이 목숨을 잃었고, 시위 가담·무관 여부를 알 수 없는 미성년자 4명도 숨진 채 발견됐다. 박기현(남, 1966년생), 김명숙(여, 1965년생), 양희태(1964년생), 함광수(남, 1963년생), 이요승(여, 1962년생), 양희영(1961년생), 문민규(남, 1961년생 추정), 안병복(남, 1960년생), 노경운(남, 1960년생), 불상의 인물(4세 가량)이 그들이다.

이 중 양희태-양희영은 형제다. 영광에 살던 엄마와 아빠는 광주가 시끄럽단 소식에 22일 자취생활을 하고 있던 셋째 희영과 넷째 희태의 월산동 자취방을 찾았다. 하지만 두 아들 모두 집에 없었다. 살아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백방으로 찾아다녔으나 형은 22일 백운동 철로변에서, 동생은 23일 대동고 옆 골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동생은 (함께 있던) 시체 3구 중에서 발견됐는디 3구 모두 죽은 지가 오래됐는가 냄새가 심하게 납디다. 그곳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죽은 다음 거그 버려진 것 같었소.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형태로 마구 꼬부라져 있었응께요.

아내는 두 아들 잃은 충격에서 쉽게 못 벗어났제라. 책가방 메고 가게 앞 지나는 학생들을 보믄 아들들 이름 부르며 달려가고, 점점 정상인의 모습이 아니었제. 광주로 이사도 가보고, 교회랑 절에도 가보고, 정신과 치료도 받았는디 그냥 그대로였어요. 그래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느데 1984년에 눈이 뒤집힘서 죽어블대요. 1980년 5월에 팔팔 뛰는 두 아들도 모자라 아내마저 목숨을 빼앗겨븐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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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자 전수조사 ⓒ 고정미

 
[후유증] '80년 5월'로 끝나지 않았다

1980년 5월 숨지진 않았으나 총상, 구타, 고문 등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미성년자는 7명이다. 전남대 1학년이던 장경희(여, 1962년생)는 폭행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겪다가 1987년 1월 30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동차정비공이었던 정종월(남, 1961년생)은 5월 30일 월산동 부근에서 구타당한 뒤 연행돼 상무대 국군통합병원을 거쳐 석방됐지만 1985년 4월 20일 후유증으로 숨졌다. 5월 19일 공용터미널에서 구타당한 뒤 연행돼 상무대에 수감됐던 김재식(남, 1962년생)도 1984년 12월 17일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요리사였던 박주삼(남, 1961년생)은 5월 22일 송암동에서 총상 부상을 입고 계엄사에 연행돼 고문·구타를 당한 뒤 1981년 8월 2일 세상을 떠났다. 인성고 3학년이던 정창만(남, 1962년생)도 5월 20일 구타당한 뒤 1981년 10월 16일 숨졌다. 5월 21일 백운동 효천부락 쪽에서 총상을 입은 뒤 발목을 절단한 진흥고 3학년 김재홍(남, 1961년생)은 1981년 3월 3일 세상을 떠났고, 7월 16일 구속돼 8월 2일 석방된 조강일(남, 1962년생)도 1986년 고문 및 구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5.18 당시 신군부에 저항했던 이들을 구금하면서 무참한 폭력과 삼엄한 감시와 같은 인권유린이 자행되었던 헌병대 영창. 현 5.18 자유공원. ⓒ 김이삭

 
"5월 18일 이후로 군인들이 젊은이들을 적군처럼 여기고 패대고 묶어서 끌고 가는 걸 강일이가 본 모양이여. 처음엔 강일이가 친구 몇 명이랑 시민들을 따라다님서 시위에 참여한 것 같어. 근디 시위 만으론 어렵다 생각했는가 교회 등사기를 빌려다 유인물을 작성해 복사를 한 모양이여."

경찰은 5.18이 끝난 후에도 조강일을 찾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아빠는 아들을 부산 친척집으로 피신시켰다가 고향인 함평에 있게 했다. 그럼에도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들이 불안해 여러 날을 고민한 끝에 아들을 자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첨에 서부경찰서에 있을 땐 괜찮했제. 가끔씩 얼굴을 봐도 아무런 이상이 없드라고. 근디 이후에 상무대로 넘겨져서 1개월 가량 있었는디 거기서 수 없이 많은 고문을 당한 것 같어.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그 사람을 대라'는 거였제. 누구도 조종한 사람이 없었응께 아들은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는 거고. 아들이 문학에 소질이 있었거든? 그래서 유인물 원고 쓰는 일을 자기가 맡아서 했는디 그래서 고문이 더 심했던 모양이여."

간신히 출감한 아들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벙어리 같이 있다 갔제. 안에서 뭔 일이 있었냐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 그냥 가슴이 좀 아프단 말만 하고. 차츰 생기를 잃어가더니 시름시름 앓더라고. 그 전엔 엄청 건강했거든. 변변치 못한 살림에 병원 한 번 제대로 못 데려가고 한약 몇 첩만 대려 먹었는디, 그때 쫌 나아지나 싶드만 1986년 11월에 결국 죽어브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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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자 어느 정도? ⓒ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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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 운동 미성년 사망한 장소? ⓒ 고정미


 [기획 / 오월ing]
죽은 시민군 엄마가 산 시민군에게..."살아야제, 29만원 전두환도 골프치는디" (http://omn.kr/1j9so)
②-1
해남 땅끝마을 사는 '여자 광수' "지만원 그놈이 나를..." (http://omn.kr/1jauj)
②-2
'광수' 지목된 두 시민군의 증언 "통합병원 시신 정말 이상했다" (http://omn.kr/1jb7g)
③ 
"황석영이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 (http://omn.kr/1jaf5)
④-1
멍투성이에 입힌 교복, 관 다시 여니 "으메, 내 새끼가..." (http://omn.kr/1ja2t)
④-2
시신 더미 속 아들 바지와 발바닥, 엄마는 결국 기절했다 (http://omn.kr/1ja3o) 
④-3
18세 시민군의 묘비명... 엄마는 손으로 무덤 파며 통곡했다
덧붙이는 글 유족의 말은 전남대5.18연구소 학술DB의 증언록을 참고했습니다.
#5.18 #미성년 #사망자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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