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 아들 뒷바라지만 잘하면 된다"

[엄마의 이름을 찾아서] 결혼 후 일을 그만뒀다, 분열이 시작됐다

등록 2019.05.22 14:12수정 2019.05.2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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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가 된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보다 아이의 이름으로 불리는 데 더 익숙해집니다. 엄마는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살아갈 수 없는 걸까요? '나다운' 엄마, 이름을 지키는 엄마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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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아늑한 방에 남편과 둘이 남게 됐을 때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내가 결혼을 했다는 현실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 unsplash

 
2006년 5월 7일. 그야말로 환상적인 날씨였다. 전날 시원하게 내린 비 덕분에 온 세상이 깨끗했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서 우리는 혼인 서약을 했고, 마침내 부부가 됐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결혼식 도중 많은 신부들이 눈물을 흘리건만, 나는 결혼식 내내 싱글벙글했다. 결혼은 내게 하나의 성취처럼 느껴졌다.

결혼식을 마친 후 인천공항 근처의 한 호텔로 향했다. 우리는 다음 날 이른 아침 비행기로 신혼여행을 떠날 예정이었다. 결혼식의 분주함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아늑한 방에 남편과 둘이 남게 됐을 때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내가 결혼을 했다는 현실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던 차에 친정 부모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부모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시는 '오롯한 나'로 살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묘한 단절감을 느끼면서 한바탕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고, 신혼 여행길에 올렸다. 다행히 여행의 낭만과 흥분은 이런 기분을 씻어주었다.

새로운 꿈을 찾아 떠나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우리는 새롭고도 익숙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정에서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됐지만, 일에서는 예전의 것들을 유지했다. 남편은 그의 일에서 최선을 다했고, 나 역시 취재기자로 계속 일했다. 일이 있었기에 가정에서의 낯선 역할 속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내가 연결돼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결혼을 준비하느라 잠시 밀어두었던 고민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오래전부터 기자라는 일에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쓰는 글이 특정 영화나 배우를 홍보해주는 것 외에 사회에 어떤 보탬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글쓰기'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은 기자생활 7년 동안 점점 더 현실과 멀어지기만 했다.

영화담당기자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나는 내가 영화를 보는 방식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름을 깨닫고 있었다. 나는 영화 자체보다는 등장인물의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 즐거웠고, 등장인물들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며 글을 쓰곤 했다. 나의 관점은 회사의 편집관과 종종 부딪혔다. 이런 갈등 속에서 누군가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더 간절해졌다.

게다가 당시 나는 새로 부여된 아내 역할에 헌신하고 있었다. 취재원들과의 만남보다 일찍 퇴근한 남편의 저녁밥을 차려주는 게 더 중요했고, 주말에 현장 나갈 일이 생기면 남편 홀로 두는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당연히 일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상담심리학'이라는 분야를 접했다. 이 공부를 하면 내가 영화를 보면서 그토록 분석하고 싶었던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뒤 상담심리사 자격증을 따면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야근이나 회식이 없고 근무환경이 유연한 편이라 훗날 아이가 생겼을 때 육아와 병행하기 쉽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남편과 상의 후, 나는 중학교 때부터 꿈꿔온 기자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한 달쯤 휴직하며 심사숙고한 뒤 2007년 2월 말 회사에 사표를 냈다. 당시 나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상담'을 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기에, 기자직을 접은 것에 대한 아쉬움도, 새로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결심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회사 동료들의 반응은 대체로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이었다. 나는 보다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그만두는 것이었지만, 결국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일하는지 궁금해"라는 팀장의 말에 담긴 편견을 확인시켜 준 셈이 되고 말았다(관련 기사 : 친정부모 직업 듣더니... 예비 시아버지의 '놀라운' 반응).

그렇게 나는 결혼 10개월 만에 일이라는 영역에서도 새로운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로 '결혼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달라지고야 말았다.

뒷바라지하는 사람

회사에 사표를 낸 후 그해 가을학기 입학을 목표로 곧바로 대학원 입시 준비에 들어갔다. 학부 때 전공과 완전히 다른 것을 공부해야 했기에, 나는 스터디 모임에 참여해 같은 길을 꿈꾸는 새로운 동료들과 시험 준비를 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시댁 어른들께 나의 꿈을 이야기했다.

"아버님, 저 일 그만뒀어요.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공부해보고 싶어서요."
 

그러자 시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너는 내 아들 뒷바라지만 잘하면 된다."

나는 왜 일을 그만뒀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지 설명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시부모님은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으셨다. 분명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아마 그 부분은 못 들으신 것 같았다. '내 아들 뒷바라지만 잘하면 된다.' 이 한 마디로 나의 꿈은 일축됐다.

시아버지의 이 말씀은 내게 일종의 깨달음을 가져왔다. 결혼 후, 아니 결혼 전부터 시가에 갈 때마다 밀려왔던 불편한 기분의 이유가 명확해졌다. 시부모님께서는 내게 무척 잘해주셨다. 요리나 설거지를 제대로 못 해도 야단치지 않으셨고, 과일을 어설프게 깎아도 '새아가가 깎은 과일은 더 맛있다'며 예뻐해 주셨다. 하지만, 나는 시가 식구들과 만날 때마다 어딘지 작아지고 초라해짐을 느꼈다.

'예뻐해 주시는 시부모님'과 '불편한 기분' 사이의 불일치 원인은 바로 이거였다. 시가에서 나는 '남편 뒷바라지하는 사람'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한 사람'이 아닌 '남편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기에 시부모님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편하기만 했던 것이다. 1949년 보부아르가 했던 그 유명한 말이 2007년의 내게 현실이 됐다.
 
"여자는 남자를 참고로 하여 정의되고 구별되었지만, 남자는 여자를 참고로 정의되지 않는다. 즉 여자는 부수적 존재다."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빨래하는 페미니즘> 재인용)
     
자발적 헌신 vs. 가부장적 의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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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나의 정체감은 갈라졌다. 시댁에서 나는 온전한 한 사람이 아닌 남편에 의해 규정되는 '부수적 존재'였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자발적 헌신'과 '가부장적 의존' 사이를 오가며 헤매고 있었다. ⓒ unsplash

 
또한 이 말은 아내로서의 헌신을 돌아보게 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밥을 차리고, 남편의 출근 준비를 돕는 것.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저녁 약속을 모두 마다하고 장을 봐 식사를 준비하는 것. 스터디 모임에 나가 늦게 돌아올 때마다 남편에게 미안해했던 것.

이것들이 과연 아내로서 사랑의 표현이었는지, '남편을 뒷바라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규정에 스스로를 가둔 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당시 신혼이었던 내가 기쁜 마음으로 헌신한 건 분명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자발적 헌신 외에 다른 이유들도 분명 있었다.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고 있긴 했지만, 일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게 되자 나는 나 자신보다 남편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공부하지 않을 때는 남편의 옷을 손질하거나, 그를 위한 식사를 준비하는 데 시간을 썼다.

남편이 내가 기울인 정성에 화답할 때면 행복했지만, 갑작스러운 회식이나 모임으로 알아주지 않을 때면 무척 서운했다. 나는 나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가기보다 점차 남편의 반응에 의존하고 있었다. 남편은 이런 것들을 요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부장 사회의 성 역할을 그대로 따르면서 수동적인 여성이 되어갔다.

나는 이렇게 분열되기 시작했다. 결혼 전에는 일이 주는 단단한 정체감을 중심으로 어느 자리에서든 스스로 '나답다'고 느꼈다. 하지만, 결혼 후 나의 정체감은 갈라졌다. 시댁에서 나는 온전한 한 사람이 아닌 남편에 의해 규정되는 '부수적 존재'였다. 남편과의 관계에서는 '자발적 헌신'과 '가부장적 의존' 사이를 오가며 헤매고 있었다. 이전까지 나를 규정했던 '기자'라는 강력한 직업적 정체감도 사라졌다.

이런 혼란을 겪는 와중에 나는 대학원 입학을 위한 공부에 매진했다. 대학원에 진학해 상담심리사가 되면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새로운 일에서 성공해 내가 '부수적 존재'가 아님을, 꿈이 있는 '한 사람'임을 시가에 증명해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2007년 9월, 원하던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리고 임신을 했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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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하며 평등과 생명존중을 담은 글을 쓰고 소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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