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이 골목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다행이다

[대전 그곳을 알고 싶다] 추억의 대전 중앙시장

등록 2019.05.16 12:02수정 2019.05.16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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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작가회의에서는 '2019 대전방문의 해'를 기념하여 연속기고를 시작합니다. 대전의 볼거리와 즐길거리, 추억담을 독자들과 나누고 대전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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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중앙시장(자료사진). ⓒ ryuch


아내가 영화를 좋아해서 대전에 가끔 간다. 아마 영화를 안 좋아했으면 집을 샀을 것이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거나 시간이 맞으면 기름 값을 아끼지 않고 전국을 누비니 돈, 많이 들어갔다.

아내는 연탄에 구운 가래떡과 옥수수를 좋아한다. 대전 영화관은 낡았다. 옛날 중앙극장이 있던 자리는 주차장으로 변했으나 그 골목, 그 거리는 그대로 남아있어 다행이다. 나이 먹으면 추억의 힘으로 산다하지 않았나. 대전역 앞, 제일은행이 있던 자리에서 조금만 더 걸으면 아내가 좋아하는, 불편한,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운, 영화관이 나온다. 물론 영화를 보기 전에 가래떡과 옥수수를 리어카에서 사는 것을 잊지 않는다.


골목의 추억

영화관 뒤의 골목이 내가 일하던 식당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쪼그라든 대도 레코드가 숨을 쉬는 곳이다. 대도 레코드사 바로 옆 솥밥집, 그 건너편이 부산식당이었다. 대전 문화재단이 구도심 살리기 일환으로 유용주가 식당 보이로 일했던 곳으로 지정하여 부산식당과 경호제과가 있던 건물에 작은 표지판을 세웠다. 내게는 영광이다.

나는 대전에서 부산식당, 유림상회, 오복상회, 경호제과, 대호상회에서 일을 했다. 모두 대전 중앙시장 근처다. 부산식당에서는 여러 가지 잡일과 이층 계단과 화장실 청소를 했다. 누나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했다.

그걸 부주방장인 이군이 가만 두질 않았다. 틈만 나면 주방장 몰래 건드렸다. 나는 조그만 꼬마였지만 마포걸레를 들고 달려들었다. 덕분에 기절을 하여 두 번이나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밤에는 이층 손님방이 잠자리였다. 여닫이문을 열면, 번듯한 방은 남자 직원들 숙소, 아래층 주방에서 올라오는 환풍기 소리가 요란한 방은 여자들 숙소였다. 나는 남자들 숙소에서 안자고 여자들 숙소에서 누나의 젖가슴을 자장가로 삼았다. 거기서 처음으로 전화기를 보고 신기해서 카운터가 통화하는 중에 눌러보기도 했다. 솜털이 채 가시지도 않은 어린 나이였다.

유림상회는 식료품 도매상인데 안집은 삼성동 중도공고 담벼락과 붙어있었다. 아저씨는 철도 공안, 주로 아줌마가 가게를 꾸려 나갔다. 아저씨는 열흘에 한번, 보름에 한번 가게에 잠깐 들렀다. 거기서 복수형을 만났다.


형은 미원출신으로 키가 컸다. 남대문시장에서 대형면허로 이름을 떨쳤다 한다. 주로 형은 장기(계산서)를 쓰고 배달을 했다. 작은 물건은 막 자전거 맛을 들인 내가 배달을 했는데, 복수형이 쓴 장기와 식품은 차이가 많이 났다. 한마디로 장기보다 물건이 배나 많았다. 그대로 싣고 온 내가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거였다.

복수형은 그렇게 물건을 빼돌려 월급의 몇 배를 해먹었다. 본의 아니게 거짓이 들통 난 복수형은 그만뒀고, 나는 매타작을 당했다. 추부에서 물건을 떼러 다닌 아저씨와 바람이 난, 유림상회 아줌마는 가게를 돌보지 않았다. 곧 유림상회는 망했다.

유림상회가 망하는 바람에 오복상회로 옮겼다. 같이 배달을 하던 칠성이한테 넘어간 거였다. 딱히 갈 곳도 없었다. 지금도 중국집 가서 짜장면을 먹으면 밀가루 생각이 난다. 곰표 밀가루, 강력분. 지금은 사재기가 범죄행위로 처벌받는다. 그때는 사재기가 비일비재했다. 오복상회 아저씨는 밀가루 값이 머지않아 오르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와 칠성이는 하루 종일 밀가루를 날랐다. 짐발이 자전거에 열 포대씩 싣고. 하지만 저녁 결산 때는 한 포 모자랐다. 나는 칠성이와 월급에서 제 하드래도 오복상회에서 더 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칠성이의 고자질로 졸지에 밀가루 한 포대 절도범으로 몰려 그만두었다. 지금 정칠성은 무엇하고 있을까. 그립고, 한번 보고 싶다.

다음은 경호제과다. 그 힘든 빵공장에 간 것은, 오복상회에서 밀가루를 대줬기 때문이다. 1층은 가게, 2층은 공장이었다. 공장은 빵부, 도너츠부, 생과자부로 나눠있지만, 그것은 편의상 나누어 있을 뿐이고, 바쁘면 우리같이 꼬마들은 아무 곳이나 가서 일했다. 공장에는 숙소가 있었는데 가게에서 일하는 누나들 숙소는 깨끗했지만 남자들 숙소는 엉망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잤다. 주로 꼬마들은 고아원을 뛰쳐나온 아이들이 많았다. 기술자들은 달리 소일거리가 없었다. 건너편 중국집에서 연애질하는 커플들을 몰래 훔쳐보거나 동시 상영 성인 영화를 보거나 나팔바지를 맞추러 나가거나 꼬마들에게 피 튀기는 복싱을 시켰다.

나는 솜씨가 좋았다. 소보루 빵을 잘 만들었으며, 도너츠를 노릇노릇하게 튀겼으며, 생과자를 잘 쌌다. 그러니까 연탄화덕만 빼고 어디든지 투입되었단 말이다. 서울에서 온 생과자 기술자와 붙은 것도 공장장의 숨은 의도였을 것이다. 눈치 없는 내가 동굴동굴하게 세 개 쌀 때, 기술자는 손바닥 지문이 드러나는 비뚤빼뚤한 생과자를 두 개도 채 못 싸는 것이었다. 나는 우쭐했다. 그날 밤 무지 맞았다.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두 뺨이 부어 올라왔다. 기술자는 나를 때려놓고, 밤 봇짐을 싸고 말았다.

마지막은 술 대리점 대호상회. 주인은 2.5톤 타이탄을 끄는 자수성가형 부자다. 그는 이미 그때, 빈병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전 인근에 가게는 모두 거래하면서 공짜나 다름없는 빈병을 끌어 모았다. 나는 여전히 꼬마였다. 두 명의 형들이 사장과 트럭을 타고 나가면 빈병을 골랐다. 사 홉짜리는 사 홉으로, 이 홉들이는 이 홉으로, 나머지 음료수병과 삼페인병, 그리고 포도주병은 따로 모았다.

빈병 정리가 끝나면 대전 시내 단골 식당이나 술집 배달을 했다. 거기서 나도 복수형에게 배운 절도범이 되었다. 아줌마가가 시장에 가면 이 홉들이 소주 한 상자를 인근 가게에다 싸게 넘겼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도둑질할 때면 등허리엔 땀이 났다. 돈이 생기면 월급에 보태 시골에 부쳤다. 아저씨는 타이탄을 직접 몰고 운전을 했는데, 나이를 가장 많이 먹은 형이 그만 두는 바람에 내가 따라갔다. 그날 낮에 산내에서 점심으로 먹은 라면과 소주가 달았는지 사장이 그만 졸았다. 커브 길에서 남의 집 대문을 들이 받은 거였다. 내 쪽을 받았음에도 아저씨와 조수로 따라간 중간형은 입원을 했는데, 나만 말짱했다.

아저씨는 점점 더 부자가 되었다. 타이탄을 팔고 6.5톤 새한트럭을 샀다. 정식으로 운전기사를 고용했다. 사업을 넓혀 나갔다. 주로 서울 맥주공장, 군산 소주공장을 뛰었다. 대전으로 돌아 올 때는 절대 빈차로 오지 않았다. 어떤 물건이라도 싣고 왔다. 사장은 소금이었다. 밥값, 기름 값을 아끼는 것은 물론, 숙소도 여인숙이었다. 기사는 기름을 넣을 때 돈을 빼돌렸다. 빼돌린 돈으로 여관에서 잤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긴 구두를 신은 기사는 멋있게 보였지만 내가 보기에는 주인을 속이는 사기꾼으로 보였다. 명색이 조수였던 나는 그를 통해서 운전을 배웠다. 어느 날 서울 갔다 오는 길에 사장이 탔다. 그동안 쓴 돈을 추궁하였다. 몸은 기사와 가까웠지만 말은 엉뚱하게 튀어 나왔다. 이실직고를 한 것이다. 대전으로 온 사장은 기사를 잘랐다. 나도 그만두었다.

추억의 맛

벌써 50여 년 전 얘기다. 영화를 보고 나서 시간이 나면 칼국수를 먹는다. 조금 더 여유가 있으면 한밭식당에 가서 설렁탕과 깍두기를 먹는다. 동백(동양백화점을 우리는 그렇게 불렀음)뒤에 들러서 두부 두루치기를 시킨다. 모두가 추억의 맛이다.
아내는 내 캐릭터가 그려진 골목을 보며 재밌어하였다. 물론 유용주가 그려진 조그만 표지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호들갑을 떠나. 그런 일은 아내가 싫어한다.

기왕 내친김에 경호제과가 있던 자리까지 자랑스레 왔다. 지금은 팥죽집으로 바뀌었다. 추억에 젖어 주위를 둘러보고 팥죽을 시켰다. 장사는 잘 되나보다. 다 먹고 저기 표지판에 인물이 나라고 넌지시 얘기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며 바로 건너편에서 문방구를 하는 남편을 불렀다. 나는 마침 가지고 있던 책에 사인을 해서 드렸다. 주인은 조심스럽게 덧붙었다.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 와서 자기가 유용주라고 한단다. 그래서 막걸리도 공짜, 팥죽도 공짜로 줬단다. 며칠 전에도 왔단다. 나는 웃었다. 내가 진짜 유용주라고. 또 그 사람이 나타나서 유용주를 사칭하면 적당히 속아 넘어가라고. 막걸리 값과 팥죽은 모아 놨다 진짜 유용주가 계산한다고.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1959년 전북 장수 출생으로 1991년 『창작과비평』 가을호에 작품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가장 가벼운 짐』,『크나큰 침묵』,『은근살짝』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산문집으로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쏘주 한잔 합시다』, 『아름다운 얼굴들』,『그 숲길에 관한 짧은 기억』,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장편소설로 『마린을 찾아서』,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 등이 있으며 제 15회 신동엽 창작기금, 거창 평화인권문학상을 받았습니다.
#대전 #대전중앙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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