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평전> 탈고가 내겐 탈상
자책감, 노무현의 말과 글 속에서 치유"

[10주기 심층 인터뷰]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 10년만에 입을 열다 ①

등록 2019.05.17 12:45수정 2019.05.2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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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복심(腹心), 노무현의 입, 노무현의 필사라고 불렸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 그는 지난 10년 동안 언론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해왔다. 이유는 하나.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그런 그를 만났다. ⓒ 김진석


2002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홍보팀장이었던 그는 2003년부터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연설담당비서관→대변인→제1부속실장→연설기획비서관 겸 대변인을 지냈다. 노무현의 복심(腹心), 노무현의 입, 노무현의 필사라고 불렸던 윤태영(58)의 40대 초·중반은 '노무현'과 '참여정부'라는 키워드로 씨줄날줄 엮여있다.

윤태영 전 대변인(이하 직책 생략)과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1980년대 후반 통일민주당 시절로 올라간다. 이기택 전 통일민주당 총재의 보좌관이었던 윤태영은 1990년 3당합당 이후 꼬마민주당 노선에 서면서 13대 국회 시절 노무현 의원과 만났다. 1990년대 중반, 새터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할 때 노무현의 자전적 에세이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년) 집필에 참여하면서 가까워졌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윤태영은 노 대통령의 생각을 가장 정확하게 읽는 참모로 '노무현의 복심'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좌희정 우광재'로 불리는 최측근 안희정과 이광재가 부재한 청와대 안에서 윤태영의 역할은 막중했다. 사실상 참여정부 내내 노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문고리 권력'이었지만, 사소한 구설조차 없었다.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한 뒤 '봉하 집필팀'을 이끌며 노무현의 말과 글을 기록하는데 참여했던 윤태영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뒤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최측근 참모로서 대통령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자책에 시달렸고, 그 아픔을 술로 달래며 지내다가 병을 얻었다. 윤태영은 노 대통령이 돌아가신 뒤 4년 동안 그렇게 자신을 동굴에 가둔 채 칩거하며 시간을 보냈다.

2014년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를 담은 책 <기록>을 펴내면서 윤태영은 동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이후 지금까지 6년 동안 7권의 책을 펴낸 그는, 노무현의 말과 글을 다듬으며 스스로를 치유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은 노 대통령과 관련된 마지막 저술 작업이라고 여기는 <노무현 평전> 집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 10주기인 올해 말 목표한대로 '탈고(脫稿)'를 한다면, 그것이 윤태영에겐 '탈상(脫喪)'이 될 것이다.

책을 출간한 뒤 저자로서 인터뷰에 응한 것을 제외하고, 윤태영은 지난 10년 동안 언론 인터뷰를 한사코 거절해왔다. 이유는 하나. 노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자책감. 그 굴레에 스스로를 묶고 오랜 침묵으로 사죄해왔다. 인터뷰할 자격이 없다는 그를 설득한 끝에 지난 5월 13일 오후 그의 집필 공간인 고양시 한 농가주택에서 만났다. 

윤태영을 만나는 자리에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사진가 두 명이 동행을 자청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속 사진가였던 장철영과 문재인 대통령의 전속 사진가였던 김진석.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그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말과 글로 기록했던 윤태영의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2시간에 걸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동안 윤태영은 담담했다. 그러나 2009년 5월 23일의 상황을 복기하는 건 아직도 그에겐 큰 상처였다. 애써 눈물을 참았지만, 목소리가 떨렸고 중간중간 침묵이 흘렀다. 당시 김경수 비서관에게 전해들었던 변고의 첫 마디는 끝내 자신의 입으로 얘기할 수 없다며 꺼내놓지 못했다.

다음은 윤태영 전 대변인과의 일문일답이다. (※ 이 인터뷰에서 직책 표기는 글의 흐름에 맞게 넘나든다는 점, 미리 독자들께 양해를 구한다.)

"노 대통령 서거 당일 아침에 받은 전화,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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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했다. 그때 집필팀을 해체하는 게 아니었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필팀을 유지했으면, 이삼 일에 한 번은 사저로 들어와라고 해서, 두 시간 가량 이야기하면서... 그게 삶의 근거가 되는 것이었는데..." ⓒ 김진석


-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됐나.
"그날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오전 7시 조금 지나서 김경수 비서관(현 경남도지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언론 보도 대응 문제 때문에 그 당시에는 아침에 김경수 비서관과 자주 통화를 했다. 그날도 그런 문제 때문에 전화가 온 줄 알았다. 그런데..."

- 김경수 비서관이 뭐라고 이야기를 했나.
"(잠시 머뭇거리며) 그때 그 멘트를 그대로 하기엔...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는..."

- 김경수 비서관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노 대통령께서 돌아가셨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나.
"아니다. '자살하려고 하셨구나'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돌아가셨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 부엉이바위는 사자바위보다 낮아서..."

- 노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은 언제 알게 됐나.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위중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봉하로) 내려가는 도중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같은 동네에 살던 송인배 비서관과 함께 차를 타고 중부내륙고속도로 접어들었을 때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 노 대통령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뵌 건 언제인가.
"5월 23일이 토요일이었으니까, 화요일인 5월 19일 낮에 봉하에서 뵀다."  

- 5월 19일 화요일에 노 대통령을 뵀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나.
"아... 좀 복잡한데, 그럴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4월 중순부터 사건이 굉장히 심각해진 다음에는 봉하 집필팀 활동도 잠시 중단돼 내려가지 않았다. 그리고 4월 30일 노 대통령께서 검찰 수사를 받고 온 다음에도 내려가지 못했다. 그러다 5월 초‧중순쯤 김경수 비서관한테 노 대통령께서 저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검찰수사가 일단락 됐으니 다시 글 쓰는 작업에 매달리려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달랐던 건, 5월 19일 전주 금요일인 15일이었을 거다. 평소와는 다르게 노 대통령께서 <성공과 좌절> 자서전 구성안을 회의실 맞은 편 스크린 화면에 올리시더라. 평소 당신께서는 아직 젊기 때문에 회고록은 가장 마지막에 쓴다고 하셨는데, 갑자기 왜 회고록에 담길 내용의 구성안을 이야기하실까 (의아했다). 그 전까지 집중했던 <진보의 미래>는 한국미래발전연구원(미래연)에 넘기기로 했다며, 이걸 보자고 하셔서 약간 뜨악했다.

(<성공과 좌절> 구성안을) 한번 보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5월 19일 봉하에 내려갔을 때 의견을 말씀드렸다. 이 정도 내용의 책이면 제가 기록한 것도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분량이 될 때까지 제가 쓰겠다고 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논의하면 힘드실테니, 그런 부담을 갖지 말고, 제가 어느 정도 분량이 될 때 가져올 테니 그때 다시 한 번 말씀하시는 걸로 하자고 했다. 그리고 오늘부로 집필팀은 해체하는 걸로 말씀드렸더니 (노 대통령께서) 그걸 동의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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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 그 전후로 이상한 낌새, 불안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나.
"힘들어하시긴 했지만, 노 대통령은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캐릭터이지 않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그걸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고, 때로는 날선 공격을 되받아치면서 자신을 지켜오신 분이라서, 능히 이겨낼 거라는 믿음이 워낙 강했다. (돌아가신다는) 그런 의심을 할 수가 없었다. 

5월 19일 봉하 집필팀을 해체할 때, '이제 대통령님은 뭐 하시지' 이런 걱정은 했다. 그날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의 보석 심리가 있던 날이었다. 대통령님 뵙고 나서 김경수 비서관과 봉하 식구와 함께 진영에 나가서 밥을 먹는데, 강 회장님 보석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통령님이 이 소식을 들으면 실망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때마침 기차 할인카드가 그 즈음 만료됐다. 이제는 (봉하에) 자주 내려갈 일이 없겠다 싶어서 새로 사지 않고 편도 기차표만 끊었다. 당시 이런 걱정은 들었다. 집필팀이 없으면 대통령은 누구랑... 물론 김경수 비서관이 봉하에 있긴 하지만, 집필팀처럼 글 쓰는 친구들이 곁에 있으면, 당신은 말하고 (집필팀은) 그 말을 받아적으면서 새로운 글을 창작하는... 

그게 당신이 살아가는 근거였는데. 굉장히 좋아했는데. 이거 없어졌는데 이제는 뭐를 갖고 소일을 하실까. (집필팀을 해체하면서) 그 부분이 가장 찝찝했다. 노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했다. 그때 집필팀을 해체하는 게 아니었나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필팀을 유지했으면, 이삼 일에 한 번은 사저로 들어와라고 해서, 두 시간 가량 이야기하면서... 그게 삶의 근거였던 분인데..."

"나 스스로 도망가고 싶었던 나약함... 그 자책감이 제일 컸다" 

- 2017년에 펴낸 장편소설 <오래된 생각>은 '팩션(faction)'으로 썼다. 그동안 여러 권 책을 펴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한 것 아닌가. 사실과 허구의 비율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기록>(2014년)에 쓰긴 썼는데, 그때는 단편적으로 다뤘다. 대통령 재임 중 이야기는 어느 정도 사실을 기반으로 썼다. 그래도 허구가 많다. (어림잡아) 사실과 허구가 4:6쯤 될까."
 
5월 23일이었다. 숫자를 보자 갑자기 노공이산이란 필명이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온 그는 내실의 컴퓨터를 켰다. 춘분도 두 달이 훌쩍 넘은 늦봄이라 새벽의 내실은 불을 켜지 않아도 사물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환했다. 그는 준비된 말들을 치기 시작했다. 다섯 시 이십일 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한글 신명조 13포인트를 선택했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몇 줄을 치고 나서 그는 잠시 멈추었다. 일단 마우스를 움직여 저장 키를 눌렀다. 다섯 시 이십육 분이었다. 첫 줄이 문서의 제목이 되었다. 그는 평소에도 첫 문장이 그 파일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첫 문장을 그대로 파일 제목으로 활용해야 내용도 파악하기 쉽고 검색도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써야 할 내용이 정리되자 그는 문장을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첫 줄 앞에 한 줄을 삽입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 <오래된 생각>에서 2009년 5월 23일 유서 쓰는 장면이, 마치 옆에서 본 것처럼 세세하게 묘사돼 있다. 그 부분을 쓰면서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것 같은데.
"대통령님 돌아가신 게 의외였지 않나. 왜 돌아가셨을까? 가까이 있는 참모들 가운데서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 추측이다. 마지막으로 남긴, 유일하게 남은 단서가 유서였다. 그래서 유서 작성 과정과 순서가 어떻게 돼 있는지 집중적으로 살펴 본 거다. 이 문장이 처음 쓰인 것이고, 두 줄은 첫 문장 썼고, 두 줄은 삽입된 거였구나. 이런 걸 발견하면서 가급적 자세히 묘사하자, 그런 생각으로 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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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은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는 돈과 권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과 글로 하는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은 말과 글을 무엇보다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겼다. 사진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윤태영 대변인. ⓒ 노무현재단

   
- 노무현 대통령 장례기간 동안 사실상 상주 역할을 맡았던 문재인 비서실장(현 대통령)도 그랬지만, 윤태영 대변인도 상당히 감정을 절제했다. 노 대통령께서 돌아가신 게 믿어지지 않아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슬픔을 참은 것인지.
"사실대로 말하자면 울고 싶은데 눈물이 안 났다. 그 상태를 어떻게 말해야하는지 저도 잘 모르겠다. 옆 사람들은 울고 있어서, 나도 울어야 하는데... 슬프거나 황당하거나 이런 것들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문재인 대통령은 차분하고 침착했던 것이지만, 나는 그 상황 자체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입관식 하기 전에 대통령님을 마지막에 뵀을 때도 눈물이 안 났다. 꿈같은 장면에 나도 가서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 눈물을 흘린 건 49재 지나고 나서 안장식 한 날, 그날이었다."

- 그때 많이 울었나.
"아무도 없을 때 펑펑 울었다. 그날 서울에 올라가야 했는데,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마치고 정철(양정철 비서관)이랑 노 대통령 묘역에 가서 마음 놓고 울었다. 정철이도 그 전까지 마음놓고 울지 못했다. 정철이가 (감정이) 그랬던 건... 2008년 말에 사태가 어려워지니까 (노 대통령께서) 집안에 갇혀 지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들 내려오라고 하셨다. 

저는 당연히 포함되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누가 가지? 몇 명이 만나 회의를 했다. 생업이 있어 사정상 못 내려갈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정철이가 같이 내려가자며 총대를 멨다. 저는 그때 힘들어 하는 상황이었는데, 정철이가 중심을 잃지 않고 주도적으로 일을 했다. 봉하에 계속 머물면서 주말에도 안 올라가고."

- 당시 노 대통령의 서거를 받아들이기도 힘들었을 텐데. 사회·정치적인 상황에 떠밀린 죽음이었고. 그러한 분노와 화를 어떻게 다스렸나.
"분노하고 화난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제일 큰 건 자책감이었다. 봉하 집필팀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 도망가고 싶었던 나약함이 있지 않았었나, 그런 자책감. 대통령님이 그런 모임(집필팀)을 하고 유지하는 걸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나도 한편으로는 빨리 해체하고 글 쓰는 거에 집중하려고 했던, 그런 나약함이 있지 않았나. 그런 나에 대한 자책이 굉장히 컸다. 집필팀을 계속 유지했으면, (노 대통령께서) 그런 선택을 하는 걸 제어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자책감이 워낙 커서 그게 힘들었다. 2009년과 2010년에는 술을 많이 마셨다."

- 노 대통령 서거 이후 마음은 물론 몸도 많이 안 좋았던 걸로 아는데.
"(마음이) 힘들다보니 잘 못 마시는 술에 의지하게 되고... 술이 깨기 싫어서 깨면 또 마시고...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병이 생겼다. 지주막하 출혈이라고 뇌출혈로 중환자실에 2주일 가량 입원했다. 그게 2011년 2월이다.

퇴원한 다음에 별다른 치료가 있었던 건 아니다. 머리를 열었던 수술도 아니고, 뇌출혈은 멎었으니까. 그런데 뇌압이 심해 후유증이 있었다. 그 후유증을 이겨내느라 파주의 산 밑에 가서 2년을 지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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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 몸이 안 좋아 몇 년 동안 '칩거 아닌 칩거'를 했다. 그런데 당시 몸도 몸이지만, 마음을 크게 다쳐 스스로를 세상과 동떨어진 동굴 안에 가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윤태영, 잘한 거 하나도 없다'. 사람들 앞에 나설만큼 당당한 것도 없고 잘한 것도 없어서... 그런 생각이 나를 지배했던 것 같다. 정권이 바뀌면서 상황도 안 좋아졌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아프고. 그때 3년은 힘들었다. (노 대통령) 이야기 나올 때마다 자책감이 들었고."

- 당시 사람들을 거의 안 만났나.
"파주 산 아래 살 때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2년 대선 때 문재인 캠프에는 몇 번 왔다갔다 했다. 후보 수락연설을 고쳐드리고 했다. 그 때 이후에는 다시 또 안 나왔다. 그때 여의도 후보 사무실에 몇 번 왔었는데, 실행력 있는 일을 안 하고 있으니 꼰대같은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원고 쓰는 일은 집에서도 할 수 있으니 집에서 실무적으로 (문재인 후보와 관련된) 원고 데스킹을 돕겠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 노 대통령이 서거한 뒤 처음 펴낸 책이 '윤태영 비서관이 전하는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기록>(2014년)이다. 이 책을 계기로 '윤태영의 동굴' 안에서 빠져나온 것인가.
"아픈 동안에, 파주 산 아래에 살 때 다큐멘터리 분량의 글을 2000매 가량 이미 써 놓은 게 있었다. 기억력이 떨어지기 전에 써놓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다큐가 재미는 없다. 써놓고보니 글 전체를 끌어가는 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터에 노무현재단에서 노 대통령에 관한 일화를 연재하자는 제안이 왔다. 다큐로 정리해둔 글과 대통령 재임 중 일화 등을 뽑아서 펴낸 게 <기록>이다.

<기록>을 펴낸 뒤에 <오마이뉴스>에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그렇게 실린 글이 반응이 좋았다. 그때 '아, 노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구나. 내가 할 일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책도 펴냈기 때문에 재단의 권유를 받아 부산, 광주 등 지역 강연에도 내려갔다. 노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해주더라. 네 차례의 지방 강연을 하면서 그 분들로부터 제가 기를 많이 받았다."

- 2014년 <기록>부터 얼마 전에 펴낸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까지 6년 동안 7권의 책을 펴냈다. 책의 주제는 딱 두 가지다. '노무현' 또는 '글쓰기'. 그 기간 동안 한시도 노무현을 놓지 않고 있었던 셈인데.
"그렇다. 어떻게 보면 노 대통령의 부재를 못 느낀다 싶을 정도로 노 대통령의 말 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어젯밤 꿈에도 노 대통령이 나왔다. 책을 쓰는 것 자체가 대통령의 말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 책을 쓰는데 몰입하면서, 글쓰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 치유가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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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복심(腹心), 노무현의 입, 노무현의 필사라고 불렸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5월 13일 그의 집필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오른쪽 카메라를 든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속 사진가였던 장철영 전 행정관. ⓒ 김진석

 
- 윤태영은 노무현의 복심(腹心), 노무현의 입, 노무현의 필사로 불렸다. 영화로 치자면, '노무현의 페르소나'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세간의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워낙 큰 그릇이다 보니, 제가 그 분을 대변한다고 할 수도 없고. 지금도 노 대통령 관련 기록을 정리할 때마다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 노 대통령 관련 책을 낼 때마다 '대통령을 가장 옆에서 지켜봤다는 사람이 쓴 책인데 막상 사람들이 이 책을 안 찾으면 어떻게 하지', 이런 부담을 느낀다. 자부심과 부담감, 부족함을 함께 느낀다."

- 참여정부 당시 무쇠로 만든 로봇처럼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해서 주변에서 윤태영 대변인을 '마징가제트'라고 불렀다는 얘기를 들었다.
"참여정부 막판에 연설기획비서관을 하다가, 다시금 대변인을 겸임하면서 (농반진반) '마징가제트'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두 번째 대변인할 때는 상대적으로 쉬웠다. 참여정부 초기 대변인을 처음 맡았을 때는 (노 대통령의) 완전한 측근은 아니었다. 이광재나 안희정 급은 아니었다. 대통령께 스스럼없이 여쭤볼 수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때로는 대통령밖에 모르는 일인데 야당에서 문제제기를 하면, 대통령께 직접 여쭤보지 못하고, 비서실장이나 수행비서 등을 취재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부속실장을 거치고 연설기획비서관을 거치면서 하루종일 대통령과 함께 지내다 보니 여쭤보는 게 편해졌다. 대통령 생각을 알 수 있고, 물어볼 수 있고, 유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니까 대통령의 생각을 대변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노 대통령, 글로 쓰인 것에 굉장한 가치 부여"

- 노무현 대통령은 그 어느 대통령보다 말과 글을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그런 분이 왜 참여정부 초기에 윤태영을 대변인으로 썼다고 보는가.
"그게 저도 미스터리였다. 저에게 왜 대변인을 맡겼을까? 게다가 숫기도 없었는데. 노 대통령께서는 글 쓰는 사람을 높게 평가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30점에서 50점 정도 가산점을 준 셈이다. 그만큼 글을 쓰는 사람을 굉장히 아끼고 존중했다. 

저를 대변인으로 선뜻 임명해준 것도, 당신이 말씀은 잘하니까, 대변인이 화려하게 나와서 말을 잘하는 사람보다는 당신이 한 말을 글로 잘 정리할 사람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대변인이 촌철살인보다는 당신이 길게 말을 하면, 잘 정리해서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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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 참여정부 당시 윤태영은 언론으로부터 '돌려막기 인사'의 대명사로 지목됐다. 왜 노무현 대통령은 윤태영을 놓아주지 않고 계속 데리고 있었다고 보나.
"노무현 대통령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한 분이다. 당신께선 말로 세상을 바꾸는 것과 글로 세상을 바꾸는 것, 두 가지 수단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지금은 미디어 환경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만 해도 말은 일회성이었다. 반면에 글은 책 등으로 연속성을 갖고 있었다고 여겨졌다. 책을 읽고 사법시험을 치고 인권변호사가 되다보니, 책에 대한 집착이 굉장히 강했다. 글로 쓰인 것에 굉장한 가치를 부여했다. 

깨어있는 시민을 만드는 것도 말보다는 글과 책이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글을 쓸 수도 없다는, 유서에 나온 말씀도 그만큼 절박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글을 쓰는 참모의 위치였다. <여보, 나 좀 도와줘> 책을 펴낼 때, 절반 가량은 제가 구술을 받아 정리했다. (3당합당 이후 꼬마민주당 등) 정치 역정을 지켜봤다. 당신의 역사와 배경을 알고 있으면서 글을 쓰는 친구니까, 당신의 일거수일투족과 행적을 남기기엔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본 것 같다."

- 윤태영 대변인은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들로부터도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가장 잘 읽어내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어떻게 그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잘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다. 저도 일반적인 상식에 의거해 판단하고 추론하는 편이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좀 다르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정세나 상황을) 읽는 수가 깊다. 바둑으로 치자면, 다른 사람들보다 아홉 수나 열 수는 더 내다보는 것 같다. 제가 방명록 초안을 올려드려도 그대로 기록을 남긴 적이 거의 없다.

(제가 쓴 초안은) 거의 다 '엑스(X)'였다. 노 대통령 본인은 막판, 서명대 갈 때까지 고민을 하고, 현장 분위기도 보면서 새로운 문구를 만든다. 제가 올린 초안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는데 도움이 될 수는 있었겠지만, 그대로 적지는 않으셨다. 게다가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15분짜리 동영상 촬영을 하면 다시, 다시... 그렇게 서너 시간은 걸렸다."

- 노무현과 윤태영은 스타일이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조선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하지 않을 정도로 호불호가 명확했다.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에도 보수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많이 받았다. 반면에 윤태영 대변인은 큰 구설도 없었고, 보수언론 기자들로부터 원성도 듣지 않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때부터 언론과 각을 많이 세웠다. <조선일보>와 각을 많이 세웠다는 건, 그만큼 언론의 역할을 굉장히 중요하게 본 거다. 언론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여론이 확확 바뀐다는 걸 굉장히 의식했다. 대변인 출신인 저를 부속실장을 맡기며 지근거리에 둔 것도, 언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런 여론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언론과) 각을 세웠다는 건, 언론의 동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웠다는 거다. 그런 흐름을 알려고 굉장히 노력한 거다. 대변인을 하면서, 한번은 내가 적격이 아닌가보다 생각해서 사표를 낸 적이 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안 맞는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자네가 잘하고 있으니 그대로 열심히 하라'고 하시더라. 기본적으로 대변인은 기사를 공정하게 배분하는 서비스업인데, 그런 면에 충실하다고 인정해주신 것이다."

- 윤태영 대변인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전화를 잘 받고, 못 받으면 반드시 '콜백'하는 걸로도 유명했는데. 
"(가급적 전화를 받고, 못 받으면) 콜백을 했다. 대변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오보를 방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보가 나가면 사후 처리가 너무 힘들다. 총력을 다해서 오보를 막자는 생각을 했다. 오보를 막아도 표시가 안 나니까 잘 했다고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뚫려서 오보가 나면 욕을 먹는 자리가 대변인이다. 중요한 사안은 먼저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서 설명해준 적도 있다. 기자들 입장에서도 오보를 안 내는 게 좋은 일이니까."

☞ [10주기 심층인터뷰 ②] "노무현은 제 인생의 절반... 윤태영의 정치? 고민중이다" (http://omn.kr/1jc01)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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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복심(腹心), 노무현의 입, 노무현의 필사라고 불렸던 윤태영 전 청와대 대변인이 5월 13일 그의 집필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김진석

#윤태영 #윤태영대변인 #노무현 #노무현대통령 #노무현10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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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대한 기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람보다 더 흥미진진한 탐구 대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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