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정 죽던 날, 소설가 윤정모가 백병원에서 본 이상한 것들

[딸이 묻고 엄마의 삶이 답하다 ②] 1991년 봄은 젊음이들의 죽음으로 아팠다

등록 2019.05.21 08:08수정 2019.06.03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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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영정을 들고 있는 학생1991년에 명지대 1학년 강경대 학생이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다. ⓒ (주)해밀픽쳐스

 
1991년 4월 26일 노태우 집권 4년 차 명지대학교 1학년 강경대가 죽었다.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한 강경대는 경찰과 대치하던 중 시위자를 검거하기 위해 교내로 진입한 사복 경찰관인 백골단을 피해 정문 옆 허물어진 담장을 넘으려다 경찰에 붙잡혀 그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무자비하게 폭행당하고 방치되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학생들에 의해 즉시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한 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그즈음은 유난히 씁쓸했다. 1987년 유월항쟁이 끝나고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정권을 바꾸지는 못했다. 김대중·김영삼씨가 단일후보로 나오지 못했고 이듬해인 1988년 선거에서 노태우가 36.3%의 지지율로 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노태우는 전두환과 다를 게 없었다. 군부독재의 쌍둥이 형제인데 선거에서 당선까지 되었으니 오히려 더 활개를 쳐도 정당하다는 식이었다. 부정부패는 심해졌고 강경 진압은 더 과격해졌다. 많은 젊은이가 분신·투신하며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젊은이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오로지 시대에 대한 고민의 반영이었어. 개인의 이익에 대한 틈은 전혀 없었어. 그 엄혹한 시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고, 그때는 자신들의 죽음만이 불씨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거야."

엄마 윤정모 작가는 젊은이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날 때마다 장례위원이나 진상조사위원을 도맡아했다.

'토끼몰이' 진압에 스러진 꽃다운 목숨

1991년 5월 25일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엄마를 따라 집회를 나갔다. 그날은 서울 각지에서 가두행진을 하다 퇴계로로 집회인파가 모여 마무리를 할 예정이었다. 퇴계로 대한극장 넓은 대로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은 '폭력살인 민생파탄 노태우정권 퇴진을 위한 3차 국민대회'라는 이름으로 전경, 백골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백골단은 하얀 헬멧을 쓴 사람들이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람들이 제일 무서웠다. 이들은 속도가 무척 빨랐다. 집회하는 사람들을 잡아내 머리채를 잡고 곤봉으로 죽어라 때리며 짓밟곤 했다. 하지만 그날따라 백골단은 가만히 있었고 우리도 마무리짓고 집으로 갈 마음의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가만히 있던 그들이 예고도 없이 빠르게 달려들었다. 백골단이 뛰어들자 전경들이 방패로 바닥을 '턱, 턱, 턱' 찍으며 빠르게 진압해왔다. 수만 명의 시민들은 혼비백산했다. 도망칠 곳은 퇴계로의 오래되고 좁은 골목들, 그 안의 오래된 저층 건물들뿐이었다. 저들은 밀리는 사람들 위로 최루탄을 계속 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한꺼번에 좁고 어두운 곳으로 도망가다 보니 앞쪽에서부터 사람들이 무너졌다. 그 위로 넘어지고 포개지고 깔렸다. 이제 내가 넘어질 차례였다.

'잡아! 잡아 기둥을!"

사람들이 한 팔로 기둥을 감고 다른 한 팔로는 우리들의 허리를 감았다. 다리는 허공에 떠있고 팔은 허우적거리는 우리의 허리를 사람들이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 다행히 더는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건물 안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골목에서 넘어져 다친 사람, 전경의 방패에 등이나 어깨가 찢어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말 그대로 '토끼몰이 방식'의 진압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존엄성은 무너졌다.

'시신탈취' 백골단에 맞서 김귀정을 지키다
 

성균관대생 김귀정꽃다운 나이, 잃어버린 생 ⓒ 김귀정 추모사업회

 
"학생이 크게 다쳤대요." 

사람들 사이에 학생이 크게 다쳐 백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 길로 엄마는 나를 집으로 보내고 백병원으로 향했다. 몇 시간을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25세 성균관대 불문과 여학생 김귀정이 죽었다는 소식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왔다. 직감했다. 엄마는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엄마는 장례식장을 지켰다. 정부 쪽에서 시신을 빼돌리려 기습적으로 진압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에 잠시도 방심할 수 없어 시민들과 학생들은 밤을 새우며 자리를 지키곤 했다. 

"시신 탈취하려는 그들의 시도는 기상천외했지. 환자인 것처럼 꾸며 엘리베이터를 각자 타고 올라와 달려들기도 했고 모두가 피곤한 새벽 시간에 들이닥치기도 했어. 한번은 시위대로 가장해 들어오기도 했어. 정말 필사적으로 막아냈지. 귀정이가 엄청난 최루탄 세례와 토끼몰이로 인해 죽었다는 사실을 부검을 통해 알리지 못하면 억울한 죽음이 될 거로 생각했어. 그리고 비참하잖아. 목숨까지 잃었는데 시신까지 농락당하게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고 김귀정 열사를 기억하는 대학생들1991년 봄은 젊음이들의 죽음으로 아팠다. ⓒ 윤솔지

 
나는 지금도 사람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얘기하는 사람들이 싫다. 그렇게 말하면 왠지 나중에 더 큰 벌로 돌아올 것 같아서다. 그런데 저들은 어떤 생각으로 시신을 탈취하겠다고 달려들까? 몇 년 전 백남기 어르신이 물대포에 돌아가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는 시신을 탈취하려는 박근혜 정부에 맞서 서울대 병원에서 어르신을 지켰다. 시대가 지났음에도 그런 일들은 반복되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또 생길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옆에서 사람이 고문받아 죽어 나가는데도 자기들은 짜장면 먹으면서 자식들 입시 걱정하더라고. 그들한테 이건 그냥 일이야. 벌어 먹고사는 일. 귀정이 때는 심지어 백병원 뒤뜰에 사람 한 명이 죽어있었어. 경고였어. 시신 내놔라. 빨리 처리하자. 안 그러면 사람이 계속 죽어 나갈 것이다. 다행히 곧 공식 부검을 했고 죽음의 가속화는 그렇게 멈췄어."

김귀정 열사의 사인은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결론 내려졌고 18일 만에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됐다. 그렇게 1991년 봄은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아팠다. 무엇을 바꾸자는 희망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제 막 중학생이 된 나는 친구들을 사귀는 것이 힘들었다. 친구들은 현진영이랑 공일오비(015B)를 이야기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가수는 김광석이나 노래패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거리에서 사람이 죽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학교 안의 생활과 생사를 오가는 학교 밖의 전혀 다른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관련기사] 
윤정모가 기억하는 80년 광주 "화곡동 작은 방에 수배자들이..." ☞ http://omn.kr/1j7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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