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워주고 입혀줄테니..." 명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 한명순 명창 인터뷰 ①

등록 2019.05.26 15:49수정 2019.05.26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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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인 종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600여 년 동안 문화의 역사를 일궈온 유서 깊은 도시입니다. '종로의 기록, 우리동네 예술가'는 종로에서 나고 자라며 예술을 펼쳐왔거나, 종로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이 시대의 예술인들을 인터뷰합니다.[편집자말]

한명순 명창 ⓒ 한명순 소리예술원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발달한 민요나 잡가를 일컫는 '서도소리'는 소리의 발원지인 북한에서도 이미 그 명맥이 끊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단 이후 71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통일의 봄을 기다리며 한명순 명창은 노래한다. 전수받은 소리를 전함에 그치지 않고,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다. 옛 소리 복원을 통해 과거의 얼을 오늘에 되살리고, 후학 양성에 매진하면서 전통이 후대에 이어질 수 있도록 '소리의 길'을 닦아나가는 그녀를 지난달 22일에 만났다. 

올곧은 길로 이끌어준 은사와의 만남


"우리 때만 해도 '얘는 이거 아니면 할 게 없어!'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람들만 이 길을 갔어요.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있던 시대가 아니었죠. 요즘은 학원도 있고, 지역 내 문화센터에만 가더라도 소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만요."

충남 청양에서 5남 2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던 그녀는 일찍부터 노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는 칭찬을 들으며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아버지가 광부셨는데 시조나 노랫가락을 그럴싸하게 잘 읊는 한량(閑良)이셨어요.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그 영향을 자연스럽게 받지 않았나 싶어요. 제가 4살 되었을 무렵부터 한복 입혀서 업고 다니면서 소리를 시키셨대요. 친척들도 그렇고, 동네 사람들도 저만 보면 유행가나 민요를 불러달라고 하곤 했죠."

초등학교 졸업 이후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학업을 지속하기 어렵게 되자, 집안 농사일을 도우며 가수의 꿈을 키워가게 된다. 마땅한 학원이나 교재가 없던 시절, 그녀가 가진 유일한 스승은 라디오였다. 방송을 타고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기 때문이다. 가수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하다 떠올린 것도 라디오였다. 1975년 9월, KBS 라디오 프로그램 '민요백일장'의 공개방송에 참가한 그녀는 <매화타령>을 불러 2등상인 인기상을 받는다.

이때 그녀를 눈여겨 본 사람이 있었으니,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인 김정연 명창이었다. 후계자를 애타게 찾던 김 명창에게 그녀는 될성부른 떡잎임에 틀림없었다. 김 명창은 자신의 곁으로 온다면 먹여주고, 재워주며 학교까지 보내주겠노라 말하며, 부모가 허락한다면 편지를 쓰라고 명함을 건넨다.


때마침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 없던 그녀는 반대하는 가족들을 설득해 김 명창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명창은 당시 귀했던 브리샤 승용차를 타고 서울에서 청양까지 내려온다. 제자를 맞이하기 위해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셈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스승의 차에 올라탔고, 그날 이후로 고된 서울살이가 시작됐다.

"선생님 몸종이나 다름없었죠. 빨래부터 시작해서 청소, 버선 다리기, 동정 달기, 선생님 어깨 주무르기 등의 일을 다 해내야했으니까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돌아갈 수도 없고, 아는 것이라고는 소리 밖에 없으니 꼼짝없이 따를 수밖에요. 선생님은 노래뿐만 아니라, 소리꾼으로 갖춰야 할 예의범절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가르치셨어요. 특히 서도소리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자로 된 가사가 많은 만큼, 천자문도 공부하게 하셨고요."
 

왼쪽 이문주, 오른쪽 한명순, 중앙 박은혜 함께 놀량사거리 부르는 사진 ⓒ 한명순 소리예술원

 
스승의 혼과 소리를 모조리 체화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거듭하는 동안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런 그녀의 정성과 실력에 감탄한 이가 또 있었으니, 한 집에 같이 살던 김 명창의 친언니 김수영 선생이었다. 호를 죽사(竹史)라 했던 김수영은 서도 송서의 일인자로 당대에 이름을 널리 날린 인물이었으나, 그녀 역시 적당한 후계자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참이었다. 남다른 재능을 알아본 김 선생에게 '추풍감별곡'을 배우게 되지만, 행여나 아끼는 제자를 뺏길까 염려했던 김 명창의 견제로 인해 완벽한 습득은 어렵게 된다. 때문에 그 소리는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완성하게 된다.

근엄한 스승의 곁에서 난해하기 짝이 없는 서도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답답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을 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스승은 그녀를 찾아냈고, 번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철이 없어서 선생님의 깊은 뜻을 다 헤아리기 어려웠어요. 툭하면 그만두겠다고 반항하고 했으니까요. 소리를 놓지 않고 계속 하다보니까 '이 길이 정말 내 숙명이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게 제 나이 서른일곱 즈음이에요."

"평생 배워도 부족한 게 소리"
 

한국민속예술축제 놀량사거리팀 대회출전 사진 ⓒ 한명순 소리예술원

 
점점 소리의 깊이를 더해가던 그녀는 1986년 전수 장학생을 끝내고, 서도소리 이수자가 된다. 그러나 한 가족처럼 같이 살자고 했던 스승이 당뇨와 갑상선암으로 인해 다음 해에 유명을 달리하면서 큰 충격에 빠진다. 깊이를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슬픔이었다.

스승을 잃고서야 비로소 그 높았던 존재감을 통렬하게 깨닫게 된 그녀는 소리를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1993년, 선배 김광숙 명창의 제의로 다시 서도소리의 세계로 복귀하게 되면서 오랜 방황도 끝을 맺게 된다. 바로 그해 국악협회의 경연대회에 출전해 <초한가>로 3등을 거머쥔 데 이어, 1999년 '경기국악제'에서 서도좌창 <공명가>를 불러 서도소리로서는 처음으로 대통령상을 받는 영예를 안는다.

이후 2009년 10월, 서도입창 <놀량사거리>로 '황해도 무형문화재 제 3호 보유자'로 인정받으면서 지난 고생의 시간을 보답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재 보유자라는 타이틀이 그녀에게 휴식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

"평생을 배우고, 파고들어도 부족한 게 소리예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25년~30년간 열심히 공부하고, 인생의 맛도 어느 정도 봐야 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짜 소리가 나오거든요. 그전에 했던 건 설익은 애들 소리고, 전성기가 지나간 이후에는 체력 저하로 인해서 음정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이게 소리구나!' 하고 알 만하면, 소리가 안 나오는 경우가 많죠. 오랜 시간 동안 소리에 정성과 노력을 바쳐도 최상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은 한없이 짧다는 게 슬프지요."

스스로의 예술세계를 닦으면서도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종로에서 '한명순 소리예술원'을 운영하면서 후학들이 보다 쉽게 소리의 세계를 터득할 수 있도록 이끌어왔다.

"저 어릴 때는 발성법을 따로 배운 적이 없었어요. 제 위 선생님들도 도제식으로 배웠기 때문에, 가르칠 때도 '무조건 이대로만 하면 돼!' 하는 식이었죠. 그러니 헤맬 수밖에요. 3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발성법을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어려서부터 절대음감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어떤 소리를 듣던 간에 금방 제 걸로 만들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소리를 만난 거예요. 제가 한 번 파고들면 끝장을 보고 마는 외골수거든요. 그렇게 2년 정도를 매달려서 연구하다 보니까 발성법을 깨우치게 된 거예요. 전혀 소리가 안 되는 사람도 의지만 있으면, 어느 정도 가능하게끔 발성법을 정리했어요. 이제는 무작정 따라오라는 말은 안 통하는 시대잖아요. 인터넷으로 검색만 해도 모든 소리들이 다 나오니까요. 그만큼 구체적인 방법론과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게 중요하죠."

 

故김정연 선생님 100주기 기념공연 때 제자들과 좌창하는 모습 ⓒ 한명순 소리예술원

 
그녀는 제자들을 대할 때마다 항상 자신을 올곧게 이끌어주었던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스승이었던 세 명창(김정연, 김수영, 장학선)의 제사를 10년 넘게 지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열다섯에 상경해서 김정연 선생님과 살을 맞대고 살았으니 한 가족이나 다름없죠. 충청도 사투리보다 이북 사투리가 더 정겹게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 나중에 김정연 선생님의 따님을 수소문해 찾으니 돌아가신 이후였고, 손자 내외가 일본으로 출국하며 선생님의 묘를 파서 화장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김수영 선생님과 장학선 선생님은 자식도, 제자도 없이 외롭게 돌아가셨으니까 한날에 세 분 합동으로 제사를 지내요. 선생님 떠나신 지도 벌써 32년이나 흘렀으니까 기억도 가물가물하죠. 바쁘게 살다보면, 옛 시절의 추억들도 세월 따라 흘려보내기 쉽잖아요. 그런데 기일이면 제자들과 다 같이 모여서 선생님의 살아생전 모습도 떠올려볼 수 있고, 소리까지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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