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만든 '지도'가 있다

[노무현 서거 10주기] <진보의 미래>를 읽고 '정치교육'의 부재를 느끼다

등록 2019.05.22 18:57수정 2019.05.22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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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진보의 미래' 표지. ⓒ 돌베개

 
노무현 대통령의 책을 처음 읽었다. <진보의 미래>라는 제목조차 낯선 책을 받아보니, 그가 쓰려다가 마치지 못한 책이었다. 임기를 마치고 고향 땅에 정착한 전직 대통령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해보려 한 거대한 프로젝트. 국가란 무엇이며, 국가 정책에 있어 진보와 보수의 차이 그리고 우리가 바라봐야 할 방향은 어느 쪽인지... 본질적이고 어려운 질문들에 대해 방대한 조사를 통해 답하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피에르 바야르 파제8대학교 교수에 따르면, 사실상 우리에게 '읽지 않은 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든 소통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우리는 책에 대해 어떤 이야기든 접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순백의 상태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은 없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우리가 조금도 알지 못하는 미지의 책은 없다. 그래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한다.

나는 작가 노무현의 책을 하나도 읽지 않았지만, 인간 노무현에 대해서는 무지하지 않다. 그가 대통령이던 시절을 살았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은 물론 그의 삶을 다룬 다큐 영화를 여러 편 봤고, 대학을 나오지 못한 인권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떠나는 것도 지켜봤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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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 직후인 2008년 4월 봉하마을을 방문한 울산 노사모 회원들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노무현 대통령.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 땅에 농가를 짓고 살았다. 그를 보러 온 사람들 앞에서 즉석연설을 하기도 했다. "무슨 말씀을 드릴까요?" 하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아이들 교육 이야기와 함께 '먹고사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했다고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듣고, 반응을 보이는 이야기는 '먹고사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먹고사는 이야기를 한다. '먹고산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 - 본문 45쪽 중​

그런데 먹고사는 이야기와 아이들 교육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우리가 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보면, 대체로 아이들의 능력 개발에 관한 건데, 이건 경쟁력을 의미하는 것이죠. 아이의 경쟁력을 강화해 주면 아이들의 행복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게 노력하고 경쟁하는 것이 상당히 고통스러운 것임에도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를 만들려고 사람들은 노력하고 있지 않습니까?" - 본문 163쪽

유시민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일하고, 놀고, 사랑하고, 그리고 연대하는 것'이 행복한 삶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경쟁에서 이기는 삶이란 결국 연대가 빠진 삶이다. 유시민의 정의에 의하면 행복하기 어려운 삶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보자. 그는 경쟁에서 이겼다. 대단히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결국 변호사로서 성공하고 부와 명성을 쌓았다. 하지만 그는 부당한 공권력에 희생되는 청년들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연대하는 삶을 택한 것이다. 경쟁에서 이기고, 남들보다 더 즐겁게 일하고 놀고 사랑하는 삶, 그것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은 경쟁에 이기는 것만으로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연대의 가치를 아는 삶과 모르는 삶의 차이는 행복함에 있어 어떤 차이를 가져올까? 그렇다면, 국민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 국가의 존재 의의에 관해서라면 분명한 한 가지 진실이 있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강호가 말한 것, 우리나라 헌법 제1조 제2항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국가란 국민이다.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대개 지금 현재 합의된 부분이 있고 합의 안 된 부분이 있어요. 결론이 모아진 부분이 있고 결론이 안 모아진 부분이 있는데 결론이 얼추 모아진 부분이 뭐냐 하면 '국가는 국민에게 봉사하는 도구다'하는 것이죠." - 본문 170쪽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경쟁을 통해서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더 나은 상태에 있는 것을 행복이라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아이들이 정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담을 높게 쌓았던 키다리 아저씨는 결국 행복해졌나?

국가가 국민에게 봉사하는 도구이고,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행복한 삶이라고 한다면, 국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가에 관해 사람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생각은 갈리기 마련이다.

진보는 분배, 보수는 성장이라는 이분법은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낙수 효과'와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양 진영을 대표하는 두 단어가 그 복잡성을 그대로 드러내지 않는가. 낙수효과란 성장이 우선시됐을 때 분배가 따라온다는 의미고, 소득주도성장이란 분배를 통해서 성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말이다. 음과 양이 직선이 아니라 곡선으로 나눠지듯, 진보와 보수는 적대의 개념이 아니라 가치의 우선순위에 관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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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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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 시민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노란 풍선과 ‘새로운 노무현’이라고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저자 노무현은 책속에서 꾸준하게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라는 문제에 집착한다. 저자는 왜 진보와 보수를 구분하려 하는 것일까? 책을 읽는 중에는 이해하기 어렵던 이 고집을 나는 책을 읽고 나서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언론은 정치적 중립성을 당연시한다. 하지만 정치적 중립성이란 누구나 지켜야 하는 철칙이 아니다. 언론, 공무원, 군인 등 일부 직종에게만 요구되는 것이다. 유튜버 유시민은 자신에게 왜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냐면서, 자신은 중립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신념의 자유는 헌법 제19조에 의해 보장되는 자연권이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편가르기가 아니다. 내 양심이 어느 쪽을 지향하는지 분명히 하려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국가가 무엇을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부를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보면 진보와 보수의 구분은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의 내용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아직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의 구분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이 책에 등장하는 '신자유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깨달았다. 똑같은 회색이라도 보는 사람에 따라 희게도 검게도 보이는 법이다.

신자유주의. 내가 가장 혐오하는 단어 중 하나다. 자유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으로는 모자라, 이제는 '새로움'이라는 개념마저 오염시키려는 단어. 신자유주의란 보수를 부르는 다른 이름이라고만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는 신자유주의를 진보의 변용으로 볼 수도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보수의 변용으로서 신자유주의는 최소한의 복지를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진보의 변용인 신자유주의는 '현실과의 타협'이다. 회색이라는 색깔은 밝아진 검은색이기도 하지만 어두워진 흰색이기도 한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결국 회색분자다. 중도적 진보나 중도적 보수에게는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모르나, 더 왼쪽이나 오른쪽에 선 사람들에게는 사이비일 뿐이다.

2019년 최저임금은 시간당 8350원이다. 지난해보다 11%나 올랐다고 우려하는 시각도 있고, 1만 원 목표를 포기했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최저임금 8350원은 진보, 보수 누구에게도 만족스럽지 않다. 보수주의자는 최저임금이라는 제도 자체가 존재하고, 그게 또 지난해보다 11%나 올랐다는 사실에 분개한다. 진보주의자는 생활임금으로 가는 최소한의 보루를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완성된 책 아닌 <진보의 미래>

타산지석이란 말을 난 참 좋아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내가 실천하기에 이 개념은 참으로 멀다. 진정한 진보라면, 저쪽의 입장에서, 그러니까 보수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서도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를 다른 방향에서 관찰하지 못한 것은 내 상상력의 경계가 지독하게 좁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이렇게 깨달음을 던져주는 책이야말로 참스승 아닐까.

<진보의 미래>는 완성된 책이 아니다. 진보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어떤 연구와 조사를 해야 할지 적어본 메모 모음이다. 이 책이 완성됐다며 아마 1000쪽은 됐으리라. 

이 책은 '지도'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지,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 역사의 진보를 위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10주기라서가 아니라,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위에 우리가 서 있는 지점이 바로 그렇다.

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노무현 지음,
돌베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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