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아빠와 새엄마 피해 거리로... 여성 홈리스의 고백

['보이지 않는' 여성 홈리스의 이야기 ①] 가출-노숙-쪽방으로 이어진 소라씨의 기구한 삶

등록 2019.05.30 09:25수정 2019.05.30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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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여성홈리스들의 이야기를 알리고자 합니다. 그녀들이 더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기자 말

"임대주택으로 이사하면 욕실이 있으니 자주 씻을 수 있어요. 그동안 듣고 싶었던 복지관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해서 듣지 못했거든요."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말한다. 이소라(38, 가명)씨는 12년째 쪽방에 살고 있다. 쪽방은 거리 생활 후 얻은 소라씨의 유일한 공간이다. 약 1.5평의 규모로 어른 두 명이 누우면 꽉 차는 공간이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런 그녀가 곧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한다며 행복한 표정으로 나에게 자랑을 한다.

그녀는 어쩌다 노숙 생활을 하게 됐을까. 4월 24일 오후 6시, 서울시 용산구 동자동 새꿈 어린이 공원에서 소라씨를 만났다.

엄마의 부재와 아빠의 재혼... 노숙 생활의 시작
 

인터뷰하고 있는 이소라(가명)씨. 소라씨는 "아직도 거리에는 노숙하는 여성이 있고 노숙하는 장애인이 많아요.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며 얼굴 공개를 원했다. ⓒ 문세경

 
"제가 어릴 때 엄마가 몸이 매우 아프셨어요. 결국 중학교 2학년 때 돌아가셨죠. 당시에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걸 바로 알지 못했어요. 엄마가 당신의 죽음을 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대요. 장례식이 끝난 후 외할머니가 말씀해주셔서 그때 알았어요. 충격이 컸지만 견뎌야 했어요. 저보다 9살 어린 여동생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얼마 안 돼 새어머니가 오셨어요. 4년 정도 함께 살았는데 참 힘들었어요. 갈등의 골이 깊어져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마치고 자퇴를 했어요. 그리고 집을 나왔죠. 집을 나와서 무작정 간 곳이 고속버스터미널이에요."

소라씨의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새어머니를 집으로 들였다. 새어머니는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부터 아버지와 만나던 분이었다. 소라씨는 엄마의 부재와 아버지의 행동 때문에 새어머니에게 정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마음 둘 곳이 없던 소라씨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인천에서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왔다갔다 했다. 집에 갈 시간을 놓쳐 고속버스터미널이 있는 지하도에서 잠을 청한 것이 노숙 생활의 시작이었다. 한겨울 추위를 견디기 힘들 때면 고속버스터미널 5층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새벽 예배를 본다는 핑계로 잠을 청했다.


가출로 돈 한 푼 없던 소라씨는 지하철비를 어디서 마련했을까. 소라씨는 4살 때 소아마비를 앓고 난 후 왼쪽 편마비가 왔다. 당시 뇌전증도 같이 오면서 장애 등급을 받았다. 이 때 장애인으로 등록돼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표를 끊으려면 500원의 '보증금'이 있어야 했다. 월미도에서 만난 아는 아저씨가 그녀의 손에 얼마간의 돈을 주었다고 한다. 소라씨는 그 돈으로 빵과 우유를 사 먹고 나머지는 보증금으로 썼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쪽에는 오전 5시가 돼야 버스가 다녀요. 그 시간이 되면 떡과 꼬마김밥을 파는 할머니가 나오세요. 그 할머니가 저를 많이 챙겨주셨어요. 떡도 주고 김밥도 주고. 대신에 제가 할머니를 많이 도와드렸죠.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오면 짐도 들어 드리고요. 제가 고속버스터미널을 떠나고 난 뒤 몇년 만에 갔는데 할머니가 그대로 계신 거예요. 그때 정말 반가웠어요. 그런데 재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노숙할 때 저를 먹여 살리신 할머니인데.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슬퍼서 막 울었어요." 

노숙을 견디게 해준 힘, 엄마가 남긴 편지

소라씨는 넉살이 좋아 어디를 가도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힘든 노숙 생활 중에도 사람을 잘 사귀었다. 덕분에 다른 노숙인들이 소라씨의 물건을 훔쳐 가는 일도 없었고, 성폭행 사건을 겪는 등의 일도 없었다.

"노숙 생활이 무섭지는 않았어요. 저는 어린 나이에 무서움을 이미 겪었거든요.  여섯살 때 유치원에 갔다가 오니까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보고 너무 무서워서 외할머니댁으로 뛰어갔어요. 그 후에도 자주 그런 일이 있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보지는 못하고 소리만 들었어요. 소리가 얼마나 크게 들렸는지 몰라요. 이게 웬만한 무서움은 견딜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리고 다짐했죠. 아무리 무서운 일이 있어도 엄마를 생각하면서 견디자고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남긴 편지가 있어요. 지금도 편지 내용을 기억해요."
 
"나의 사랑하는 딸 소라에게
보고픔이 가득한 성탄절이구나. 사랑하는 딸 소라야, 얼마나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모쪼록 건강히 지내고 웃어른 공경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사랑 듬뿍 받는 소라가 되어다오."
 
소라씨가 서울역으로 옮겨 노숙생활을 할 때였다. 어느 날 꽃동네 수녀님을 만났다. 수녀님은 장애가 있는 소라씨에게 입소를 권했다. 오랜 노숙 생활로 악화된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녀는 입소를 결정했다. 22살부터 25살까지 그곳에서 보냈다.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지내다 보니 몸과 마음이 망가졌어요. 배가 고프니까 주는 대로 먹고 잠을 편히 못 자니 우울증이 와 이가 빠지기 시작했어요. (윗입술을 들어 보이며) 지금 윗니는 하나도 없어요.

3년 동안 꽃동네에서 지내면서 상자 만들기를 했는데, 입소한 후 가장 답답했던 게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살아야 하는 거였어요. 어느 날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시설에서 나가려면 몸이 안 아파야 하고 자립 능력도 있어야 해요. 꽃동네 측은 저의 퇴소를 쉽게 허락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매일 기도했어요. 여기서 나가게 해달라고요. 결국 수녀님과 상담 후 퇴소했어요."


퇴소 후 쪽방촌으로, 새로운 사랑의 시작

꽃동네를 나오니 소라씨가 갈만한 곳이 없었다. 꽃동네에서 상자 접기를 해서 모은 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은 쪽방밖에 없었다. 그렇게 얻은 후암동의 반지하 쪽방, 그곳은 말이 쪽방이었지 온전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말 무서웠어요. 양 옆방에 다 남자분들이 살았거든요. 노숙할 때는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같은 노숙인끼리 도와주기도 하는데, 여기는 남자들이 방에 불쑥 찾아오면 방법이 없어요. 또 한 가지 불편했던 점은 독립적으로 쓸 수 있는 샤워 공간이 없다는 거였어요. 쪽방은 1평이 약간 넘는 자신만의 공간을 빼면 모두 공동으로 사용하니까요."

그래도 쪽방은 노숙과 시설 생활을 하고 6년 만에 만든 '나만의 공간'이었다. 쪽방 생활을 하면서 한 남자도 만났다. 2년 정도 함께 살았다. 혼인신고까지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남자는 소라씨의 기초생활수급비만 훔쳐서 도망갔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힌다고 했던가. 소라씨는 6개월 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순애보 적으로 소라씨만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2009년도 교회에서 하는 합동결혼식에 신청해 결혼식을 올렸다. 올해로 10년째 결혼 생활 중이다. 남편을 만나면서 그녀의 우울증도 많이 나아졌다.

"오빠가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요. 제가 다리도 안 좋고 숨이 가빠서 잘 걷지 못하거든요. 2년 전부터 전동휠체어를 타기 시작했는데 오빠가 항상 옆에서 경호원처럼 챙겨줘요. 공주가 된 것 같다고나 할까요? 이건 10년 전에 오빠랑 결혼식 할 때 찍은 사진이에요."
 

10년 전 쪽방에 살면서 만난 남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는 "자신들의 행복한 사진을 공개해달라"며 기자에게 요청했다. ⓒ 문세경

 
소라씨가 결혼식 사진을 보여주며 행복하게 웃는다. 소라씨보다 스무 살 많은 남편때문에 종종 아빠와 딸 같아 보인다는 오해를 받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멋있는 남편 있으면 어디 한번 나와봐"라고 받아친다고 한다. 환한 미소를 짓는 그녀에게서 노숙을 했다는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엊그제 부활절 행사가 있어서 봉사하고 왔어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이만한 밥 그릇에 밥 놓고 반찬 놓고 계란 넣고. 봉사활동을 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다른 이에게 내 마음을 주는 거니까. 마음을 열고 활짝 웃으면서 공손하게 인사할 때 행복감을 느껴요. 교회에서뿐 아니라 거리에서 우울하게 구석에 앉아 계시는 어르신을 만나면 다가가서 안부를 여쭈어요. '할머니 왜 식사 안 하세요? 맛있는 식사 하셔야죠. 할머니가 안 드시면 저도 안 먹을 거예요'하면서 애교도 떨고요."

길거리에서 임대주택으로, 인생 2막

소라씨는 5월 말에 지금 사는 쪽방에서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한다. 그녀는 평생 함께 할 사람과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지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제2의 인생'이 시작된 셈이다. 

서너 시간의 인터뷰로 자신의 삶을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눈물로 지새운 밤이 얼마나 많았을지, 동 터오는 새벽 첫차를 기다리며 얼마나 가족이 그리웠을지를 짐작만 할 뿐이다. 인터뷰가 끝나자 소라씨가 당부하듯 말한다. 

"저는 이제 노숙을 안 해요. 하지만 아직도 거리에는 노숙하는 여성이 있고 노숙하는 장애인이 많아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똑같은 사람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말하면 노숙을 하고 싶어서 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도 마찬가지예요. 행색이 좀 지저분해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인터뷰 장소를 나가면서 소라씨가 비닐봉지 하나를 내밀었다. 봉투 속에는 먹음직스러운 빵이 있었다. 인터뷰하면서 나와 같이 먹으려고 샀다고 한다. 빵을 보니 허기가 몰려왔다. 한 사람의 굴곡 많은 인생 이야기를 듣느라 배고픈 줄 몰랐나 보다. 집으로 향하던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임대주택으로 이사하면 초대할 게요. 꼭 놀러 오세요!"
 

마음씨 착한 소라씨가 건넨 빵 ⓒ 문세경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대한불교조계종사회복지재단,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원불교봉공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보건복지부)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여성홈리스 #노숙인 #종교계노숙인지원민관협력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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