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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히어로'였던 노무현, '부활의 히어로' 된 거다"

[인터뷰] 영화 <노무현입니다> 만든 이창재 감독의 '노무현 10주기'

19.05.23 10:06최종업데이트19.05.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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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입니다 ⓒ 영화사 풀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 한 장면 ⓒ 영화사 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운의 정치인이었다. 4번이나 선거에서 떨어진 '낙선의 아이콘'이었고, 대통령이 되고서도 보수 언론, 검찰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기득권과 싸워야 했다. 비가 와도, 안 와도, 초등학생들까지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 할 정도로 대통령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말이 넘쳐났다. 퇴임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 지으며 살고 싶다던 소박한 바람마저 1년여를 채우지 못했다. 

위기마다 그를 구해낸 건 무명의 시민이었다. 낙선을 반복하던 정치인 노무현에게,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 위기에 처한 대통령 노무현에게, 목숨을 던진 전직 대통령 노무현에게 향했던 시민들의 마음. 지난 2017년, 그를 탄핵 위기에서 구해냈던 촛불로 부패한 대통령을 탄핵시킨 시민들은 노무현의 말과 노무현의 정신을 떠올렸다. 

그때 공개된 영화 한 편.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탄압이 극에 달하던 때라 'N프로젝트'라는 가제로만 알려졌던 이 영화의 제목은 <노무현입니다>. 1만 명만 넘어도 성공으로 평가받는 독립영화 시장에서, <노무현입니다>를 위해 186만 명의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대중의 애정과 관심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는 지지율 2%의 '꼴찌 후보', '비주류 정치인'이었던 노무현이 최초의 국민참여경선을 통해 새천년민주당(더불어민주당의 전신)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비운의 정치인 노무현이 가장 화려하게 빛나던 시기. 이창재 감독은 왜, 인간 노무현의 여러 굴곡진 인생의 시기 중 이때를 택했을까. 

노무현 대통령의 10주기를 앞두고, 이 감독을 중앙대학교에서 만났다. 영화를 만드는 동안, 인간 노무현과 그를 사랑하고 지지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깊숙이 들여다본 그에게, 10주기를 앞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깊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기 대선 전후에 공개된 터라 (개봉은 대선 이후인 5월 25일이었지만, 영화는 대선 열흘 전인 4월 29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됐다) 영화에 다 담을 수 없었던 문재인 대통령(당시 후보)의 인터뷰부터, 당시엔 다 말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이야기들까지. 이 감독과의 긴 대화는, 2009년 5월의 기억에서 출발했다. 

풀리지 않던 울분, 그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의 이창재 감독 ⓒ 이정민


- 개봉 당시 인터뷰를 보니, 2009년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한 뒤 노무현 영화를 제작할 마음을 먹었다고 답했더라. 2009년 5월, 그날에 대한 이 감독의 기억이 듣고 싶다. 
"검은 양복을 입고 노제에 갔다. 참 더운 날이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정치에 관심 없어 보이던 친구들을 만났다는 것. 서로 '네가 왜 여기 있어?' 식으로 바라봤다. 서로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거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울분 때문인지, 여러 가지로 불쾌한 마음이 들었다. 그 중 가장 화가 났던 건 만장이었다.

만장 500기가 올라갔는데, 원래 대나무로 하지 않나. 근데 당시 정부가 PVC 파이프로 바꾸지 않으면 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한거다. 대나무가 시위대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파이프에 건 만장은 볼품도 없었고, 이 정부는 슬퍼하는 시민들을 폭도로 밖에 보지 않는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다. 가는 마당까지 이렇게 모욕을 주나 싶어 분노가 치밀었다. 노제는 길고 지루하게 진행되는데, 이 울분을 분출할 곳이 없더라. 그 풀리지 않은 앙금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 그 앙금을 영화로 풀어야겠다 생각한 건가.  
"2009년 6월 이명박 정부의 시위대 진압이 탄압 모드로 바뀌었을 때, 한 교수님에게 시국선언을 할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몇 명이나 참가하느냐고 여쭤봤는데, 한 서른 명쯤 될 것 같다더라. 중앙대 교수가 800명쯤 되는데 너무 부끄러운 숫자 아닌가. 그래서 한두 시간만 늦춰달라고 하고, 온 학교를 돌아다녔다.

교수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안식년인 교수, 해외에 있는 교수들에게까지 연락해 이름을 모았다. 그렇게 모인 교수 68명의 이름으로 시국선언을 했다. 전국 대학 중 중앙대가 처음이었다. 대학 때 학보사 활동을 했지만, 2009년 전까지는 정치를 관찰자의 시선으로 보려 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 서거 이후 마음에 뿔이 났다. '노무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건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였고."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이 열린 2009년 5월 29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마친 운구행렬이 서울역으로 향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운구차를 향해 추모의 뜻으로 노란 손수건과 종이비행기를 던지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권우성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 영결식이 열린 2009년 5월 29일 오후 노 전 대통령 추모행렬이 서울광장에서 노제를 마친 뒤 서울역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이명근


- 제작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고 들었다.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운을 띄울 때마다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본업이 교수이니, 잘못하면 학교에 세무조사가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만든다 하더라도 개봉도 문제였고. 여기에 투자한 회사, 제작한 회사가 날아갈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 '안 된다'는 말만 몇 달을 들었고, 그렇게 포기했었다. 그러다 2016년 총선이 끝난 다음 날,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소야대로 바뀌었으니 최소한의 안전망은 갖춰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해보자 싶었다.

그래도 정식 루트를 통해 제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투자는 예술 단체나 일반 기업의 사회 공헌 일환으로 이뤄진다. 당시는 투자사 내에 전문위원제도를 둬서, 아이템 감시까지 하던 때였으니까. 대통령이 탄핵되고, 정권이 바뀔 줄 누가 예상했겠나. 다들 독립군의 마음으로 도움을 주셨고, 나 역시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신 만들 수 없다는 절실함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가 흥행하고 가장 기뻤던 건, 대단한 결심과 마음으로 이 영화에 투자해주신 분들께 손해를 끼치지 않을 수 있게 됐다는 거였다."   

노무현의 사람들, 그들의 노무현

이창재 감독은 <노무현입니다>를 위해 문재인 대통령(당시 후보)을 비롯한 유시민 현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광재 전 의원, 조기숙 교수, 양정철 참여정부 홍보기획비서관 등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동반자들과 변호사 시절 운전기사, 중앙정보부의 노무현 전담 요원, 그리고 수많은 평범한 노사모 회원들을 인터뷰했다. 1만2000여 분에 달하던 인터뷰는 45분으로 축약돼 영화에 담겼다. (*이 감독은 영화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를 모아 책, '노무현이라는 사람'(수오서재)을 펴내기도 했다.)   

- 영화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이라 불릴만한 대부분의 사람이 등장한다. 섭외의 어려움도 컸을 것 같다. 
"아주 가까운 분들일수록, 당시의 깊은 기억을 소환하는 걸 힘들어하셨다. 끝내 안 해주신 분들도 제법 되고, 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하겠다던 분들도 계셨다. 유시민 이사장은 7개월을 부탁했는데 영화 촬영 끝나기 보름 전에야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결국 인터뷰는 해주셨지만, 영화 보러는 안 오셨다. 안 보고 싶으시다더라. 보고 나면 일상이 너무 힘들어지실 것 같다고. 그런 분들이 많았다.     

이런 상황을 도와주신 분이 이호철 민정수석비서관이셨다. 섭외도 도와주고, 설득도 해주셨는데 정작 본인은 인터뷰를 하지 않으시더라. 한 번은 '이번엔 진짜 하셔야 한다, 다른 사람들 다 하라 해놓고 둘이 어떤 인연인데 안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다그쳤다. 그날 밤늦게 술에 잔뜩 취해 전화하셨더라. 주군을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한 사람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부끄러워 인터뷰 못 하겠다면서 우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인들은 그분의 마지막에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인과 지지자, 정치인과 정치인의 만남이 아니라 <수호지>에 나오는 양산박 같은, 서로가 서로에게 형님이고 동생인 관계가 탄탄했다. 노사모도 그랬지만, 스스로를 '유족'이라고 자주 표현했다. 돌아가신 지 꽤 됐고, 정말 피로 맺어진 가족도 아닌데, 여전히 유족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아파하고 있었다." 
 
-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들은 노무현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 것 같던가. 
"대부분의 시민들은 그분을 다혈질이고, 직선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이미지로 생각할 거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더라. 이 양반의 가장 큰 장점은 공감 능력이었다. 예를 들면, 정권 초기 검사와의 대화가 있었지 않나. 검사들이 굉장히 삐딱하게 대화에 임했고, 당시 국민 여론 역시 '너무했다'는 반응이 많았다.

그때 대통령에게 '이번 일은 검찰 조직의 모순을 스스로 드러낸 거다, 이번 기회에 국민적 지지를 바탕으로 확 개혁해버려야 한다'는 의견을 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대통령 반응은 '너는 왜 사람을 나쁘게만 보냐'는 거였다고 한다. 말을 옮기자면, '정치 검사도 있겠지만 올바른 사회를 위해 일하려는 검사, 정의 구현하고 싶어하는 검사가 더 많다. 그렇게 삐딱하게만 보지 마라'라는 거였다. '노무현' 하면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겠지만, 정작 그분은 대통령이 된 후에도 늘 (반대하는)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변호사 시절 이야기도 들어보면, 의뢰인이 오면 이야기를 듣다 본인이 더 많이 울고, 울다 지쳐 누워계시고 그랬다고 한다. 주위에서 '변호사가 그렇게 울고 있으면 어떡하느냐'고 한 소리 하면, '듣다 보니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하셨다더라. 그러니까 이 분은 외강내유하셨던 거다. 마음이 여리고, 그 여린 마음과 공감 능력으로 약자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가 쌓이셨던 거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출연한 문재인 대통령 ⓒ 영화사 풀

 
- 개봉 당시, 문재인 대통령(당시 후보) 인터뷰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인터뷰는 어떤 식으로 진행됐나. 
"학교(중앙대) 안에 아주 지저분한 스튜디오가 하나 있다. 그 구석에 검은 천막을 치고 인터뷰했는데, 그때가 대선 3개월 전인가, 2개월 전인가...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고 있던, 가장 바쁜 시기였다. 인터뷰에 응한 다른 정치인들은 올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과 함께 왔다. 주변 사람들이 그분들을 '모시고 온다'는 느낌이었는데, 문 대통령은 당신, 비서, 기사, 이렇게 딱 셋이 왔더라. 경호원도 없이. '다른 분들은요?' 하고 물으니 '일해야죠' 하는 거다. 인터뷰 때도 기사님은 차에서 쉬고 있고, 비서분이랑 두 분만 계셨다. 유력 대통령 후보고, 모든 포커스를 다 받고 있는 사람인데. 권력을 향유하지 않는 느낌? 독특했다." 

- 하지만 정작 문 대통령의 분량은 영화에 매우 짧게 담겼다. 개봉 당시 인터뷰엔 '재미없어서' 많이 편집했다고 설명했는데, 그 이유가 전부였나? 미공개 인터뷰 내용이 듣고 싶다.  
"나는 비판적 입장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질문했다. '비서실장 입장에서, 참여정부의 가장 큰 실책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였는데, 갑자기 안색이 바뀌면서 '정통성 없는 집단에 정통성을 부여하고, 권력을 유지시킨 부분이 가장 큰 실책이라 본다'고 하시더라. 자유는 주어져야 하지만, 그 전에 청산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정통성 정립과 적폐 청산을 당신이 안고 있는 큰 숙제라 여기는 것 같았다. 어리숙한 선비 같은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굉장히 멋지게 느껴졌다. 그런데 비서가 (시기적으로) 민감하니 빼달라고 하더라. 앞뒤 맥락을 편집하곤 담기 힘든 답변이기도 했지만." 

-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자신을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오랜 친구이자 동지였지만, 두 분의 사적인 에피소드는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더라. 
"인상적이었던 건 노무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께 평생 존대를 하셨다는 거였다. 6살이나 어린 동향 후배인데. 법무법인 부산에서 두 분과 30년 동안 일한 사무장님도, 노 전 대통령이 문재인 대통령께는 늘 '문 변호사님'이라고 불렀고 한 번도 말을 놓은 적이 없다더라. 가장 가까운 사이였지만 묘한 존중감이 있었다는 거다.

측근들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옆에 사람들이 아무리 말려도 노무현 대통령이 고집을 부릴 때, 하다 하다 안 되면 연락하는 게 '문재인 변호사'였다더라.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1997년 대선에 나가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 말도 안 된다고 아무리 뜯어말려도 고집을 꺾지 않으셨단다. 결국 하다 하다 안 되니 문 변호사에게 연락한 거지. 부리나케 서울에 올라온 문 변호사가 '지금은 아니다, 안 나가는 게 맞다'고 했는데, 노 대통령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요? 내려가소!'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아마 그 화는 '어떻게 너까지 나를 못 믿어주냐'는 서운함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두 분의 말투를 떠올리며 그 상황을 그려보면 참 재미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는 말도, 문 대통령이 내내 거절하다 부산 선대위원장을 맡아주기로 했을 때 기분이 좋아서 한 말이라지 않나. 노무현 대통령이 6살이나 형이고 선배이지만, 문재인 대통령 관련 일화에서는 아이 같은 모습이 있더라." 

노무현의 인생사, 그리스 비극과 닮았다

유시춘 EBS 이사장은 <노무현입니다> 인터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삶에는 그리스 비극 속 영웅의 요소가 다 들어있다. 그는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영웅이었지만, 그래서 더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이 감독은 "유 이사장의 말에 공감한다"면서 "영화를 만드는 동안 가장 조심한 것도, 자칫 이 사람을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하는 걸로 보이지 않도록 하는 거였다"고 말했다. 

- 영화에는 노무현을 바라봤던 사람들의 다양한 기억이 담겨있다. 그와 헤어질 날만 기다렸다는 강원국 연설비서관이나, 가방끈 콤플렉스를 지적한 유시민 작가의 말도 인상 깊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늘 합리적 의심이라는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내가 이 영화에 담고 싶었던 건 한 인간이지, 신의 모습이 아니니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이면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런 기억들을 담고 싶었다. 그중에는 아이 같은 모습도 있고, 지질해 보이는 모습도 있고, 이상에 가득 찼던 모습도 있다. 분명한 건, 그 모든 것이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보여주는 일화라는 거였다." 

- 영화에서 측근들은 중간중간 울컥하긴 하지만, 비교적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간다. 그들은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보는 사람은 눈물을 쏟게 되는 순간들이 있던데, 인터뷰 진행하면서도 그랬을 것 같다.  
"가능하면 객관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인터뷰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까지 너무 울어서 인터뷰가 진행이 안 되던 순간도 있었다. 개봉 당시 인터뷰 때도 말했지만, 김경수 지사와는 4시간이나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김 지사가 너무 울어서 통편집할 수밖에 없었다."

- 대통령 재임 시절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다고 들었다. 
"욕하는 진보였던 것 같다. '바보 노무현'이 좋은 의미의 바보가 아니라 정말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라크 파병이나 FTA 할 때는 약간의 배신감과 분노도 있었다. '하다 하다 이렇게까지 하네?'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때 그 선택들도 다 이해가 가고, 선구안이 놀랍기까지 하다. 시간이 흐르고 돌아가셨다고 포장하는 게 아니다. 참여정부에서 일하던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때 대통령은 늘 '지금 당장 수치 끌어올리는 건 의미 없다. 10년, 20년 뒤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하셨다더라. 그 때 내린 결정의 혜택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현재도 보라. 주류 언론과 매체들, 여전히 강력한 보수 조직들은 현 정부를 흔들고 있다. 단단한 지지층이 있는 문재인 정부도 이렇게 흔드는데, 보수 언론과 보수 기득권의 힘이 세고, 당내 기반조차 허약했던 노 대통령은 그 시기를 어떻게 견뎠을까. 그런 상황에서도 정도의 정치를 고수한 것 자체는 무모하고 위험했지만, 그게 노무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노무현 서거 10년 후
 

영화 <노무현입니다>의 스틸 이미지 ⓒ 영화사 풀

 
-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10년이다. 그동안은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노무현 정신을 떠올린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새로운 10년은, 어때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젠 슬픔과 부채 의식에서 벗어나도 되지 않을까? 지난 10년, 많은 이들의 시민의식이 깨어났고, 촛불 혁명까지 해냈다. 지금의 시민들은 호락호락하게 언론에 휘둘리지 않고, 부당한 것들을 좌시하지도 않는다. 이런 것들을 현실에서 삶의 모습으로 보여준 분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노무현 정신이 우리 일상에 스며든다면,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곁에 살아있는 거다. 얼마 전까지 '비극의 히어로'였던 노무현이, '부활의 히어로'가 된 거다. 더 이상 슬퍼하거나 미안해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노무현을 기억하면 될 거라 생각한다." 

- 대선을 앞둔 시민들에게,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만든 기적을 보여주기 위해 2002년 민주당 경선 과정을 영화에 담았다고 했다. 만약 지금 <노무현입니다>를 만든다면, 영화에 담고 싶은 내용도 달라지겠지? 만약 지금 <노무현입니다>를 다시 만든다면, 그 안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길까?    
"가장 궁금한 건 재임기 의사 결정 과정이다. 인터뷰하면서 알게 됐는데, 당시 굉장히 놀라운 의사결정 과정이 많았다더라. 누군가는 시골에서 온 고등학교 밖에 안 나온 양반이라고 했지만, 그분의 의사 결정은 굉장히 세련되고 민주적이었다. FTA, 이라크 파병과 같은 결정은 어떻게 내려졌을까. 탄핵 정국 땐 또 어떠셨을까.

정말 굉장한 건 이 모든 것들이 영상으로 기록돼 있다는 거다. 당시 청와대 계시던 분들 말씀이, 괴로울 정도로, 무슨 말을 못 할 정도로 모든 것들을 촬영해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지금은 대통령 기록물로 묶여 있어 공개되려면 아직 14년이 더 남았다. 이 자료들이 공개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노무현을 재평가해야할 거다. 그때까지 내가 영화를 만들고 있을 진 모르겠지만, 영화로 만들든 아니든, 기록물이 공개되면 꼭 보고 싶다." 
노무현입니다 10주기 이창재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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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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