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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꽃' 최원영·윤시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의 진짜 이유

[리뷰] <녹두꽃>을 통해 본 조선 후기 사회 구조와 지배층의 한계

19.05.23 17:32최종업데이트19.05.24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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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 포스터 ⓒ sbs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이 이제 본격적인 전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난 18일 방영한 16회에는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는 백이강(조정석 분)과 백이현(윤시윤 분)의 행보가 그려졌다.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이제 두 형제는 치열한 대립을 하게 될 것이다.

극 초반, 아무렇게나 불리던 '거시기'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찌감치 노선을 정한 이강과 달리 이현의 변화는 보다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잔혹한 아비 백가와 잔인한 현실 속에서 이현의 정신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현은 자신이 향병으로 차출된 내막과 함께, 결코 자신을 사위로 받아들일 수 없는 스승 황석주(최원영 분)의 진심을 알게 된다. 이제 <녹두꽃>의 온유하고 사려 깊은 '백도령' 이현은 복수를 말하는 '이방' 이현이 되었다.

이현의 변화를 야기한 중심에는 스승 석주가 있다. 석주와 이현의 모습이 극 초반과 사뭇 달라지면서 <녹두꽃>의 내용은 더욱 흥미로워지고 있다. 선량하고 신실해 보였던 두 사람은 왜 이런 변화를 맞이했을까. 그 변화의 중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변화를 거부하는 시대의 관성이 작용한다.
 
황석주, 그는 왜 고결함을 버렸을까

 

▲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 한 장면 ⓒ sbs


이현의 스승 석주는 고부 농민 봉기에 전봉준(최무성 분)과 함께 참여했다.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탐관오리를 벌하는 움직임에 동참한 그는 양심이 살아있는 사회 지도층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전봉준의 계획이 고부를 넘어 조선의 사회 구조를 변혁시키는 것으로 확장될 조짐을 보이자 뜻을 달리한다. 고결한 선비인 석주는 고부 군수의 불의에 눈 감지 않았으나, 조선의 사회 체제를 지지하는 사대부였다.

고부 농민 봉기를 지지한 석주는 돌아온 백가(박혁권 분)에 의해 투옥과 고초를 겪는다. 비열한 백가가 석주의 불리한 처지를 이용해 사돈을 맺게 한 후, 석주의 고결함은 사라지고 만다. 석주는 백가에 대한 분노로 이현의 교생안을 불태워 향병으로 차출되게 하고, 돌아온 이현이 혼례를 고집하자 파혼을 단행한다.

석주의 변화는 백가의 악행과 맞물려 매우 설득력있게 그려진다. 양식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더러운 치부의 대명사인 백가와 사돈을 맺고 싶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백가는 혼사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석주의 약점을 쥐고 흔들었다. 상황상 석주는 거의 겁박에 의한 심신미약과 비슷한 상태로 백가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옥고에서 벗어난 석주에게 내밀어진 이현의 사주단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석주가 백가를 증오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현은 그런 백가의 아들이었다. 제아무리 애정한 제자일지라도 석주에게 더없는 굴욕감을 안겨준 백가와 사돈을 맺고 싶지 않은 것은 십분 이해가 간다.

문제는 그의 방법과 대응에 있다. 석주는 백가와 그리 다름없는 비열한 술수로 이현과 여동생 명심(박규영 분)의 혼사를 막으려고 한다. 홍가(조희봉 분)를 협박해 이현을 사지로 내몰고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이현에게 부끄러운 기색없이 자신의 분노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석주에게는 더이상 스승으로서의 체신도 선비로서의 고매함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리 모진 분이셨냐는 명심의 호소에 석주는 스스로를 가장 경멸한다며 자기 비하의 끝을 달린다.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추악한지 알면서도 석주는 그리한 것이다.

백이현, 그는 왜 온화함을 버렸을까

이현의 행적은 그대로 석주의 복사판이다. 이현은 천대 받는 이강와 유월(서영희 분)을 꼬박꼬박 존대하며 따뜻하게 챙기고, 아비 백가의 악행에 분노하지만 효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명민함에 온화한 심성을 두루 갖춘 이현은 사랑을 하기에도 받기에도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이현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비 백가이다. 그는 무자비한 아비에게 허수아비처럼 휘둘리는 이강을 무력하게 지켜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백가와 너무나 다른 곧은 성정을 지닌 이현이었다. 그가 감내해야 했을 고통은 백가에게 수탈을 당하는 고부 군민들과는 차원이 달랐겠지만,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목숨을 걸고 살려낸 것이 후회될 정도로 잔인한 백가의 되풀이되는 악행 속에서도 이현은 자신의 성정을 지켜냈다.

이현이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향병으로 차출되면서부터이다. 목숨이 달린 싸움의 한복판에서 이현은 죽음을 빈번하게 목격했을 뿐 아니라 제 손으로 행하고 만다. 그는 자신을 포함한 양민들을 벌레 취급하며 거리낌없이 대하는 지배층의 모습에 참담함을 금치 못한다. 이 비참한 곳으로 자신을 보낸 사람이 따르던 스승이자 미래의 장인 석주였다.

배신감과 충격을 받은 이현은 탈영을 한 후, 고집스레 명심과 혼례를 하려 한다. 이현으로선 석주를 향한 용서의 손짓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아비를 향한 석주의 분노를 이해하기에 십분 양보해 혼사만 치러 준다면 석주의 행위를 눈감아 줬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죽기를 바랐다'는 석주의 일갈 앞에서 겨우 균형을 맞추고 있던 이현의 위태로웠던 평정심은 사라지고 만다.

이제, 온화한 미소 대신 입술을 비틀며 웃는 이현은 복수를 다짐할 만했다. 석주를 향한 이현의 눈에 서린 차분한 광기의 바탕엔 아비가 있었지만, 아비 대신 믿고 따르던 스승이 불을 지폈다.

여기서, 문제는 역시 이현의 대응과 방법에 있다. 이현의 방법 역시 그를 타락의 심연에 빠트린 석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돕기 위해 찾아온 이강과 그의 동료들을 함정에 빠트리고,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 이제는 식구가 아니라며 선을 긋는다. 목적을 위해 타인을 수단화하는 모사와 술수를 부리는 이현에게서 더이상 현명함과 따뜻함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백가의 만류에도 이방이 된 이현은 기꺼이 석주를 대적하기 시작한다.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석주와 달리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석주를 곤경에 빠트리는 이현은 청출어람의 좋은 예이다.

황석주·백이현, 그들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 한 장면 ⓒ sbs

 
석주와 이현의 분노와 그에 따른 변화는 충분히 공감되지만, 그들은 분노의 일부를 야기한 대상과 상관이 없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표출시켰다. 석주가 백가와의 혼인을 원하지 않았다면, 이현이 자신의 교생안을 없앤 석주에게 복수하고자 하였다면 다른 방법을 선택했어야 했다. 그들은 도덕심으로 무장한 인자한 선비이며 도령이지 않았던가. 자애로운 그들의 성격은 흉악한 본심을 감춘 가면이 아니었다. 이러한 석주와 이현의 불의한 선택의 이면에는 조선 후기 사회 구조와 그에 얽매여 있던 지배층의 한계가 숨어 있다.

석주가 전봉준과 결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봉기가 고부 군수와 아전을 징벌한 후 해산될 일회성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인즉천'을 외치며 전주와 도성으로의 진격을 결정하는 전봉준의 목적은 전통적인 계급 구조의 전복에 있었다. 그러나 석주가 지향한 사회는 이러한 것이 아니었다.

석주는 부끄럽지 않은 지배층이 되고자 했지만, 계급 구조의 불합리함을 인식하지 못했다. 석주가 양반이며 사대부인 것은 날 때부터 정해진 당연한 것이었다. 석주는 탐관오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상민들을 위하고 생각하는 사대부였다. 석주는 베푸는 자이나 그의 시혜는 지위처럼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 자애의 기본은 석주가 사대부일 때 가능한 것이며, 이것은 신성 불가침의 조건처럼 침범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점을 간파한 백가는 석주를 나락으로 떨어트려 반 협박으로 혼인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사대부가 아전인 백가와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라리 혼인이 석주의 아량이 베푼 시혜의 산물이었다면 양상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이현과 명심의 혼사 결정은 고귀한 사대부 석주가 미천한 아전 백가에게 굴복한 치욕이었다. 석주의 분노가 빗나간 복수로 이어진 것은 이 지점에 있다. 감히 아전 따위가 양반 사대부를 농락하여 능멸한 것이다. 사대부의 자긍심을 추락시키며 이루어진 혼사는 제자 이현이 죽기를 바랄 만큼 성사되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현이 보여주는 모습 역시 석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석주가 이현에게 보인 존경할 만한 너그러움으로 이현은 유월과 이강을 존중한다. 이들 사이에 계급은 존재하지만, 계급이 야기하는 비인간적인 차별성을 존재하지 않는다. 잔인한 계급의 이분법에서 이현은 수혜자인 동시에 시혜자이다.

시혜를 베풀던 석주의 변심은 이현을 분노케 한다. 한사코 이현과의 혼사를 거절하는 석주의 태도가 말하는 것은 석주의 계급으로 이현을 편입시키지 않겠다는 것이다. 석주가 계책을 꾸며 자신을 향병으로 보냈음에도 기어코 혼례를 치르려는 이현이다. 이현은 혼사만 이루어진다면 석주의 잘못을 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석주가 이현을 사위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위 계급자가 베풀 시혜의 마지막 단계와도 같다. 석주가 그것을 용인한다면 그의 이중적인 행태는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석주로부터 거부당한 이현은 석주의 전철을 답습한다. 거짓된 호의를 베풀어 이강의 동료들을 위기에 빠트린다. 이제 이현은 어떻게 해도 양반이 될 수 없다면 아비처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군림하고자 한다. 파혼을 당한 이현의 뼈저린 현실 인식이다. 계급 상승의 사다리를 잃은 이현은 이방의 자리에 자원하며 자신의 계급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그 계급을 한껏 이용해 자신을 버린 상위 계급 석주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이제 정다웠던 스승과 제자는 냉소를 품으며 한 자리에 마주한다.

선량한 개인은 나약한 개인
 

▲ SBS 금토드라마 <녹두꽃> 한 장면 ⓒ sbs


석주와 이현은 등을 졌으나, 결국 두 사람은 가재와 게처럼 한편이다. 그들이 대적하는 상대는 공통적으로 '인즉천'을 외치는 동학 농민들이며, 그것은 곧 계급 타파를 외치는 시대의 흐름이다. 석주와 이현은 동학의 이상에 동의하지 못한다. 석주는 전봉준과 갈라지며, 이현은 한 편이 되어 달라는 전봉준의 권유를 '문명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라는 말로 거절한다. 조선 후기 지배층은 불합리한 사회 구조의 변화를 요구하는 소리에 대해 둔감했다. 양반으로 대변되는 지배층은 변혁이 불가피한 시대의 거센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석주와 이현은 조선의 계급 구조와 지배층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는 계급의 구분에 보다 철저한 개인과 그러한 구분에 연연하지 않는 선량한 개인이 모두 존재할 수 있다. 선량한 개인의 신분이 높을수록 그의 선량함은 극대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개인의 선량함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석주나 이현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사회 구조가 지향하는 이상에 동의한다면 더욱 그럴 수 있다.

이러한 선량한 개인은 분명한 한계를 지님에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긍정적이다. 진심이라면 굳이 위선이라 지적하며 매도할 필요도 없다. 이익을 계산하지 않는 선량한 호의는 아름답다. 문제는 선량한 개인은 나약한 개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에 반하는 상황이나 잘못된 사회 규범에 경도되어 있을 때, 선량한 개인의 힘은 발휘되기가 쉽지 않다. <녹두꽃>의 석주와 이현이 끝내 빗나간 복수를 하는 이유는 조선의 계급 구조에 순응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량함은 계급의 위계가 지켜지는 경계 안에서만 발휘된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에서 말하는 도덕과 양심은 모래성과 비슷하다. 계급 체제가 도전 받는 지점에서 도덕과 양심은 사라진다. 석주의 반쪽짜리 정의가 불의로 변질될 수밖에 없으며, 총을 든 이현의 개화가 퇴화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드라마 <녹두꽃>은 조선 후기 지배층의 악랄함을 그리는 동시에 석주와 이현처럼 선량한 호의를 베풀었던 지배층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들은 위선적으로 그려지기 보다는 개연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변화를 맞이한다. 이러한 설정은 근본적인 사회 구조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선량하게 살아온 개인도 자칫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개인의 모든 행위를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련지어 설명할 수는 없다. 심정적 이해와 다소의 정상 참작 소지가 있는 이강의 과거 행위나 변명의 여지가 거의 없는 백가의 악랄함을 사회 구조와 연결해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개인의 행동은 개인이 책임지는 것이 합당하다. 석주와 이현 역시 자신들의 야비한 행동에 일말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다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선량한 개인들의 힘만으로는 극복되기 어렵다. 신분 제도라는 과거의 폐습은 사라졌지만, 현대 사회는 또다른 구조적 모순을 떠안고 만들어내고 있다. 선량한 개인이 모종의 상황에서 악한 개인이 되지 않도록 사회 구조 자체의 변화가 늘 필요하다. 이상적인 사회 구조를 지향하고, 지금의 사회 구조를 좀더 개선하기 위해 개인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개인과 사회는 명확하게 분리될 수 없는 서로에 기대있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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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한민국 한 귀퉁이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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