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병호 사수대 출신, '국내1호 등산박사'의 삶과 산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김성기 교수

등록 2019.05.26 15:53수정 2019.05.26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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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인수봉을 등반 중인 김성기 박사 ⓒ 김성기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김성기(55) 박사를 만났을 때 신경림 시인의 시 '파장'(罷場)의 한 대목이 생각났다. 그가 그냥 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청년 시절, 그는 성수동 제화공이었고 나는 구로공단 프레스공이었다. 노동해방의 깃발이 뜨겁던 80~90년대 우린 '서노협'(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산하 민주노조 쟁의부장으로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건설 과정에서 선봉대와 사수대로 복무했다.

"부모님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했다. 다른 동네까지 원정 가서 쌈박질하고, 애들한테 삥 뜯으면서 일진 같은 시절을 보냈다. 그땐 그게 제일인 줄 알았다. 땡땡이를 밥 먹듯이 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내다 결국 퇴학당했다. '공부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한다'며 눈물 흘리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땐 어머님의 눈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철없던 나는 '내가 알아서 살게요'라며 어머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와 나는 계급성만 같았던 게 아니었다. 청소년 시절의 잔혹사까지 닮았다. 공고 야간 3학년 때였다. 내 친구가 옆 반 일진에게 얻어맞았다. 수업이 끝난 밤 10시경, 우리 패거리들과 함께 옆 반으로 몰려갔다. 내가 그 일진에게 선방을 날리면서 집단 패싸움이 벌어졌다. 다른 패거리 아이가 병원에 실려 갔고 책상 8개와 걸상 12개가 부서졌다. 학교 측은 우리를 퇴학시킬 계획이었다. 무기정학으로 감경되면서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들의 읍소 덕분이었다.

전노협 사수대 출신이 어떻게 거벽등반가가 됐을까
 

거벽등반가인 김성기 박사 ⓒ 조호진

 
지난 4일, '거벽등반가'인 대한산악연맹 등산교육원 김성기 교수를 만나 북한산 암벽 등반에 동행했다. '암벽'과 '빙벽'은 들어봤어도 '거벽'은 처음 들어봤다. 그가 "거벽등반가는 세계의 암벽 중에서 수직 암벽을 찾아 등반하는 산악인"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요세미티 엘캐피탄(1997년), 캐나다 부가부산군 스노우패치(1999년), 이탈리아 돌로미테 친쿠에토리(2002년), 키르기스스탄 악수 북벽(2005년), 알프스 드류·몽불랑·마터호른(2007년), 네팔 히말라야 아일랜드피크(2011년), 이탈리아 톨로미테 크레치메·토파나·마르몰라다(2012년), 알프스 6대북벽 피츠바딜레(2015년), 알프스 3대북벽·그랑드조라스(2017년) 등의 해외 거벽을 등반한 국내 1호 등산 박사다. 제화공이었던 그는 어떻게 등산 박사가 됐을까.

학교에서 잘린 그는 제화 기술자인 동네 아저씨에 의해 제화공이 됐다. 1982년, 처음 일한 곳은 무교동에 있는 구두공장이었다. 당시 명동 한복판에는 고급 구두 매장들이 있었는데 구두 디자이너가 소비자 취향에 맞추어 구두를 제작해주었다. 일명 '살롱화'다. 그는 살롱화 중에서도 최고 브랜드를 만드는 구두공장에서 제화 기술을 배웠다. 명동 살롱화가 저물고 백화점 구두가 늘면서 성수동에 제화공장들이 들어섰다. 그는 성수동 제화공장에서 개발실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싸움이든 기술이든 공부든 열정을 다했다. 그에게 물었다.

- 전노협 결성 당시 단병호 의장 사수대였다고 들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열기로 서울지역제화공노동조합이 설립됐다. 조직부장이었던 나는 거의 매일같이 열리는 집회와 가투(가두 투쟁)에 앞장섰다. 가투 선봉에 선 이들은 청계노조와 인쇄노조 동지들이었다. 순박한 그들이 끝까지 거리를 지킨 이유는 노동자의 고된 삶, 그리고 억울함 때문이었다. 쟁의부장을 맡은 이후엔 더 치열하게 싸웠다. 당시, 작고 여린 여학생들은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가투에 참여했다. 힘으로 싸운 게 아니라 정의로 싸운 시대였다.

1990년 1월 22일, 전노협 결성식이 생생히 기억난다. 독재정권은 전노협 결성을 원천봉쇄했고 경찰들은 전노협 초대 의장인 단병호 의장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됐다. 나는 단 의장을 지키는 사수대원으로 조그마한 힘을 보탰다. 당시 나는 두 아이의 아빠였다. 만일 잘못되면 가족의 생계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었지만 노동자의 정당한 투쟁을 외면할 순 없었다. 노동자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데 일원으로 참여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수봉 등반 중인 김성기 박사 ⓒ 김성기

 
- 노동운동가와 산악인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어떻게 산악인이 됐나.
"나는 현장 노동자이지 노동운동가는 아니다. 억압과 착취 구조를 해소하기 위해 항거한 노동자였다. 노조 간부 임기를 마친 뒤에 노조 산악회를 만들어 매월 산행을 하다가 산에 매료됐다. 1994년 등산학교를 수료하면서 전문등반을 시작,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과 하프돔을 등반하고 난 후인 1997년 등산학교 강사로 활동을 시작했고 그 이후엔 매년 해외원정을 갔다. 그리고 2010년부터 2017년까지 코오롱등산학교 교육센터장으로 근무했다.

내가 산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은 누구에게나 공정하다는 점 때문이다. 자본과 학연, 혈연과 지연이 통하지 않는 공정한 공간이 등산 세계다. 누구에게나 출발선이 똑같고, 누구든 노력하는 만큼 오를 수가 있다. 무엇보다 대자연은 공존과 겸손을 가르쳐 준다. 서로 협력하지 않고 겸손하지 않으면 목표 도달은커녕 자신의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나는 오늘도 산에서 공정을 배운다. 산은 인간성을 회복시키는데 최적의 장소다."

- 국내 1호 등산 박사다. 어떤 주제로 학위를 받았나.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면서 서로 성장한다는 뜻이다. 20여 년간 등산학교 강사와 교수를 하는 동안 수강생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수강생들에게 존경받진 못하더라도 무시당하는 강사가 되선 안 된다는 책임감이 어머님의 눈물로도 안 되던 공부를 뒤늦게 시작하게 만들었다. 검정고시 합격, 방통대 교육학과 졸업, 석·박사학위까지 13년간 공부에 매진했다. 석·박사논문 주제는 등산교육에 대한 논문이다. 등산교육에 대한 논문으론 국내 처음이다."

- 산악 이력에 대해 듣고 싶다.
"나는 거벽등반을 즐기는 거벽등반가다. 거벽등반은 최소한 1박2일에서 일주일 정도를 벽에서 먹고 자며 등반하는 것을 말한다. 설악산 장군봉 남서벽 6개 루트(2004년), 설악산 형제봉(2006년), 설악산 유선대 이륙공천(2006년), 중국 소화산 6개 루트(2015년)를 등반 개척하고 <똑똑한 등산>(2013년)과 <산악전문가>(2017년) 등의 등반 관련 책을 펴냈다. <똑똑한 등산>은 중국어로 번역돼 출간되기도 했다.

1997년과 2009년에 미국의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엘캐피탄과 하프돔을 등반했다. 엘캐피탄은 단일 암벽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암벽으로 기네스북에 기록되어 있다. 벽 높이가 1090m이다. 나는 이곳 벽에서 2박을 하고 정상에서 하룻밤을 잤다. 하프돔은 약 500m로 벽에서 하룻밤과 정상에서 하룻밤을 자며 등반했다. 1999년에는 벽 높이 800m인 캐나다 부가부 산군의 스노우패치봉 벽에서 일주일 동안 매달려 등반했다. 해외 원정 등반은 거의 벽에서 매달려 자면서 등반한다."
 

사천성 산악구조대 결성 모습. 뒷줄 왼쪽에서 6번째가 김성기 박사. ⓒ 조호진

 
- 가슴 아픈 등반도 겪었을 것 같다.
"악우(岳友) 두 명을 잃었다. 2003년 7월 22일 대한산악연맹 산바라기산악회 원정대장 박기정(당시 50세) 형과 등산학교 제자 최영선(32세)이 키르기스스탄의 '악수(AKSU) 북벽'(해발 5239m) 등정에 나섰다가 조난사고를 당했다. 악수 북벽은 코스가 험난한 곳으로 여러 산악인들이 목숨 잃은 곳이다. 기정이 형과 영선이는 소나기가 매일 쏟아지는 상황에서 9일 동안 벽에 매달려 등반하다가 낙석에 의한 조난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기정이 형과는 원정등반을 항상 함께 했는데 그땐 회사일 때문에 함께 하지 못했다. 영선이는 등산학교 제자로 결혼한 지 1년이 안 된 신혼이었다. 영선이 아내는 캐나다 부가부 원정대원으로 내가 이들을 엮어주었다. 두 사람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동안 힘들었다. 악우를 추모하기 위해 2004년 7월 23일부터 8월 6일까지 오경훈, 박미숙, 백형선, 박충길 등과 함께 설악산 장군봉 남서벽이 바라다  보이는 유선대에 바윗길을 개척했다. 남서벽은 기정이 형이 좋아하는 등반 스타일의 벽이다. 6번의 개척 작업으로 45개의 볼트를 설치하고 루트 명을 '그리움 둘'이라고 명명했다."

- 중국 사천성 산악구조대 훈련 교관을 지냈다.
"2007년 중국 빙벽등반을 했다. 중국 사천성 쌍교구 계곡의 빙벽 '드래곤 브래스'(Dragon breath)의 최고 등반기록이 3시간 정도였는데 나를 포함한 등산학교 강사진들이 1시간 40분 만에 등반하자 중국 산악인들이 한국 산악인의 기량에 놀라워했다. 10만 명 이상이 사망한 사천성 대지진 당시 사천성 산악인들은 사고 현장에 출동하고도 구조기술이 없어 구조하지 못한 뼈아픈 경험을 했다. 우리의 빙벽기량을 본 그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2009년 나를 비롯한 한국 산악인들이 사천성으로 가서 구조교육을 한 후, 중국 최초의 산악구조대가 출범했다. 나는 중앙 119 구조단 명예교관으로도 활동했다."

- 등산 사고가 종종 발생한다. 사고 예방 방법을 알려 달라.
"최근 5년 동안 3만7천여 건의 등산 사고가 발생했고 800여 명이 사망했다. 작년 한해에는 7천 건 정도의 등산 사고가 발생해 240여 명이 사망했다. 기상 악화, 눈사태 또는 낙석과 같은 자연적 요인에 의한 사고보다는 과다 체력, 지병 발병과 같은 인위적 요인에 의한 사고가 대부분이다. 한강을 건너려면 수영을 배워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등산은 그냥 올라갔다 내려오면 된다고들 생각한다. 이런 후진국 형 인식이 목숨까지 앗아간다. 등산은 그냥 오르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준비를 하고 오르는 것이다. 등산은 가보고 싶은 곳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력에 맞게 갈 수 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목표를 향하는 거벽등반가들에게 박수를
 

유럽 돌로미테 등반 중인 김성기 박사 ⓒ 김성기

 
만난 적 없지만 그는 나의 동지였다. 노동자의 눈물과 분노를 터트리며 싸우고 사랑하며 한 시절을 보내다 건강한 삶으로 만나니 반갑다. 그를 보면서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순간에 최선을 다한 그는 반백의 나이에 국내 1호 등산박사가 됐다. 나는 환갑을 앞두고서 깨달았다. 동지는 계급성 때문에 되는 게 아니라 삶의 지향이 같을 때 동지가 된다는 걸. 위기청소년과 함께 사는 나와 거벽등반가인 그와 나는 동지라는 것을.

삶은 거벽등반이고 우리 모두는 거벽등반가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은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치고 낙석이 덮치는 거벽에 매달린 채 생존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생존의 위협으로 벼랑 끝에 몰리면서 삶을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없진 않았지만 우린 등반을 포기하진 않았다. 그러므로 손에 땀을 쥐면서 삶의 거벽을 타고 오르는 인생들은 거벽등반가다. 시작이 미약했다고 끝까지 미약하진 않으므로 삶의 의지를 다독이면서 뜨거워져야 한다. 뜨거운 삶의 목표를 향해 거벽을 타는 등반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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