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파일 속 '최순실 대통령'의 실체, 참담하다

[게릴라칼럼] 최순실 녹음파일과 정호성의 후회, 그리고 한국당

등록 2019.05.25 12:27수정 2019.05.25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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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씨가 2017년 5월 23일 오전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박근헤 전 대통령과 함께 재판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우리나라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 최순실이 1위, 정윤회가 2위, 3위가 대통령."

박근혜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2015년 1월, 정윤회 국정농단 문건 유출 혐의로 구속됐던 박관천 전 경정이 검찰 조사과정에서 남겼다는 이 발언은 그때만 해도 '지라시' 수준으로 여겨졌었다. 일각에서 '천기누설' 운운했지만 논란은 점차 수그러드는 분위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다수 국민들은 '최순실'이란 이름을 생소하게 여겼다. 그보다는 비선으로 지목받은 정윤회씨나 이른바 '십상시' 모임, '문고리 3인방'이 더 '핫한' 이슈였다. 당시 야당이던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조정회의에서 이 박관천 전 경정의 "우리나라 권력 서열이 어떻게 되는 줄 아느냐"는 발언을 인용했던 김경협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도 최순실을 직접 겨냥하지는 못했었다.

김 의원은 "(박 대통령 주변에) 최순실, 문고리 3인방, 십상시 등이 얽혀있다고 보는 의혹이 가시지 않고 있다"며 "직접 소통보다 문고리 3인방에 의존하는 대통령의 불통 통치 스타일이 근본원인이다. 대통령의 신년기자회견에서 이 부분에 대한 통렬한 사과와 청와대 비서실의 전면개편, 문고리 3인방의 해체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순실씨를 가리키기보다 문고리 3인방이나 십상시와 관련된 의혹을 짚는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다.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의 존재와 얼굴은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고, 국정농단 사태가 촉발된 2016년 가을경 제대로 드러났다. 흥미로운 것은 이 권력 서열 발언조차 박 전 경정의 생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2017년 3월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와 인터뷰를 가진 박 전 경정은 이 발언이 "'십상시'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밝혔다.

본인은 그저 대통령공직기강비서관실 행정관이란 책무에 충실하고자 진위 파악을 위해 최순실과 정윤회를 수차례 만났고, 이후 주변 물증을 수집하며 '권력 서열'을 확신했다는 얘기다. 23일 '박근혜-최순실-정호성 녹음파일' 2탄을 공개한 <시사저널>의 '시사저널TV'에 출연한 정두언 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근데 저는 일찌감치 국정 농단 사태가 터지기 전부터...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박근혜가 아니라 최순실이다, 그런 얘기를 제가 했었고, 또 박근혜 정권은 끝을 못 갈 것이다 그런 얘기도 했었는데. 그래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재임 기간 동안 입버릇처럼 한 얘기가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안 되고 될 수도 없다(는 거예요)."

정 전 의원은 MB마저 재임 기간 실제로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재차 확인했다. 그걸 알았다고 정 전 의원이 으스댈 일이 아니다. 그걸 알았거나 짐작이 가능했으면서도 정치인 박근혜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당시 새누리당도, 국정농단 사태 이후에도 비선실세 따위 아랑곳 않는 '친박'과 극렬 지지자들도, '정치인 박근혜' 시절부터 당선 이후에도 '형광등 100개 아우라'라고 칭송한 보수언론들도 '박근혜 정권' 창출과 관련해 통렬하게 반성한 적이 있는가. 

지난 17일에 이어 23일 <시사저널>이 '박근혜-최순실-정호성 90분 녹음파일'을 두 번째로 공개했다. 이를 듣는 심경은 그래서 더 참담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는 이미 알고 있었고, 언론을 통해서도 국정농단 사태에 앞서 점차 알려졌던 박근혜 정권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의 실체를 확인하는 일이었기에.

권력 서열 1위, '대통령 최순실'
 

2015년 정윤회 문건 유출 사건으로 구속 기소됐던 박관천 전 경정은 검찰 수사 과정에 고 최태민 목사의 딸이자 정윤회 씨의 전 부인인 최순실 씨가 권력서열 1위라고 주장했다 ⓒ TV조선 캡처

 
"최순실이 이 나라 대통령이었다."

국정농단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 2016년 12월, 이른바 '정호성 녹취' 파일을 보도한 <한겨레>의 기사 제목이다. 기사에서 '정호성 녹취'를 접한 검찰관계자는 복수의 언론에 "(적어도) 최씨가 1위라는 말은 맞다"며 "사실상 최씨가 대통령이었다. 나라를 운영했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하지만 관련 녹취는 극히 일부만 공개됐고, 국정농단 사태 와중에 그 일부만으로도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만약 그때 지금 공개된 분량의 녹음파일이 그대로 국민들에게 전달됐다면 그 공분은 배가되지 않았을까. 무려 2년 반이 지났고,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모두 구속수감 중임에도 국민들의 반응이 2년 반 전과 비슷한 걸 보면 말이다.

도합 1시간 26분여에 달하는 1차 파일은 박 전 대통령 재임 직전에 녹취됐다. 그러나 2차 파일에는 재임 기간에 녹음된 내용이 포함됐다. <시사저널>은 총 30분 분량 11건 중 9건이 재임 기간 중 녹음된 파일이라고 밝혔다. 2차 공개에 나선 <시사저널> 측은 그 배경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1차) '90분 파일' 공개 후 논란은 뜨거웠다. '국정농단이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최순실이 대통령 같다'는 등 대부분 놀람과 분노 섞인 반응이었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박 전 대통령 사면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일각에선 '녹음파일 조작'과 '대통령 취임 전이라 문제 될 것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심지어 '현 정부의 공작(工作) 아니냐'는 억측까지 있었다."

최소한의 상식을 갖춘 이라면, 이 녹취 파일을 직접 듣고 국정농단의 진위를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박근혜 사면론'을 펼치거나 '공작' 운운하는 이들은 '민주주의'와 '헌법' 그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이라 할 수밖에 없다. 1차 녹음 파일 중 웃을 수도, 그렇다고 울 수도 없는 황당한 내용을 하나 소개해 본다.

"그렇게 해봤더니 경회루 같다고 그랬대요." (최씨)
"그게 낫지. 품위가 있어야지, 이게. 기와 한 장만 딱.(박 전 대통령)
"과일 갖다 드릴까요?" (최씨)
"네?" (박 전 대통령)
"과일. 더 드세요." (최씨)
"근데 하여튼 기와 하나만 갖고, 이렇게 좀 청와대(라고) 하면 안 될까요? 이거는 좀 이상하지만. 이건 기완가 뭔가, 이게. 그러면 안 될까요?" (박근혜 전 대통령)
"그거는, 그거는 안 될 거 같아. 왜냐하면 사시는 데를." (최씨)
"좀 촌스럽죠. 상징적으로 만들어야지. 너무 똑같이 하려고 하니까 이상해졌잖아요." (박 전 대통령)
"낫토 드세요. (네?) 낫토 (최씨)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이냐고? 회의 중 의견이 맞지 않자 최씨가 박 전 대통령에게 '과일이나 먹어라', '낫토(나) 드세요'라며 면박을 주는 상황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매사, 대개의 녹음 파일 속 대화가 이런 식이다. '최순실 대통령'의 위세가 대단하다.

박 전 대통령은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지만, 최씨는 고압적으로, 말이 짧을 때가 허다하다. 마치 박 전 대통령의 의견은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무시와 면박으로 대응하기 일쑤다.

정 전 비서관의 대응은 한술 더 뜬다. 꼬박꼬박 '선생님'이란 호칭을 붙인 그는 극존칭을 쓰는 것은 예사요, 쩔쩔매가며 최씨를 떠받들었다. '권력 서열 1위'의 위엄이 녹취 파일 전반에 그대로 묻어난다. 문제는 자신이 대통령인듯 감정 이입을 한 최씨의 지시가 재임 이후 국정 운영에 고스란히 반영됐다는 사실이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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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사 역시 최순실씨가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 사진공동취재단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문화와 인문 교류를 통해서 더 가까운 나라로 발전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실제 박근혜 전 대통령 연설, 2013년 6월 29일 중국 칭화대)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끌고 갈 젊은이들이… 앞으로 문화와 인적 교류… 문화와 인문 교류를 통해서 더 넓은 확대와 가까워진 나라로 발전하길 바란다." (최순실 지시사항)

23일 JTBC <뉴스룸>이 직접 비교한 2차 녹음파일 속 최씨의 지시와 실제 박 전 대통령 연설 내용이다. 불행하게도, 녹음파일이 증명하듯 박 전 대통령이 최씨의 꼭두각시 혹은 '그림자 무사'였다는 흔적은 한 둘이 아니다. 기밀 사항인 대통령의 외부 일정을 수시로 먼저 보고 받은 것은 물론 참석 여부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최씨는 본인이 '대수비(대통령 주재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라고 지칭한 청와대 회의를 거의 관장하는 듯한 뉘앙스로 지시를 내렸다. 또 그 회의의 모두 발언에 일일이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고, 정 전 비서관이 연설문 등을 수시로 이메일을 보내 '첨삭'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내용도 나왔다. 국회는 물론 총리를 향한 메시지도 최씨의 입과 머리에서 도출됐다.

이밖에 녹음파일 속 최씨는 개인적인 일로 해외에 나가서도 정호성 전 비서관에게 업무 지시를 내렸고, 정 전 비서관은 한밤중에 최씨로부터 온 국제전화를 받아야 했다. 또 최씨는 정 전 비서관에게 정홍원 당시 국무총리를 압박할 것을 종용했고, 유민봉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역시 그 압박 대상자 중 한 명이었다. 녹음 파일은 일반인 최씨에게 이러한 지시를 받아야 하는 청와대 비서관의 '자괴감'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지난 2년여 동안 일련의 많은 일을 겪으면서 지난 공직 생활을 차분히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일들이 많았다."

작년 12월, 결심 공판을 위해 법정에 선 '문고리 3인방' 중 정호성 전 비서관이 남긴 최후 진술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후회. 정 전 비서관은 개인적으로 죗값을 치르면 그만이겠지만, 국정농단이란 역사의 과오는 개인의 후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권력 서열 1위' 최순실이 좌지우지한 박근혜 정권이 되돌린 역사의 시계, 그 퇴행의 시간이 가져온 사회적 비용을 국민들이 그대로 치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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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이 2017년 6월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리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키고 그에 일조했으며 그 아래서 권력과 권세를 누린 이들이 과연 제대로 된 죗값을 치렀는지 의문이다. 처절한 반성은커녕 '기억상실증'에 가까운 언행으로 다시금 퇴행을 반복 중인 보수야당의 현재를 보라. 박근혜 정권의 가장 큰 수혜자인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독재' 운운하며 대권행보를 거듭 중인 지금 말이다.

이 녹음파일이 더 빨리 공개되지 않았던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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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화 기자, 오늘은 프리랜서 글쟁이. 살다보니 시나리오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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