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을 살려라!'... 독일 시민들이 몰려든 사연

[동독인의 독일통일 이야기 ⑥] 오스탈기 그리고 탈북청소년의 추억

등록 2019.05.29 14:25수정 2019.05.2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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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박물관 입구 전경. ⓒ 강구섭

 
통일 전 동독의 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던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인근의 슈프레강변을 걷다 보면 날렵하고 활동적인 글씨체의 네온사인 간판이 걸린 출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이름하여 동독박물관(DDR-Museum).

2006년에 문을 연,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사설박물관인 이곳에는 구동독의 일상생활을 보여주는 물건이 전시돼 있다. 동독에 대한 향수가 붐을 이루던 시기에 생겨난 동독박물관의 겉모습은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이 있는 박물관의 도시 베를린에서 관람객 규모로 볼 때 상위권에 들 정도로 인기있는 곳이다.

자신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보며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심각한 표정을 짓는 모습, 그 시절은 어땠을까라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전시물을 둘러보는 모습 등 관람객의 반응은 다양하다. 동독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지만 거기 살았던 개인의 삶의 자취는 동쪽을 뜻하는 독어의 Ost와 영어의 노스텔지어(Nostalgie, 향수)가 결합된 '오스탈기'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분단이라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동독박물관은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대할 수 없는, 남북의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미래의 어느 날 우리도 동독박물관과 유사한 장소를 접하게 될까? 그곳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오스탈기 - 동독의 부활 
 

동독시절 인기있던 동서독 청바지. ⓒ 강구섭

 
통일 직후 몰려온 서독 상품에 진열대를 내주고 사라졌던 동독 상품들이 본격적으로 다시 선보여지기 시작한 때는 2000년 무렵이다. 통일 후 10년가량 지나 오스탈기 붐을 이루면서 지난 시간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동독 상품을 찾는 손길이 크게 늘어났다.

이에 동독 물건을 거래하는 사이트가 하나둘 생겼고 인터넷 경매 사이트인 이베이(E-bay)에서는 더 이상 구하기 힘든 동독상품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음료수, 식품, 세제 등 일상용품을 비롯해 동독인이 사랑했던 동독 신호등 도안을 이용한 캐릭터상품, 10년 이상 기다려야 구매할 수 있었던 동독 자동차 트라비의 매연을 담은 캔까지 상품의 종류도 다양했다. 지난 시절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든 상품으로 등장했다. 상품 종류가 계속 늘어나면서 동독상품 박람회가 따로 열릴 만큼 규모가 확대됐다.

오스탈기 붐은 동독 물건뿐 아니라 대중문화, 미디어까지 확산됐다. 동독 음악과 음료를 제공하는, 동독소년단(FDJ) 셔츠를 입은 사람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오스탈기 파티, 동독차 시운전 등 오스탈기를 이용한 다양한 이벤트가 생겼다.


점점 인기를 더하면서 민영방송의 주말저녁 주요 시간대에 동독의 생활을 보여주는 동독쇼까지 생겼다. 동독의 정치적·사회적 측면이 간과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주로 동독의 일상과 관련된 내용이 동독시절의 자료화면을 통해 다뤄지면서 큰 인기를 끌었고 서독인에게는 동독에 대해 알 수 있게 하는 기회가 됐다.
 

오스탈기 붐과 함께 생겨난 동독 자동차(트라비) 시승상품. ⓒ 강구섭

  
자발적 특명, 동독 초콜릿을 살려라

동독상품 붐이 불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생겨났다. 대표적인 사건은 구동독의 바르는 초코렛 뉴도지 살리기 운동. 1970년대 초반 동독에 등장한 뉴도지는 통일의 충격을 비껴가지 못했고 통일 후 10년 간 제대로 생산되지 못했다. 통일 초, 대중들이 새롭게 접한 다른 제품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오스탈기 붐 속에서 1999년, 다시 생산이 재개된 후 뉴도지는 한때 동독 지역에서 높은 점유율(18%)을 보이는 등 선방했지만 다시 생산이 중단됐다. 원자재 비용 상승도 이유였지만 무리한 품목 확대 등의 경영 실패가 주요한 원인이었다.

그런데 자금력이 약한 회사가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했다. 동독인 사이에서 뉴도지를 살리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한 열성팬은 뉴도지가 없어질지 모르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사이트에 게시했다.

"지난 주말 슬픈 마음으로 마지막 남은 뉴도지를 빵에 발라 먹었다. (중략) 새로운 뉴도지를 먹을 수 있게 되는 날 나는 신나게 파티를 열 것이다."
 

통일 후 사라졌다가 부활한 동독의 바르는 초콜릿 뉴도지. ⓒ 강구섭

  
열성팬들의 기부금이 회사에 답지했고, 매일 수백 명이 관련 사이트에 서명했다. 마트 진열대에 뉴도지가 없는 것에 항의하며 비치할 것을 요구했다. 뉴도지를 살리려는 동독주민의 강한 의지가 나타나면서 나중에는 동독의 주정부가 재정 투입을 검토하기도 했다.

열성팬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는지 뉴도지는 우여곡절 끝에 기사회생했고 통일 30여 년이 돼 가는 지금까지도 마트진열대에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지난 2009년 상품평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잡지의 테스트에서 서독의 경쟁 상품(뉴텔라)을 압도해 지금은 서독소비자로부터도 사랑받는 상품이 됐다.

경제를 살리는 오스탈기, 나를 찾는 오스탈기

통일 이후 동독기업이 문을 닫거나 헐값에 매각되는 일이 흔해지면서 나중에는 지역신문에서조차 이를 다루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생겨난 '뉴도지 회생 움직임'은 흔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무엇이 동독 주민을 움직였을까? 이는 1차적으로 만성적 실업에 신음하던 동독 지역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의 회사가 문을 닫게 되면 지역이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통일 후 문을 닫았다가 다시 살아난 동독세제 Fit가 바로 그러한 예다.

동독의 대표적 세제로 주방이나 생활용품 뿐 아니라 자동차, 심지어 인민군 탱크를 닦는데까지 사용됐다는 Fit는 통일 후 생산이 멈췄다가 1993년 한 서독인, 정확히 말해 서독 자본에 의해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는 지역에서 일자리를 살린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사용됐던 원료와 관련해 환경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환경보다 일자리 창출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지역으로부터 변함없는 지지를 받았다. 즉,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동독인의 관심이 오스탈기로 나타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독일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헤를레스는 "오스탈기 붐은 동독인이 자기를 지키려는 방어 전략에서 나타났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통일 후 하루아침에 변화된 삶의 환경에서 동독주민들은 적지 않은 혼란과 갈등을 경험했다. 특히 체제 전환과 함께 '동독의 것'이 일방적으로 부정되면서 큰 상실감을 느꼈다.

반면 동독인들의 눈에 서독인들은 통일 이후 발생한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으로 비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독인이 자기를 보호하고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방식으로 오스탈기가 나타났다는 것. 그 체제에 잘못된 것이 있었지만, 그곳에도 여전히 사람의 일상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오스탈기라는 것이다. 
 

동독 시절의 기억을 다룬 가욱 동독출신 연방대통령의 저서.

 
동독상품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동독인은 자신의 매장을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닌 문화와 정서를 파는 곳"이라고 언급했다. 오스탈기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물건을 다루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구동독 재야운동가 출신으로 독일 연방대통령을 역임했던 요아힘 가욱은 자신의 저서에서 구동독의 삶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동독주민의 정서를 '인간적 오스탈기'라고 설명했다. 나아지기는 했지만 통일 후 바뀐 삶의 환경에서 고통과 슬픔을 느끼던 동독인이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가시화돼 나타난 오스탈기를 자연스러운 정서로 이해한 것이다.

문제는 오스탈기 흐름 속에서 일부, 동독을 미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동독 체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간과한 채 동독 시절의 좋았던 것만 평가하는 태도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동독의 독재 역사 청산문제에 천착해온 역사학자 크나베는 "동독 체제가 강조했던 삶의 안정을 그리워한 나머지 실제와 다르게 동독을 기억하려는 흐름을 경계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가욱 전 대통령 또한 이를 정치적 오스탈기라고 일컬으며 불의했던 동독체제를 미화하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가욱 전 대통령은 2010년 한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반체제 활동으로 인해 대학입학 시험을 치를 수 없었던 자신의 자녀 사례를 통해 동독체제의 문제점을 언급했다. 통일 후 동독주민이 느끼는 어려움은 동감하지만, 동독체제의 문제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세월은 흘렀지만 오스탈기는 남아

붐을 이루던 시기만큼은 아니지만 오스탈기는 여전히 베를린 장벽을 비롯한 분단의 흔적과 함께 주요 관광 상품이 됐고, 동독주민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동독 일상의 기억을 담은 일부 동독상품도 계속 건재해 있고, 어떤 상품은 동독 뿐 아니라 서독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 통일 후 한 세대가 지나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수요도 자연스럽게 줄어들어 일부 상품은 성탄절 같은 명절에나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렇지만 동독에 대한 기억의 많은 부분은 계속 추억으로 남아 동독주민들이 오늘과 내일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지난 시간이 그러하듯.

몇년 전 탈북청소년의 남한생활에 관한 연구에 참여했을 때의 일이다. 조사문항에는 탈북청소년들이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기억을 자유롭게 적는 내용이 있었다.

이에 대해 응답자의 8%가 '행복했다' '좋았다'고 응답했고, 6%는 '다시 가고싶다'고 답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생각하며 그렇게 응답한 것이다. 그러나 연구보고서가 공개되고 며칠 후, 한 일간지에 "탈북청소년 7명 중 1명이 북한이 좋았다 돌아가고파"라는 제목으로 해당 연구결과를 인용한 기사가 실렸다. "탈북청소년의 학교적응력이 떨어지면서 북한을 동경하는 비율이 증가하였다"라는 게 기사의 요지였다. 곧 연구결과에 대한 해명요구가 쏟아졌고 연구책임자는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 했다.

탈북청소년들이 남한생활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있지만 저 건너의 기억은 그대로 그리운 추억이다. 우리 또한 힘들었지만 떠올리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남과 북의 비극적 역사로 인한 적대감이 치유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하지만, 그저 저 건너에서 태어난 그들의 기억은 그냥 추억으로 이해할 수는 없을까? 저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의 추억조차 우리식으로 재단하는 우리가 통일 후에는 그들과 잘 공존할 수 있을까? 동독의 오스탈기를 보며 든 생각이다.
#독일통일 #동독주민 #오스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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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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