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국민장' 주인공이었던 노무현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국장, 국민장, 그리고 국가장

등록 2019.05.29 08:23수정 2019.05.2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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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9년 5월 29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 분향소에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모습. ⓒ 유성호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마지막 국민장이 됐다. 노무현 서거 2년 뒤인 2011년 5월 30일,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국장·국민장법)'이 국가장법으로 전면 개정되면서 국민장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국가장 하나로 통일돼 있다. 국민장 명칭이 부활하지 않는 한, 노 전 대통령이 마지막 국민장의 주인공으로 남게 된 것이다.

사실, 국장과 국민장에는 명확한 차이점이 없었다. 정부가 주관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국장 경비는 국가가 전액 부담하고 국민장 경비는 국가가 일부 부담하며(국장·국민장법 제5조), 국장 때는 관공서가 쉬고 국민장 때는 그렇지 않다(같은 법 제6조)는 정도였다.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한 당일인 2009년 8월 18일 저녁,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조문한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장·국민장을 결정하는 문제는 선례와의 형평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선례를 보면 현직 대통령이 서거할 때는 국장, 전직 대통령이나 사회적으로 추앙받는 인물일 경우는 국민장으로 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례를 거론할 만큼 사례들이 축적돼 있지 않았다. 그때까지 거행된 국장은 1979년 박정희 장례식 하나밖에 없었다. 

또 선례를 거론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성문 규정이 없거나 불충분한 경우에, 불문법인 선례나 관행을 참고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미 1967년부터 명확한 성문 규정이 있었다. 국장·국민장법은 1967년 1월 16일 제정됐다. 이 법에 따르면 현직은 물론 전직 대통령도 국장으로 할 수 있었다. 이 법 제3조는 아래와 같다. 아래 조문에서 '각호의 1'은 '제1호나 제2호 중 어느 하나'라는 의미다.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가 서거한 때에는 주무부 장관의 제청으로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결정하는 바에 따라 이를 국장 또는 국민장으로 할 수 있다.
1. 대통령의 직에 있었던 자.
2.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훈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자.
 
이 규정에 따르면, 김대중 전 대통령뿐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도 국장으로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법률 규정이 있는데도, 이명박 정부의 행안부 장관이 '선례에 비춰볼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해야 한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의 경우에는, 결국 국장으로 거행됐다.

국민장은 그 명칭 때문에 사회장과 헷갈릴 수 있었다. 국장 아래에 국민장이 있었기 때문에, 국민장은 국가가 주관하는 행사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얼핏 사회장과 헷갈릴 수도 있었다.

헌법상으로 보면 국민이 국가보다 높다. 국민은 국(國)의 주권자다. 국(國)은 국민의 소유물인 것이다. 따라서 개념상으로는 국민장이 국장보다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국장이 국민장의 위에 있는 현실이 당연하게 인식돼 왔다. 헌법상의 국민 위상이 실제 현실에서는 구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국민장이 국장보다 낮게 인식된 데는 국장·국민장법 규정 외에 또 다른 사정도 작용했다. 김구와 이승만의 적대 관계가 어느 정도는 얽혀 있는 사안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최초의 국민장은 미군정인 1946년 7월 7일 거행된 삼의사(3의사) 국민장이다. 이봉창·윤봉길·백정기 세 독립투사의 장례식이 최초의 국민장이 됐다. 일부 서적과 논문에는 1949년 김구 국민장이 최초의 국민장이라고 적혀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삼의사 국민장은 미군정청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발의로 거행된 거족적 장례식이다. 지금의 서울 효창공원에서 이 국민장이 거행됐다.
 

1946년 7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삼의사 국민장. ⓒ 동아일보


1946년 6월 20일자 <동아일보>가 조기 게양, 음식점 및 주점 휴업, 부조금 갹출 등에 관한 안내문을 보도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삼의사 장례식은 국민적 관심과 참여 속에 거행됐다. 5만 명 정도가 참여한 대규모 장례식이었다.

당시에는 국장이란 개념이 없었다. 관련 법률도 없었다. 국장 명의의 장례식이 없는 상태에서 국민장이 거족적으로 거행되었으므로, 당시에는 국민장이 최고의 장례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태에서 1949년 7월 5일 김구 국민장이 서울운동장(훗날의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됐다.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긴급회의 결정에 따른 일이었다.
 

백범 김구. 서울 종로구 평동의 경교장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그런데 김구의 라이벌인 이승만이 깜짝 놀랄 일이 국민장에서 벌어졌다. 삼의사 국민장 참석자 5만도 많은 숫자였지만, 김구 국민장 때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백범 김구 평전>은 이날 광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100만 조객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된 장례식은 분노와 애통과 오열로 뒤범벅이 되었다. 수천 개의 만장이 서울 시가지를 뒤덮고 소복단장한 여인들의 호곡은 하늘에 메아리쳤다. 장례 기간 동안 경교장을 찾은 조문객이 124만여 명에 이르고 영전에 혈서를 하거나 혈서로 조문을 한 청년, 할복을 기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에서는 주석이었지만, 1949년 당시에는 공직이 없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이 국민들에게 장례식 참석을 강권하고 독려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100만이라는 거대한 숫자가 그의 국민장에 참여했다. 국가통계포털 사이트에 따르면, 1949년 당시 남한 인구는 2019만이었다. 국민 5%가 동대문운동장 주변을 가득 메웠던 것이다.
 

1949년 7월 6일자 <경향신문> 1면을 메운 김구 국민장 기사. ⓒ 경향신문


김구 저격범 안두희는 미군정과 더불어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았다. 100만 인파에 대한 보고를 듣고 이승만은 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그로부터 3개월 뒤, 이승만이 법규 하나를 제정했다. 대통령령 제194호 국장령이다.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이 아니라 대통령이 발포하는 명령이었으니, 이승만의 의중이 반영된 법규였다. 이 법규를 제정할 때, 이승만은 국민장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국장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국가가 주관하는 장례식 명칭을 국장으로 명명한 것이다. 국장령 제1조는 "국가에 위훈을 남기고 서거한 자에 대하여는 그 장의를 국장으로 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국장령으로 인해 삼의사 국민장과 김구 국민장의 위상에 문제점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두 국민장 모두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거행됐다. 삼의사 국민장을 결정한 민주의원은 미군정청 자문기관이지만, 남한 국민들 사이에서 가장 공적인 기구였다. 이 두 건의 국민장이 국장령 제정과 동시에 위상의 혼란을 겪게 된 것이다.

국장령이 제정된 시점은 100만 조문객이 김구 국민장에 참여한 때로부터 불과 3개월 뒤였다. 김구 국민장 직후에 제정된 법령 안에 국민장은 없고 국장만 있었으므로, 국민들로서는 '김구 국민장은 어떤 성격의 것이었나?' 하고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와 삼의사의 위상을 배려해주고자 했다면, 국장 대신 국민장이란 용어를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은 김구·삼의사 장례식 때 사용된 국민장이란 용어를 법령에 담지 않았다. 그러니 국민들로서는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국민들이 느꼈던 혼란은 1956년 5월 31일자 <경향신문>에 올라온 독자의 질문에도 나타난다. 영등포에 거주하며 필명이 'ㄱㅂㄹ'이라는 독자가 "국장·국민장·사회장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오"라고 요청했다. 이에 대한 <경향신문>의 답변 중에 "국장은 국가가 호상(護喪, 장례 주관자)이 되고 국민장은 국민이, 사회장은 사회(각 사회단체) 대표가 호상이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라는 대목이 있다. 국장이나 국민장이나 어차피 다 정부가 주관하는 것인데, '국장은 국가가 주관하고 국민장은 국민이 주관한다'고 모호하게 답변했던 것이다.

이런 답변으로 국민들의 의문이 해소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정부가 주관하는 국민장을 두 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에 국장과 국민장의 차이가 여전히 헷갈렸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 국민들이 경험한 국민장 대신 국장이란 용어를 법령에 담은 이승만의 조치로 인해, 삼의사와 김구의 국민장은 국장보다 한 단계 낮은 장례식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국민장은 '국민적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최고의 예우를 해줄 필요가 없는 인물'을 위한 장례식으로 인정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김구와 삼의사가 '국민적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국장을 해줄 필요가 없는 인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서 박정희 정권이 1967년 국장·국민장법 제정을 통해 '국민장을 국장의 아래에 두는 공식적 입법 조치'를 단행했던 것이다.

그런 국민장의 마지막 주인공이 노무현이다. 노무현도 국장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지만, 당시 대통령이 그를 위해 국장을 해줄 리는 만무했다. 김구와 삼의사처럼 노무현도 '국민적 존경을 받기는 하지만 최고의 예우를 해줄 필요가 없는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 현대사의 국민장에는 그 같은 불합리가 내재돼 있었다. 국민적 존경의 대상으로 얼마든지 최고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이 정적의 임의적 재량에 의해 '최고 예우를 해줄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이 숨어 있었다. 그런 불합리가 노무현 국민장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노무현이, 불합리한 국민장 제도의 마침표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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