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원한에 사무처 부른 이름 '이노무세키'"

[일제 강제징용 현장을 가다②] 부관연락 터와 똥굴마을

등록 2019.05.29 09:44수정 2019.05.29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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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제징용’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군함도’뿐만 아니라 일본 곳곳에 그 현장이 많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조세이 탄광, 부관연락 터와 똥굴마을, 타가와 석탄박물관과 휴가 묘지, 오다야마 묘지의 ‘조선인 조난자 위령비’를 4회에 걸쳐 소개합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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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우즈오카 사다오(전직 역사교사)씨가 간몬연락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시모노세키, 부관연락선, 간몬연락선, 간몬터널, 똥굴마을.

일제 강제징용과 관련 있는 장소들이다. 기자는 5월 24~27일 사이 '우리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통일촌'·'통일엔평화' 회원들이 마련한 '일제 강제징용 유적지 답사'에 참석해 그 현장을 둘러봤다.

시모노세키는 고향을 떠나 짐짝처럼 배에 실려 온 대다수 조선인들이 일본에 도착하여 첫발을 딛은 곳이다. 이곳에서 그 고통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일행 중 누군가 그 고통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는 "이노무세키"라 말했다.

시모노세키에는 부관(관부)연락선과 간몬연락선 선착장이 있다.

일행을 안내한 일본인 우즈오카 사다오(전직 역사교사)씨는 "이곳으로 온 조선인들은 북해도와 구주 등 여러 탄광으로 보내졌고, 보내기 전 며칠은 부둣가 창고에 갇혀 지냈다고 한다"고 했다.

조선인들은 해변가 컨테이너 임시숙소에서 감시와 통제 속에 대기하다가 노동력이 요구되는 일본 각지로 이동했던 것이다.

시모노세키는 또 해방 이후 귀국길이 시작된 곳이다. 조선인의 귀국길도 쉽지 않았다. 방역이 되지 않아 전염병이 돌아서 죽기도 하고, 자연재해로 죽기도 했다. 또 귀향선을 탈 수 있는 여비가 부족해 고깃배를 타고 가다 난파되어 주검으로 떠오르는 조선인도 많았다.


귀국할 최소한의 여비가 없어 일본 땅에 그대로 주저앉은 이들도 많았다. 시모노세키는 '원한의 땅'이 되었다. 송명희(통일촌)씨는 "시모노세키를 원한에 사무처 부른 이름이 '이노무세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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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표지석. ⓒ 윤성효

 
"해저터널 공사 등에 조선인 대거 동원"

부관연락선.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 하관)를 잇는 연락선이다. '부산'과 '하관'의 글자만 따서 '부관연락선' 내지 '관부연락선'이라 불렀다. 이 연락선은 1905년 9월부터 시작되었다.

부관연락선은 일제의 대륙침략과 조선인 강제동원의 연결 창구였던 것이다. 부관연락선은 운행 40여년 중에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의 수송 인원이 나머지 기간의 3배에 달했다고 하니, 중-일 전쟁으로 징용과 징병이 집중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시모노세키에는 간몬연락선 선착장이 있다. 간몬연락선은 혼슈(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와 큐슈(후쿠오카-모지)를 잇는 연락선이다.

이를 통해 조선인들은 주로 기타큐슈 일대의 탄광으로 보내졌다. 간몬연락선은 1942년 (간몬)해저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주요 수송 수단이었다. 지금은 이곳에 표지석이 하나 있다.

간몬터널은 야마구치현과 후쿠오카현을 잇는 주요 (해저)도로다. 이 터널은 전체 3.6km로 그 중 해저 구간은 1.14km다. 1936년 9월 공사를 시작해 6년만인 1942년 7월에 개통했다.

이 공사 기간은 중일전쟁 시기와 비슷한데, 일본이 전시 중 안정적으로 물자와 병력을 나르기 위해 해상보다 안전한 해저 운송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공사에도 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재일동포와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구체적인 자료는 없고 일본은 침묵하고 있지만 간몬터널 공사에 조선인 희생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통일촌은 전했다.

우즈오카 사다오씨는 "1943년 11월 간몬연락선이 미국의 기뢰에 의해 침몰되었고 그 때 582명이 희생되었다. 그 속에 창씨개명한 조선인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또 그는 "바다 밑에 철길을 놓는 공사가 벌어졌고 당시 희생자들을 기리는 비석이 있었는데, 공사 종사자들의 이름이 적힌 비석이 있었고, 그 속에는 조선인 5명의 이름을 본 적이 있다"며 "이름이 적힌 것으로 봐서 그 사람들은 단순한 노무자가 아니라 기술자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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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엄장범씨가 시모노세키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윤성효

 
떠나지 못한 조선인들이 모여 살기 시작

똥굴마을. 야마구치현에 있는 조선인 집단 거주지역이다. 원한의 시모노세키를 떠나지 못한 가난한 조선인들이 살기 위해 모여 들었고, 마을을 형성했던 것이다.

똥굴마을이라 불리는 이유는 이곳이 처음에는 혐오시설이었던 분뇨처리장과 화장터, 공동묘지, 형무소 등이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이 기피하는 산 중턱에 터전을 잡아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곳 역시 재일조선인의 역사 현장이다.

재일교포 엄장범(86)씨는 "시모노세키와 부관연락선, 간몬연락선은 원한이 배여 있다. 1세대 동포들의 아픔이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며 "강제로 이곳에 끌려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원한이 사무친 곳"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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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마구치현에 있는 조선일 집단 거주지역인 '똥골마을' 일부.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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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타규슈시 모지 역사. ⓒ 윤성효

#일제 강제동원 #기타큐슈 #시모노세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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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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