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그저 자전거 타고 싶었던 사우디 소녀가 이뤄낸 변화

[리뷰] 영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와즈다>

19.05.30 11:50최종업데이트19.05.30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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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 최초의 상업영화인 <와즈다>는 당찬 10대 소녀의 눈을 통해 사우디 여성의 현실을 보여준다. ⓒ (주)프레인글로벌

 
와즈다는 별나다. 발목까지 오는 컨버스 스니커즈에 보라색 끈을 끼워 신는다. 친구들의 밋밋한 단화 사이 와즈다의 신발은 유독 시선을 잡아끈다. 알록달록한 팔찌를 좋아하고 발톱에 파란 매니큐어를 몰래 바르기도 한다. 어머니가 '사탄의 노래'라 부르는 팝송을 듣는 건 와즈다의 취미 중 하나다. 와즈다의 요즘 관심사는 자전거다. 동네 가게에 새로 들어온 초록색 잘 빠진 자전거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자전거를 못 탄다는 동갑내기 친구 압둘라의 콧대를 눌러주는 게 그녀의 목표다.
 
사실 와즈다는 별나지 않다. 10대 소녀가 외모와 패션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음악 감상도 마찬가지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은 학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좋아하는 가수가 컴백하면 득달같이 몰려와 일명 '차트 줄 세우기'하는 기현상의 원동력도 10대 소녀들이다. 자전거 또한 굳이 성별을 나누지 않아도 다수가 좋아하는 이동수단이자 취미다. 
 
와즈다가 괴짜로 보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사우디아라비아에 사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여성 인권은 바닥을 친 지 오래다. 사우디는 지난 2018년 6월 전까지 공식적으로 여자에게 운전을 허용하지 않았다. '마흐람'이라 불리는 제도 때문에 여자는 남자 후견인의 허락 없이 취직, 입학, 계좌 개설, 취업 등 법적 활동을 할 수 없고, 심지어 병원에서 치료도 받을 수 없다.

<와즈다>는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보여줄 뿐이다. ⓒ (주)프레인글로벌


당연히 와즈다는 자전거도 타면 안 된다. 와즈다의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면 처녀막이 찢어져 임신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대지만, 실상은 여자를 억압하는 사우디의 율법 탓이다.
 
집 밖을 나설 땐 몸을 검은 천으로 감싸고, 남자의 눈을 피해야 정숙한 여자가 된다. 깐깐한 학교 선생님은 "여성의 목소리는 벗은 몸과 같다"며 침묵을 요구하고, 와즈다의 당찬 행동이 못마땅한 어머니는 사사건건 그녀와 부딪힌다.

소녀의 어머니는 가부장제에 찌든 전형적인 사우디 여성이다. 불합리한 현실에 분노하기보단 순응한다. 그녀의 지상과제는 남편에게 사랑받는 것. 불편하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긴 생머리를 유지하고, 남편의 손님들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식사를 때운다. 둘째 부인을 들이려는 남편이 못마땅하지만 마음껏 화를 내거나 의사표명을 할 순 없다. 혹시 화가 나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래를 잘하지만, 가수가 되는 건 큰일 날 일이다. 다른 남자 앞에서 노래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외설적이다.

<와즈다>는 사우디 여성의 삶을 10대 소녀의 눈으로 아주 담담히 담아낸다. 사우디 여성이 겪는 성희롱과 차별, 잘못된 고정관념, 그로 인해 펼치지 못한 꿈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와즈다는 작금의 현실을 누군가에게 고발할 생각이 없다. 소리 높여 각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어린 소녀는 그저 자전거를 타고 소꿉친구 압둘라와 시합을 해 이기고 싶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런 점이 관객의 마음을 더욱 움직였다. 여성의 몸으로 자유롭게 자전거를 타기 위해 차별의 원흉인 코란을 공부하는 와즈다의 역설적인 모습은 강렬한 호소력을 가진다. 자유롭고 싶은 소녀의 모습을 그저 보여만 주고, 사안에 대한 고민은 관객에게 일임한 감독의 한 수가 빛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작은 10대 소녀 와즈다의 귀여운 반항은 영화를 넘어 현실에도 영향을 미쳤다. ⓒ (주)프레인글로벌


와즈다가 그나마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나이가 어려서다. 와즈다의 아버지는 가정폭력이 비일비재한 사우디에서 보기 드물게 다정한 사람이다. 하지만 와즈다가 한 명의 여자가 됐을 땐, 지금처럼 그녀의 행동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친구 압둘라도 그렇다. 지금은 대등한 관계지만 언제 어긋날지 모른다. 와즈다의 부모도 처음엔 서로 사랑하는 친구 사이였다. 나이를 먹으면, 또는 결혼을 하면 여성을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는 평범한 사우디 남성으로 변하지 말란 보장은 없다.
 
항상 소녀를 나무라는 엄격한 여선생의 "와즈다는 과거의 나 같다"는 발언도 꽤나 의미심장하다. 자유분방한 와즈다의 모습이 규율이란 족쇄에 잠식돼 사라질 수 있단 암시에 입맛이 쓰다.
 
영화 <1987>의 대학생 김태리(연희 역)는 데모하러 가는 강동원(이한열 역)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집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화마에 물 한 컵 뿌린다고 달라지지 않는 것처럼 미약한 힘으로 권력에 거스르는 건 의미 없는 일이 아니겠냐며, 헛된 몸부림에 목숨까지 내던질 가치가 있느냐는 물음이다.
 
답은 <와즈다>가 보여준다. <와즈다> 개봉 이듬해인 2013년 사우디 정부는 율법을 고쳐 여자도 공공장소에서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했다. 고작 영화 한 편이 기원전부터 굳건히 세워진 이슬람 율법을 흔든 것이다.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으로 감싸고 남자 후견인과 동행해 제한된 지역에서만 탈 수 있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한 걸음이다. 결국 지난해 6월 사우디 여성도 운전면허를 딸 수 있게 된 데엔 <와즈다>의 공이 적지 않다.
 
<와즈다>의 결말부는 '어떻게 해야 세상이 바뀌는가'란 질문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다. 코란 암송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자전거를 사겠다는 말에 소녀의 상금은 팔레스타인의 형제들에게 강제로 '기부'된다. 자전거를 못 사게 된 와즈다와 남편의 두 번째 결혼을 막지 못한 어머니는 옥상에 올라 숨죽여 운다. 하늘엔 아버지의 결혼을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한창이다. 어머니는 남편을 위해 입으려던 붉은 드레스 대신, 딸을 위한 자전거를 샀다. 가부장제에 한 번도 거역한 적 없는 어머니는 처음으로 남편이 좋아하는 긴 생머리를 짧게 쳐내고, '처녀막을 찢을' 것이라 믿었던 자전거를 딸에게 선물한다.
 
자전거는 오롯이 운전자의 힘으로 움직이는 운송수단이다. 엔진의 힘으로 나가는 자동차와 달리 자전거는 스스로 페달을 밟아야 한다. 즉 자전거는 홀로서기의 은유로 볼 수 있다. <와즈다>의 자전거도 홀로서기에 대한 사우디 여성의 갈망을 상징한다. 결국 자전거를 얻지 못해 낙심한 와즈다를 위로하며 자전거를 사주는 어머니의 모습은 사회적 약자도 연대를 통해 홀로서기에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엿보게 한다.
 
사회 구조부터 뒤틀린 사우디에서 여성 인권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불평등한 제도의 폐지다. 하지만 <와즈다>는 여성 스스로 홀로 서기 위한 노력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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