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데모한 대학생 골라내는 '편의대'였다"

부마항쟁 관련 홍성택씨 증언 나와... "평생 미안함, 사과하고 싶다"

등록 2019.05.31 21:43수정 2019.05.3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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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택(61)씨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민간인처럼 옷을 입고 사복경찰과 함께 활동하며 시위 대학생을 찾아내 알려주는 활동을 한 '편의대'였다고 고백했다. ⓒ 윤성효

 
"40년이나 되었지만 그때 학생들한테 너무 미안하다. 평생토록 계속 미안해하면서 살아왔다.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싶다."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편의대' 활동을 했다고 고백한 홍성택(61)씨가 경남 창원을 찾아 한 말이다. 홍씨는 31일 저녁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마산사무소에서 기자들을 만나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편의대'는 '편안한 옷(의)을 입고 움직인 조직'이라는 뜻이다. '편의대'는 군인이지만 대학생 등 민간인처럼 보이게 옷을 입고, 정보형사(사복경찰)들과 활동했다. 편의대는 집회 참가한 학생을 찾아 경찰이 잡아가게 도왔다.

신학대학을 다니다 1978년 입대한 홍씨는 1981년까지 군대에 있었다. 그는 특전사(공수부대) 소속으로 일등병일 때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편의대 활동을 했다.

최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편의대'가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자 그가 부마항쟁(1979년 10월 16~20일) 때도 같은 조직이 있었고, 자신이 그 활동을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21살이던 1979년 부마항쟁 직후 마산에 왔다. 그는 사복경찰과 함께 움직였고, 경남대 운동장에서 텐트를 치고 며칠 지내기도 했다. 그는 편의대 활동 방식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대학생 서너 명이 다방에 앉아 있었다. 당시는 학생들이 모여 있으면 전부 의심부터 했다. 형사가 접근해 보라고 하면 가서 했다. 서울에서 온 대학생이라고 소개하면서 접근했고, '너희들은 데모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학생들이 시위에 가담했거나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형사한테 사인을 보내서 알려주었다. 사인은 제가 손을 드는 것이었다. 저도 같이 있다가 연행이 되어 같이 버스에 타서 경찰한테 많이 맞았다. 그 뒤 저는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뒤 학생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홍씨는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함께 연행되었기에 그 학생들은 저의 신분에 대해 전혀 몰랐다"라며 "(그들은) 저한테 속은 것이다. 두 번 그렇게 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당시 편의대 일을 누가 지시했는지, 어떻게 보고가 되었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사복경찰이 편의대 활동을 보고했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홍씨는 구체적인 특전사 부대 정보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는 "특전사 전체에 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겠다"고 말했다.

편의대 증거 여부에 대해, 그는 "군대라는 조직도 그렇고 당시는 특히 유신시대라 관련 증거를 남기는 게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부마항쟁 이후 광주에서도 시위가 있을지 여부를 알아내는 게 당시 '편의대'의 한 역할이었다고 그는 증언했다. 당시 유신정권은 광주학생운동(1929년 11월 3일) 즈음에 광주에서도 시위가 있을 것으로 보았다.

제대 뒤에도 편의대 활동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그가 마음을 바꾼 때는 바로 광주민주화운동 동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공수부대 출신으로, 했던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일등병으로 차출되어 간 특전사였지만, 국가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했다. 군 제대 뒤 3년 정도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84년 고려대 봄축제에 우연히 갔다가 광주항쟁을 다룬 필름을 봤다. 그것을 보고는 편의대 활동이 우연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 한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었구나 생각했다. 그 때 경찰에 끌려간 대학생들한테 항상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이후로 민주화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홍성택씨는 앞서 부마항쟁기념재단 부산사무소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부마항쟁기념재단은 '편의대'를 비롯 최근 새롭게 드러난 몇몇 사실에 대해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박근혜 정부 때 만든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가 보고서를 냈지만 '편의대' 관련 증언은 담기지 않았다.

허진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위원은 "부마항쟁 당시 편의대 활동이 있었다는 증언이 나온 만큼, 군부대에 관련 자료를 요청할 필요가 있다"며 "새롭게 드러난 다른 사실들까지 포함해, 보고서를 대폭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 진상조사보고서(안)>에는 1979년 10월 19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육군본부에 "공수특전여단 1개 대대를 마산으로 이동시켜 39사단장을 지원하라"고 지시했고, "그 다음 날 오전 1공수특전여단 2대대 병력 235명이 마산에 도착해 39사단에 배속됐다"는 기록이 있다.

홍성택씨는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활동을 하는 줄 몰랐다"고 했다. 그는 "그 뒤 마산에는 여러번 왔다. 경남대 쪽으로 찾아갈 용기가 없어 가보지는 못했다"고 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박정희 유신독재 철폐를 외치며 저항한 민주항쟁으로, 마산(창원)에서만 505명이 연행되어 59명이 구속되고, 125명이 즉결심판, 321명이 훈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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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택(61)씨는 부마민주항쟁 당시 군인 신분으로 민간인처럼 옷을 입고 사복경찰과 함께 활동하며 시위 대학생을 찾아내 알려주는 활동을 한 '편의대'였다고 고백했다. 오른쪽은 허인수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위원. ⓒ 윤성효

#부마민주항쟁 #편의대 #홍성택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유신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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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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