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졸, 비정규직 20년, 마흔셋 여자의 일

경심 지음 '버티는 마음'을 읽고... 잘 버티겠습니다만

등록 2019.06.09 20:13수정 2019.06.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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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 고용 노동부에 가서 취업 교육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프리랜서 작가로 최저 생활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 더 나아질지, 더 나빠질지, 아니면 그냥 지금 같은 수준일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뭐라도 해야 되겠다 싶어서 취업 교육을 선택한 터였다.

특수고용직이어서 100% 지원을 받을 수는 없어도 나에게 맞는다면 배워야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 과정이 눈에 들어왔다. 직업상담사 2급. 신청하러 가서 상담을 받아 보니 준비 기간이 3개월 정도여서 부담도 없었고, 직업을 상담해 주는 일도 크게 부담이 없겠다 싶었다.
 

쓸쓸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부유했다. 열심히 살았는데 고작 여기인가. ⓒ Pixabay

 
만약 지금부터 10년 정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으면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서류가 통과되어서 50% 지원이 가능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일배움카드를 발급받으려면 또 한번의 상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시 오랜 시간을 걸친 대기 끝에 드디어 내 차례가 돼서 필요한 면담을 했다.


"사이트 들어가서 취업이 잘 되는지도 잘 살펴보세요. 그런데 사실 지금 선생님 나이로는 좀 힘들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이 자격증 공부를 한다는 게 의미 없는 일 아닌가 싶어서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래서 저 같으면 그렇게 상담 안 해드렸을 거예요. 솔직히 취업이 어려워요. 많아야 40대 초반 분들이 듣는 과정이에요. 이 자격증을 따고 컴퓨터 능력 자격증도 다시 따러 오세요. 컴퓨터 능력도 중요해서요."

건조한 팩트 전달이었다. 해봤자 안 된다는 이야기에 내가 그린 미래가 한 순간에 '펑' 하고 사라졌다. 상담을 마치고 전철역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위에 섰다. 쓸쓸한 질문들이 머릿속에 부유했다. 열심히 살았는데 고작 여기인가. 사회가 만든 제도 안에 살고,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지만 혜택을 받아야 하는 순간에는 왜 묘한 굴욕감과 비굴함이 느껴지는 걸까.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하다'는 말의 잔인함
 

'버티는 마음' 표지 ⓒ 현암사

 
경심 작가의 에세이 <버티는 마음>은 여성 해양플랜트 구조설계 엔지니어로 살면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더욱 고군분투한 이야기다. 20년간, 여성이 거의 없는 직군에서 그것도 비정규직으로 버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늠이 되어서 '버티는'에 밑줄이 확 그어졌다. 내가 지금 주말 프로그램 하나를 하면서 명목상 방송작가라는 끈을 잡고 간신히 버티고 있는 비정규직 글쓰기 노동자 신분이니 더 공감이 갈 수밖에.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비정규직이 생기기 시작한 초반의 이야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여러모로 구분된다. 일단 옷부터 다르다. 비정규직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고, 또 공식적인 회의나 사내교육 프로그램에도 참여가 배제되었다. 당시 계약 조건은 시급으로 계산되었기에 일을 못 하면 그만큼 수입이 줄어드는 구조라 모든 피해는 계약직으로 종사하는 직원의 몫이었다. 말하기 치사한 영역까지 차별은 존재한다.
 
"명절이나 휴가 시즌이 되면 H중공업 직영 소속에 있던 사람들은 떡값에 휴가비를 챙겨갔지만 협력사 소속으로 있던 우리는 휴가 기간만큼 수입이 줄어 오히려 더 궁핍한 생활을 했다." - <버티는 마음>
 
방송국도 마찬가지다. 지금 일하고 있는 방송국은 그나마 명절에 선물세트를 보내주는데, 그 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 방송국이 파업을 하거나 방송이 쉴 때, 편당 원고료가 책정되기 때문에 그만큼 비정규직의 수입은 줄어든다.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강도 높은 노동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당연하게 차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퍼 을의 신분으로 함부로 나설 수가 없다. 가장 무서운 '계약'이라는 게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방송국도 보통 6개월에 한 번씩 개편을 하는데, 이때 피디의 이동에 따라서 작가의 운명도 결정된다. 하루아침에 잘리기도 하고, 계속 가기도 한다.

자리를 잡은 베테랑 작가의 경우는 해당하지 않겠지만, 개편 때가 되면 모두 촉각을 곤두세운다. 어떤 인사이동이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6개월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살벌한 의자놀이를 6개월마다 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비인간적이다.
 
"변화의 물결 한 가운데서 권고사직으로 비워진 임원들의 자리는 사업 부문의 축소를 말해주었다. 나 또한 새로운 조직으로 배치가 변경되었다. … 그 와중에 인사팀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재계약에 대해 말씀하셨고, 추가 계약 6개월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같은 팀원이 되신 부장님과 차장님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재계약이 될 수 있었다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다시 6개월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내게 주어진 6개월이 어떤 시간이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는 계약서에 날인했다." - <버티는 마음>
 
 
6개월짜리 목숨이 운 좋게 연명이 된다 해도 항상 운이 좋을 순 없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는 생기기 마련이다. 비정규직의 경우, 특히 4대 보험 보장을 받지 못하는 방송작가의 경우는 실업급여조차 받을 수가 없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그러면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어쩌다 한 번씩은 모를까 이런 시간들이 불쑥 자주 반복된다는 건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뒤흔드는 일. 열심히 살았는데도 위협받는 불안한 일상은 현재는 물론 미래마저 갉아먹는다.
 
"결핍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하지만 나에게 결핍은 결코 꿈이 될 수 없었다.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절벽을 기어오르면 나를 기다린 것은 아득한 절망이었다. 셀 수 없을 만큼 결핍의 골짜기로 몰리고 다시 오르면서도 여전히 난 행복하지 않다.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단 말이 내겐 그 무엇보다 잔인한 말이었다." - <버티는 마음>
 
지쳐서, 지긋지긋해서, 어떻게든 탈출구를 찾고 싶어서,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바닥에서부터 무슨 일이든 해보겠다는 각오도 한다. 하지만 낮고 낮은 마음으로 한 각오도 현실에선 종종 무시당한다. 내 학력과 경력을 모두 지우고 그저 단순 노무직을 하겠다고 이력서를 몇 군데 넣은 적이 있었다. 연락이 온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설계직이 아닌 새로운 일은 최저 시급을 감수한다고 해도 경력도 없고 나이는 많아서 면접 기회조차 없다. 창업을 해야 한다지만 설계가 아닌 다른 일엔 경험이 없다. 경험을 쌓기 위해 학력, 경력란을 모두 비우고 허드렛일부터 배우려 해도 나이 때문이 받아주는 곳이 없다." - <버티는 마음>

버티는 것 또한 내 삶이라 할지라도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저자도 실업 급여 지급이 끝나기 전에 내일배움카드를 발급받았다. 실용패션과 프랑스 자수를 배우다가 자격증을 따놓는 것이 유리하겠다는 생각에 바리스타 과정도 들었지만 결국 소용이 없었다.

남편의 외벌이로 4인 가족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통장의 잔고가 줄어들 때마다 피가 마른다. 저자도 재취업을 할 수밖에 없겠다 싶어서 워크넷에 입사지원서를 내고, 일자리 박람회에 가서 상담 의자에 앉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먼 길을 돌아 제자리에 갔다.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고 또다시 이겨낼 준비를 한다. 다시 시작된 연으로 적어도 10년은 더 견뎌야 한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강산이 또 한 번 바뀌는 그날까지 열심히 달릴 수 있기를 기도한다." - <버티는 마음>
 
40이 넘은 사람, 아니 어쩌면 버텨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10년이라는 시간이 절실하지 않을까. 나도 취업 창구의 문을 두드릴 때, 10년은 견딜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찌어찌 돌고 돌아 비정규직 글쓰기 노동자로 여전히 살고 있는 지금의 내 목표도, 10년은 버티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별일이 없는 한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며 연명해야 한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버티는 것 또한 내 삶이다. 

'2018 백상예술대상'에서 방송인 송은이씨가 'TV부문 여자 예능상'을 수상하자, 김숙씨가 "다들 뭐라는 줄 알아요? 아, 방송가에서 버티면 되는구나"라고 놀렸다. 그때 송은이씨가 진지하게 이런 말을 했다. "야, 버티는 것도 쉽지 않아." 금세 사라지는 방송계에서 26년을 버틴 내공이 담긴 말이었다.

맞다. 나도, 우리도 결코 쉽지 않은 버티기를 기특하게 잘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적어도 가진 것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잔인한 말에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던지면서 말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보다는 덜 위태롭고 덜 치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너무 순진한 생각일까. 적어도 온 힘을 다해 버티는 마음이 굴욕감과 수치감으로 돌아오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버티는 마음

경심 (지은이),
현암사, 2019


#버티는 마음 #경심 작가 #현암사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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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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