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달치 전기요금 1만원... "생각의 차이일뿐, 나는 잘 산다"

[인터뷰] 자동차와 냉장고 없이 20년째 사는 윤호섭 교수... "쩨쩨하다고 해도 상관없어"

등록 2019.06.05 22:36수정 2019.06.05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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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섭 국민대학교 명예교수. 서울 강북구 자신의 그린캔버스 작업실에서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원전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작업한 포스터를 소개하고 있다. ⓒ 유성호


자동차는 없어도 냉장고 없는 생활은 상상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 환경 디자이너로 알려진 윤호섭(76) 국민대학교 명예교수다. 그는 자동차와 냉장고 없이 20여 년째 살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발생한 후에는 한때 작업실에 전기와 수도를 끊고 3년간 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누군가는 '괴짜'라고 부르고, '국내 1호 그린 디자이너'란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서울 인사동에선 '티셔츠 할아버지'로 통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모든 호칭을 거부한다. 자신을 '윤호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소개한다.

한때 그는 잘나가던 광고 디자이너였다.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ROTC(학생 군사훈련단)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68년 합동 통신사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이름도 떨쳤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서울올림픽, 세계잼버리대회, 광주비엔날레 등 각종 국제행사의 디자인에 참여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펩시 한글 로고도 그가 만든 것이다.

이랬던 그가 24년 전 삶의 방식을 바꿨다. 매혹적인 광고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소비를 부추기던 상업 디자이너에서 그린 디자이너가 됐다. 그는 왜 변신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품고 지난 5일 그의 작업실이 있는 서울 강북구 우이동을 찾아갔다. 

"난 윤호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유성호

 
- 냉장고와 자동차 없이 사는 괴짜, 국내 1호 그린 디자이너, 인사동 티셔츠 할아버지 등 수식어가 많다. 가장 마음에 드는 수식어는 무엇인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실제보다 과장된 표현이다.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수식어로 나를 평가하는 게 언짢다. 특히 '국내 1호 환경 디자이너'란 표현은 줄을 세우는 것 같아 질색이다. 바람과 물, 흙에 수식어를 붙이지 않듯이 '윤호섭'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그린 디자이너란 무엇인가?
"그린이란 용어는 빼도 된다. '디자이너'란 표현이 더 맞다. 디자인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니다. 공해를 일으키는 사람이란 낱말도 아니다. 근데 왜 디자이너란 말 앞에 그린이란 단어가 들어가야 하는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용어다."

- 상업 디자이너의 길을 걷다가 변신한 이유가 무엇인가?
"대량 생산을 부추기는 디자이너였다. 물건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 사업자에게 이익을 안겨주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지난 1995년 국민대학교에 조형학과가 만들어지면서 강의를 맡게 돼 '환경과 디자인'이란 주제로 수업을 했다. 이때부터 환경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됐다.


겉핥기식이지만 오존층 파괴와 물·공기 오염을 알게 됐다. 좋은 물건을 만들어 편리하게 사용하면 생활은 편해진다. 하지만 이게 인류 전체의 손해이자 에너지 낭비란 걸 깨닫게 됐다. 이 행성에 살면서 환경 문제를 인식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됐다. 아무리 힘이 세고, 기억력이 좋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도 그런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 존재감이 없는 존재라는 걸 배우게 됐다. 경이로운 별에 태어나 안 좋은 역할을 하고 있다면 그건 최하위 (존재)다. 최하위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옷 안 산다, 차도 냉장고도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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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호섭 교수가 지난 4월 베트남에서 ‘공존’ 주제로 전시한 포스터를 보여주고 있다. ⓒ 유성호

 
- 삶도 바뀌었나?
"극단적인 조치를 했다. 지난 2000년부터 옷을 사지 않는다. 차도 폐차했다. 서울시가 중앙버스전용차로를 처음 운영한 다음 날이었다. 버스 운전기사에게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어떤지 물으니 좋다고 해서 바로 폐차했다.

냉장고도 없앴다. 요즘 태어난 사람들은 냉장고 없이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청소년일 때 냉장고 있는 집이 없었다. 그때도 냉장고 없이 잘 살았다. 음식을 냉장고에 저장하는 것 자체도 아이러니다. 사과를 따서 바로 먹는 게 좋지 냉장고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먹는 게 좋은 건가. 심지어 겨울에 바깥 온도가 영하 10도인데 핵발전소를 가동해 보일러를 틀어 집안을 따뜻하게 하고는 냉장고를 돌려 음식을 보관한다. 이것만큼 아이러니가 없는 것 같다."

-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에 전기와 수도를 끊었다고 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발생한 뒤에 일본 핵물리학자들이 쓴 책을 읽게 됐다. 모두 한목소리로 핵발전소를 중지해야 한다고 했다. 또 체르노빌 원전사고 25주년을 되돌아보는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에 필요한 포스터 디자인을 맡게 됐다. 그러면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다. 그때 느낀 점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실수하고 그 일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에 전기와 수도를 끊었다. 대신 태양열판을 1400만 원 주고 사서 지붕에 달았다."

한때 전기와 수도를 끊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태양열판으로 생산하는 전기로는 모자라 텔레비전과 선풍기, 전기담요 등에 필요한 최소한의 전기는 요금을 내고 쓴다. 윤 교수가 전기 요금명세서를 보여줬다. 1~4월까지 쌓인 요금이 약 1만 원이다. 한 달 평균 2500원이다. 찾아오는 손님들이 '화장실 문제'로 곤혹스러워 하면서 화장실에 필요한 수도도 다시 연결했다. 하지만 서울 한복판에서 약 3년 동안 전기와 수도를 끊고 사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 요금이 낮다. 한국전력에서 찾아온 적은 없는가?
"언젠가 한전 직원이 찾아온 적이 있다. 혹시라도 내가 옆집에서 전기를 따다가 몰래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정상적인 가정이면 나올 수 없는 매우 적은 전기요금이니까. 쓱 하고 와서 작업실을 둘러 보고 태양열판을 보고는 내게 몇 가지 묻더니 돌아갔다."

- 거의 전기와 수도를 사용하지 않으면 생활하기 힘들지 않나?
"사막에서 산다면 힘들겠지만 그렇지 않다. 바로 앞에 24시간 대중목욕탕이 있고, 식당과 커피숍도 있다. 안전한 모험을 하는 기분이다. 그 어느 때보다 최고의 문명 생활을 하고 있다. 전쟁 피난민촌 사람들을 생각하면 편한 생활이다. 의식의 차이, 생각의 차이다. 여름엔 하루 물수건 5장이면 무더위 속에서도 잘 산다."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거냐고 하는 사람, 수준이 최하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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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열 에너지를 이용해 음식을 조리하는 기구를 설명하는 윤호섭 교수. ⓒ 유성호

 
- 환경보전은 왜 필요한가?
"우리가 숨 쉬고, 마시고, 발을 내디디고 살아야 하는 자연이 오염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공기와 물이 오염되면 절대 안 된다. 그런 문제에 내가 해를 끼친다면 자존심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음 세대가 숨 쉬고 마시고 서 있을 땅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다음 세대에 뭐라고 이야기할 것인가. (사람이라는)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다."

- 환경을 보전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실천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자신의 아이에게 천식이 생겨 숨쉬기가 어려운데도 담배를 피우겠는가. 지금 지구가 그렇다. 곪아가고 있다. 지구 온난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곪아가는 게 보이지 않는다고 실체가 없는 게 아니다.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

환경보전 교육도 해야 한다. 환경보전은 윤리적이고 책임감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노자의 말처럼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기꺼이 낮은 곳에 머문다.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땅에 내려오는 일을 반복한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이게 생태계다."

- 환경보전을 말하면 '원시시대로 가자는 말인가?', '전기 쓰지 마라'란 비난이 쏟아진다.
"알 만한 지식인들이 그런 질문을 하면서 대안이 뭐냐고 한다. 그러면 약이 오를 때도 있다. 왜냐하면 환경을 보전하자는 말이 곧 원시시대로 가자는 말이 아니란 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그런 최하위 수준의 말을 한다. 그런 사람들은 아량이나 그릇에 문제가 있다. 굉장히 최하위 수준인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대책 없이 떠드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하는 말이다. 에너지를 절약하자는 이야기라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 혼자서 환경보전 한다고 세상이 바뀌겠나?
"아무 상관 없다. 그것 때문에 하는 게 아니다. 환경을 보전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존재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내 자존심이다. 존재를 부정하고 어긋난 삶을 살 수 없다. 버려지는 것들을 모은다고 누군가는 쩨쩨하다고 하는데 상관없다. 각자가 알아서 판단했으면 한다."

- 5일은 환경의 날이다.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다면?
"내겐 오늘이 환경의 날이 아니다. 에브리데이 얼스데이(Everyday Earthday)다. 하루하루가 지구의 날이다. 물 한 컵이라도 노려보면서 생각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아껴 쓰고 깨끗이 사용하면 절약이다. 환경보전이란 스스로 느끼고 알아서 할 일이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가 작업실을 보여줬다. 어딘가에선 버려지고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서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그의 몸에 밴 습관을 엿볼 수 있었다.

점심 무렵 그의 작업실 주변에 있던 콩국수 집으로 향했다. 그는 콩국수의 마지막 남은 한 방울까지 들이켰다. 커피숍에선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넣고 남은 포장 종이를 고이 접어 지갑에 넣었다. 그는 이걸 "자존심"이라고 했다. '만물의 영장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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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6월 5일 오늘이 환경의 날이 아니다. Every day Earth day(매일매일 지구의 날)이다." ⓒ 유성호

 
#윤호섭교수 #환경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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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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