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은 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됐나

[주장] 독립운동가도 피해가지 못하는 이념 논리

등록 2019.06.07 17:16수정 2019.06.0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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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제64회 현충일 추념사를 하고 있다. 2019.6.6 ⓒ 연합뉴스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세력 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돼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 통합된 광복군 대원들의 불굴의 항쟁의지, 연합군과 함께 기른 군사적 역량은 광복 후 대한민국 국군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동맹의 토대가 됐다."

문 대통령은 지난 6일 오전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제64회 현충일 추념식에서 추념사를 하던 도중 '김원봉'을 언급했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독립운동가이다. 하지만 북한의 고위직 간부를 지낸 경력이 있어 독립유공자 추서가 거부된 인물이다. 정치권에서는 좌우 이념논쟁에 또다시 불 붙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김원봉을 언급하며 그 공로를 인정하는 맥락의 추념사를 하자 자유한국당과 보수진영에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차명진 한국당 전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김원봉이 누구인가. 김일성 정권 권력 서열 3위, 6·25 남침 최선봉에 선 그놈이다. 그런 놈을 국군 창설자라고 하다니 이보다 반(反)국가적, 반(反)헌법적 망언이 어딨는가? 그것도 현충일 추모사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란 자가"라고 힐난했다.

이어 "내가 더이상 이 나라에서 살아야 하나? 한국당 뭐하나? 이게 탄핵 대상이 아니고 뭔가"라며 "우선 입 달린 의원 한 명이라도 이렇게 외쳐야 한다. '문재인은 빨갱이!'"라고 주장했다. 

전희경 한국당 대변인도 이날 논평을 내고 "귀를 의심케 하는 대통령의 추념사"라며 대통령의 역사 인식을 문제 삼았다. 그는 "1948년 월북해 6·25에서 세훈 공훈으로 북한의 훈장까지 받고 북의 노동상까지 지낸 김원봉이 졸지에 국군창설의 뿌리, 한미동맹 토대의 위치에 함께 오르게 됐다"며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청와대 관계자는 7일 "좌우 이념을 극복한 애국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발언일 뿐"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 관계자는 "문 대통령 발언 취지는 애국 앞에서 이념의 문제나 정파의 문제를 뛰어넘자는 것"이라며 "문맥 그대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김원봉, 그가 대체 누구길래 이토록 논란이 되는 것일까?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요"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연기했고, <밀정>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정채산의 모티브가 된 약산 김원봉. 그는 백범 김구보다 높은 현상금이 걸렸을 정도로 일본의 감시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는 유년 시절이던 1908년, 밀양공립보통학교로 편입학하였으나 일장기를 변소에 넣은 사건을 일으켜 퇴교당한다. 어린 나이었지만 투철한 항일정신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919년 11월 9일 만 21세의 나이로 의열단을 결성한다. 김원봉은 의열단 단장으로서 대규모 암살계획 및 일제가 장악한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 대규모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한다. 당시 일제는 그를 "오안부적의 기백과 신출귀몰하는 특기도 가졌다"고 묘사했다.

김원봉은 의열단 외에도 조선의용대(1938)를 조직하고, 상해임시정부 군무부장(1944)을 지내는 등 백범 김구와 함께 중국 내 독립운동의 큰 축을 맡은 인물이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고통에서 몸부림치던 조선 백성들에게 김원봉은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그토록 바라던 해방 이후 북으로 넘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약산 김원봉(해방 후 모습)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해방된 조국에서 겪은 수모

김원봉을 붙잡아 간 사람은 노덕술이었다. 일제 때 종로경찰서 형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여 악랄한 고문을 하던 악질 친일경찰로, 김원봉 장군이 거느리던 항일결사 의열단 칠가살 명단에 올라 있던 자였다. (...) 노덕술이 김원봉을 묶어 장택상 앞으로 끌고 갔을 때였다. 두둑한 포상금을 받고 일계급 특진까지 할 꿈에 부풀어 있던 노덕술은 "하이!" 하고 입에 밴 왜말을 뱉으며 차렷 자세를 취하였다. - 민족자주연맹 대표 송남헌의 <해방 3년사> 중

일제가 항복선언을 하고 조국은 광복을 맞는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해방 이후 귀국한 김원봉은 민주주의 민족전선 산하단체에서 주도한 총파업에 연루되어 1947년 3월 22일 체포당한다.

1987년 월간경향에 수록된 '증언록' 기사에는 당시 그가 대표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에게 '빨갱이 두목'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공개적으로 조롱당하고 뺨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김원봉이 감옥에서 나온 뒤 의열단 활동을 함께했던 유석현의 집에 찾아가 사흘을 꼬박 술만 마시며 울었다는 것이다. 

그가 노덕술에게 체포됐다는 기록은 당대에도 다수 있었지만, 뺨을 맞았다거나 고문을 당했다는 내용은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김삼웅의 <약산 김원봉 평전>에 인용된 언론인 송건호의 증언에 따르면 김원봉이 체포됐을 당시 화장실에서 용변을 다 마치기도 전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몰라." 그의 독백은 울분으로 이어진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과 싸울 때도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일이 없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의해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 길진현 <역사에 다시 묻는다> 중

그러다 같은 해 4월, 김원봉과 함께 좌우 합작 운동을 주도하며 통일 정부 수립 활동을 하던 여운형이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암살당한다. 이후 김원봉에게도 친일파와 우익 세력들의 테러가 이어지자 그는 거처를 계속 옮겨 다니게 된다. 결국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월북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 좌우대립의 희생양

해방된 조국에서도 경찰 행세를 하는 친일 경찰 노덕술을 보고 김원봉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광복이 되었음에도 자신을 위협하는 남한의 정치세력을 보며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김원봉의 월북은 그런 배경에서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승만과 그 세력은 미국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세력을 '빨갱이'라는 색깔론을 덧씌웠다. '공산당' '사회주의자', 6·25전쟁 이후 그 이름은 용서받지 못할 이름이 됐다.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는 아직도 많다.

그런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웠지만, 해방 이후 정부와 친일 경찰에게 갖은 수모를 당하다 월북한 김원봉의 삶을 통해서 '이념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약산김원봉 #문재인 #문재인김원봉 #김원봉 #차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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