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은 못 봤지만... 우리가 외면한 가난

[책이 나왔습니다] 빈곤의 인류학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

등록 2019.06.15 19:20수정 2019.06.15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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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20일, 다섯 명의 철거민과 경찰관 한 명이 목숨을 잃은 용산참사가 발생한 날 아침에도 용산구청장 박장규는 철거민들을 '떼잡이'라고 표현했다. 다음날 용산국제업무단지 조감도로 교체되기 이전 구청 외벽 대형 간판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쓰여 있었다. 

"구청에 와서 생떼거리를 쓰는 사람은 민주시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오니 제발 자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후 10년, 용산4구역은 용산센트럴파크해링턴스퀘어라는 주상복합단지로 변신 중이고, 초유의 프로젝트파이낸싱 사업이었던, 용산국제업무지구-역세권 개발사업은 거품 속에 증발했다. 무리한 개발사업의 후과를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용산참사 현장 인근의 땅을 사들여 시세차익을 얻은 용산구 4선 국회의원 진영은 현 정부 행정안전부 장관이 되었고, 용산참사 진압의 책임자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경주시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국토교통위에서 활동하고 있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국가와 사회 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은 뿌리 뽑혀 쫓겨났고 이제는 그 신음소리마저 희미해졌다. 밀려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먹고 살기 위한 숱한 곡절은 '누가 봐도 가난한 사람'만을 걸러내는 복지제도의 평가를 통해 걸러졌다. 걸러진 빈민은 자타가 공인하는 '과소인간'이 되어야 했다.

2002년 장애인, 노점상이자 기초생활수급자였던 고(故) 최옥란 님은 앞으로 나아갈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는 복지제도 안에서 분노했다. 일을 통해 수입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의료와 주거 지원조차 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국무총리에게 생계급여를 반납하고 제도개선을 위한 명동성당 농성에 나섰다.

이혼 후 아이 양육권을 위해 모은 얼마 되지 않은 저축으로 수급권 박탈 위기에 놓인 그녀는 절망 속에 세상을 등졌다. 2014년 송파 세 모녀는 근근이 넘겨오던 삶의 문턱에서 넘어진 채 어디에도 손을 뻗지 못한 채 지하 셋방에 번개탄을 피웠다. 월세와 공과금이 담긴 봉투에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들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전한 말이었다.


감춰지고 축소되어 온 빈곤

나는 반빈곤활동가였다. 정책과 제도 변화를 좇아야 했고 잇따른 비극적 사건에 대응해야 했다. 어느 순간, 이렇게 많은 사람을 가난과 차별 속에서 버려두는 이 사회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사회의 죽음을 선포하고 싶은 지경에 이르렀다. 이 야만적 사회에 대해 다만 조종(弔鐘)을 울려대고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빈곤은 사회의 경계 이편 저편에 내몰리면서도 고립된 장막 안에 있었다. 울타리는 늘어나고 고립된 장막은 두터워지는 가운데, 수많은 빈곤의 양상을 사회 문제로 위치 짓는 일은 버거운 일이었다. 학문, 이론적 파트너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쌓이는 것 없이 비극의 숫자가 더해지는 것만 같았다. 

빈곤은 감춰지고 축소되어 왔다. 화려하고 매끈한 도시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밀려나거나 고립된 채 숨을 죽였다. 빈곤은 개인의 무능으로 치부되었다. 타인에게 누를 끼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빈곤을 사회문제로서 평가할 언어는 넘쳐나지만 빈곤을 사회문제로 포함할 권리의 언어는 빈약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웃의 손을 잡거나 밑을 쳐다볼 여유는 없는 사다리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꿈은 건물주인 마당에 누군가에게는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낡은 주문이 되풀이 되었다. 빈곤은 개별화 되고 저항의 목소리는 흩어지기 일쑤였다. 

'여기 빈곤이 있다',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보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역설에 처한다.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실재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일은 종래의 가난의 이미지를 반복 재현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빈곤에 대한 낡은 관념을 넘어서는 것은 빈곤에 대한 인식과 정책 변화를 꾀하는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과제다.

거리에 선 가난한 이들의 외침은 스스로의 권리를 말하는 해방의 순간이지만, 메아리 없는 끝없는 외침은 참담함을 준다. 빈곤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묻는 일은 사회가 품은 빈곤과 싸우는 일이기도 하기에, 오늘날의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고독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청년 40인, 빈곤을 인터뷰하다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빈곤의 인류학>수업 수강 학생 38명이 10명의 반빈곤운동 활동가들을 만나 듣고 생각한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 21세기북스

 
책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 왔는가>에 담긴 반짝이는 청년들의 이야기는 가난한 이들의 외로운 외침에 대한 반가운 메아리와도 같다. 연세대학교 '빈곤의 인류학' 수업에서 진행한 '청년, 빈곤을 인터뷰하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이들의 성실한 듣기와 쓰기는, 빈곤을 대면하고 성찰하는 용감하고 빛나는 활동이었다. 

조문영 교수와 나를 제외한 38명의 학생들은 단지 10명의 반빈곤활동가를 만난 것이 아니다. 이 활동가들의 이야기에는 지켜보고 함께 한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삶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경험과 지혜를 통해 각기 다른 성찰의 가능성을 펼쳐 보였으니, 이 얼마나 많은 세계들의 마주침의 순간인가.

나는 '빈곤의 인류학' 수업을 청강하면서 이 수많은 마주침의 순간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사전정보나 공유된 경험이 많지 않다는 우려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 과정을 벅찬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오래된, 그러나 끝나지 않은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로서 쓰여지고 있었다. 교정, 윤문 작업에 참여하며 많이 웃고 울었다. 이런 학문적 실천의 길이라면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여기, 이 책에 담긴 홈리스, 철거민, 복지수급자, 장애인, 노점상, 쪽방촌 등과 함께 활동하는 반빈곤활동가들의 이야기는 참기 힘든 분노, 앞이 보이지 않는 좌절을 겪으면서도 멈추지 않은 이 사회의 빈곤의 목소리이다.

절망 속에서도 끝내 져버리지 않은 사회에 대한 희망의 주문이자 저항의 증언이다. 그들 자신이 가난한 삶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이어온 빛나는 일상의 기록이다. 서로 다른 경험과 감각으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청년들이 들여다본 빈곤의 재구성이다.

연대의 마음으로 읽혀지길 바랍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법 제도의 글귀 하나가 사람의 생사를 가르는 야만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변화를 이어온 반빈곤활동가들은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열어왔다.

이 활동가들에게 쌓인 앎과 깨달음은 엄연한 지식이자 정보이며 사회적 가치이다. 청년들은 여기 귀 기울이고 반추해 또다른 지식과 정보, 사회적 가치를 제기한다. 이 작지만 엄청난 마주침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식과 실천의 현장의 다른 가능성을 연다. 

우리의 지식은 체계적으로 쌓아두는 것을 넘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어 퍼져나갈 때 힘이 생긴다. 상호 소통과 성찰을 통한 새로운 지식 생산의 협업 과정인 셈이다. 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바꾸어나가고 사회를 바꾸어나갈 실마리가 발견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내 사회에 다시 펼쳐 보이는 지식의 실천으로서 학문의 가능성이 이 책에서 엿보인다. 서로의 차이만을 부각하는 세대 담론이나 개별적, 고립된 권리 담론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상호 대화를 통해 단단해 보여도 실상은 얄팍한 관념들에 도전해나가야 한다. 

이 책이 그렇게 읽혔으면 좋겠다. 타인에 대한 협소한 관념이 숱한 마주침 속에서 어떻게 깨어지고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사회의 경계에 이리저리 내몰리는 가난에 대한 나의 관념은 무엇이었는지 돌아보게 되었으면 좋겠다.

각자도생 팍팍한 삶에 까닭 모를 재난처럼 닥쳐오는 빈곤에 대한 사후적인 대응에 머물지 않는, 우리의 일상의 실천,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의 자그마한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여기, 내가 선 자리에서 타인과의 소통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운동 교재로 이 책이 당신 앞에 놓였으면 좋겠다. 숨겨두었던 서로의 생각과 경험을 조심스럽게 꺼내 보이며 공감과 유대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용기와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책정보]
조문영(엮은이),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21세기북스

* 저자 (40명의 학생)
고현창 권나영 권현의 김강민 김서형 김수빈 김유림 김지아 남예지 남유진 뢰이간 류수현 류아정 박 건 박민아 박에녹 박영서 박채환 소보겸 오 늘 원채린 유혜림 이다예 이은기 이지윤 이지은 이채윤 임명준 임윤아 임혜민 임효정 장채원 정소현 정택진 정희민 최바름 최예륜 허예은 홍다솜 홍현재

우리는 가난을 어떻게 외면해왔는가 - 사회 밖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한 빈곤의 인류학

조문영 (엮은이),
21세기북스, 2019


#빈곤 #가난 #인류학 #청년 #빈곤사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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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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