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의 기도항아리엔 뭐가 들어 있을까?

성 베네딕도 수녀원 해인글방에 가다

등록 2019.06.17 14:44수정 2019.06.18 08:43
1
원고료로 응원
'뎅그렁 뎅그렁',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소리에 이끌리듯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지난 9일 오전 7시, 주일 오전 미사 시작을 알리는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종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들어가는 대로변에서 불과 1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성 베네딕도 수녀원, 키 큰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경비병처럼 지키고 선 수녀원 입구를 지나면 거기서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성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들어가는 길 ⓒ 추미전

 
적지 않은 세월을 짐작케 하는 둥치 큰 나무들과 다양한 꽃들이 만발한 수녀원, 이른 아침 수녀원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마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듯 동시에 울어대는 온갖 새들의 지저귐,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자연의 소리로 충만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질 지경이다.
  

성 베네딕토 수녀원 전경 ⓒ 추미전

  

작가 박완서가 와서 머물렀다는 < 언덕방 > ⓒ 추미전

  
'민들레의 영토' 시인 이해인 수녀님을 뵈러 온 길, 수녀님을 뵙기 전 미사부터 드리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 아래쪽에 있는 '언덕방'은 작가 박완서가 아들을 잃고 상심에 젖어 찾아와 머물며 회복을 경험했다는 방이다.

그 사실이 알려지며 많은 사람들이 이 방에 묵기를 원하지만 방이 2칸밖에 없어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박완서가 언덕방에서 쓴 '한 말씀만 하소서'를 감명 깊게 읽긴 했지만 막상 찾아와보니 이 곳 수녀원의 독특한 분위기와 청명한 자연이 작가에게 주었을 위로가 짐작이 된다.


천주교 미사에 참석한 것은 겨우 2번째, 미사는 고요히 흘러가는 강물처럼 조용하게 진행됐다. 자칫 지루할 정도로 낮고 일정한 톤으로 이어지는 강론과 기도, 맑고 청량한 수녀님들의 성가.  

요란한 웃음과 큰 소리가 넘쳐나는 세상, 설교도 큰 목소리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해야 하고, 기도도 목청껏 부르짖어야 하는 시대에 이렇게 고요한 미사가 있다니... 큰소리 한번 없이 2시간여 동안 계속되는 조용한 미사는 아름다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성 베네딕토 수녀원 주일 아침미사 ⓒ 추미전

 
고요한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세상에서 끌어안고 온 복잡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 듯 했다. 라틴어로 부르는 수녀님들의 성가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오르간 반주 하나에 의지한 수녀님들의 목소리는 방금 전 정원에서 들었던 새들의 합창을 닮은 듯 맑고 청량하게 울려 퍼져 하늘로 올라가는 듯 했다 .

일어섰다 앉기를 여러 번, 신부님의 기도가 끝난 뒤 눈을 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계속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다. 당황스러운 여백의 시간은 고요히 개인적인 기도를 드리는 시간인 모양이었다. 나도 급히 다시 눈을 감았다. 여백의 시간 속으로 갑자기 창 밖에서 새들의 합창이 끼어들었다. 새들이 화음을 맞춘 오케스트라 합창은 새들이 하늘에 올리는 성가처럼 은혜롭고 충만하게 성당을 가득 채웠다.

과대 포장된 것 같은 세상의 소용돌이속에서 조용히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조용한 미사를 마치고 수녀님이 계신 해인글방으로 향했다. '해인글방'은 수녀원 안에 있는 이해인 수녀님의 개인 집필실, 해인글방은 그동안 수녀님이 걸어오신 삶의 발자취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수녀님의 글에 위로받은 사람들이 보낸 선물들이 글방에 가득했다. 화려하고 값비싼 선물이 아니라 타국을 여행하다 산 인형, 예쁜 엽서, 수녀님의 시로 만든 책, 그림 같은 소박한 선물들이었다.
 

독자가 그려보낸 이해인 수녀님의 그림. ⓒ 추미전

 
수녀님은 함박꽃처럼 크고 따스한 웃음으로 낯선 방문객을 맞아주었다. 독자가 수녀님에게 보냈다는 찹쌀떡과 차를 내와 권하시더니 금방 또 주방으로 들어가 국산 호두를 가져와 내놓으신다.


"나한테 보낸 선물들은 이렇게 돌고 돌아요."

누군가 수녀님을 기억해 보낸 작은 선물은 수녀님을 찾는 이들에게 이렇게 또 건네지게 된다. 책으로, 글로만 알고 생각하던 수녀님은 차분한 이미지의 수줍은 소녀 같을 것으로 상상했는데, 직접 뵙고 보니 밝고 환한 에너지가 넘치는 '명랑 소녀'같다.

연세로 따지면야 '명랑 할머니' 라고 불러야지만 말씀을 나누다보면 영락없는 '명랑소녀 17세' 정도다.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만드는 그 쾌활함 덕분에 수녀님을 뵙고 싶어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 넘쳐난다.
  

해인글방에서 작업중인 이해인수녀님 ⓒ 추미전


"사랑받기도 어려워요."

밝은 톤으로 통통 튀듯 말씀하시는 수녀님, 그러나 그 말은 '사랑받는 만큼 사랑하기가 어렵다'는 말씀으로 들렸다. 먼저 사랑을 베풀었기에 그 둥지에 기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난다.

나이도, 종교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고 따스한 위로를 건네는 일이 어찌 힘들지 않을까? 더구나 한 명 한 명을 보듬어 안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일 게다. 그러나 수녀님은 그 일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말씀하신다.

"아직은 그런 일을 더 하라고 하느님이 아직 저를 안 데려가시고 세상에 두신 것이에요."
 

사진작가 최민식이 찍은 이해인 수녀의 젊은 시절 모습 ⓒ 추미전

 
글방 안을 둘러보던 나의 시선을 끈 한 장의 사진, 종신서원을 한 지 얼마지나지 않은 젊은 시절 수녀님의 사진이었다. 따스하고 온화한 표정을 지녔던 여고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수녀원으로 들어오고 30세에 종신서원을 하게 된다. 종신서원을 하며 발표한 시 '민들레의 영토'가 널리 알려지며 그녀는 수녀 시인이 된다.
 
태초부터 나의 영토는
좁은 길이었다 해도
고독의 진주를 캐며
내가 꽃으로 피어나야 할 땅
- '민들레의 영토' 중 일부
   

해인글방 ⓒ 추미전

 
'고독의 진주를 캐며 꽃으로 피어나기'를 소망했던 서른 살 수녀 시인의 꿈은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온전히 이루어진 게 아닐까?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난 그녀의 시는 세상살이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수녀로서의 삶은 가장 낮은 자, 힘없는 자들에게 닿아 있다.

소년원에 갇힌 어린 친구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형수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 일을 기꺼이 감당한다. 직접 그녀를 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들 중에는 수녀님께 기도부탁을 하고 가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혹 밖에 강연이 있어 나가더라도 기도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그들의 기도를 잊지 않기 위해 '기도 항아리'를 만들었다는 이해인 수녀,

벌써 10여 년째 자신도 대장암 투병을 하고 있는 그녀는 '자신에게 기도를 부탁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에게 기도를 부탁한 그들은 '수녀님을 위해 기도한다'고. 덕분에 지금까지 투병을 잘 하며 아직 짱짱하게 살아 계시다고 유쾌하게 말한다. 하지만 대장암 투병을 하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최근 가까운 많은 이들을 떠나보낸 이해인 수녀의 시에는 죽음에 관한 묵상이 곳곳에 드러난다.
 
매일 조금씩
죽음을 향해 가면서도
죽음을 잊고 살다가

누군가의 임종소식에 접하면
그를 깊이 알지 못해도
가슴속엔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

'더 깊이 고독하여라'
'더 깊이 아파하여라'
'더 깊이 혼자가 되어라'
두렵고도
고마운 말 내게 전하며
서서히 떠날 채비 하라 이르며

가을도 아닌데
가슴속엔 오래도록
찬바람이 분다

- '죽음을 잊고 살다가 ' 이해인
  
세상살이에 지친 마음과 신앙과 종교에 대한 많은 질문을 안고 수녀님을 뵈러 갔지만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74세 명랑 수녀의 명랑함과 쾌활함에 전염되어 나의 기분도 밝아졌다. 혼자 맘속으로 '다음에 또 찾아 뵈야지' 다짐하며 나오는 길, 플라타너스 길 입구까지 배웅해 주시며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다음에 또 와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수녀원을 나서는 길, 수녀원을 가득 채운 새소리가 더 밝고 경쾌해진 듯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저자의 개인블로그 < 바오밥스토리 아카데미>에도 실립니다
#이해인수녀 #민들레의 영토 #성베네딕도수녀원 #해인글방 #박완서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방송작가협회 회원, 방송작가, (주) 바오밥 대표, 바오밥 스토리 아카데미 원장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3. 3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