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간 명진 "날 어떻게 죽이시겠습니까"

[제주, 평화의 길①] 명진 스님이 제주도에 첫 지부 세운 까닭

등록 2019.06.12 07:22수정 2019.06.1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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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이 4.3 희생자들의 사진이 붙어있는 평화기념관 출구를 나서고 있다. ⓒ 김성헌

 
제주 하늘은 쾌청했다. 일렁이는 바다는 쪽빛, 멀리 보이는 한라산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더위에 앞서 옷을 녹색으로 갈아입었다. 날은 더웠지만, 선선한 바람이 땀을 훔쳤다. 이쯤 되면 제주도를 여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기분 좋은 날이다. 하지만 평화의 섬 제주도를 걸으며 내내 불편하고 부끄러웠다.

지난 1일 사단법인 '평화의 길' 이사장인 명진 스님과 함께 제주도행 비행기에 올랐다. 1박2일 동안 제주도 4.3 평화의 길을 걷자는 말에 선뜻 따라나선 길이었다. 올레 길을 몇 번 걸어봤지만, 평화의 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오래 전에 불렀던 '잠들지 않는 남도'라는 노래를 읊조리기도 했다.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노래 가사는 기억했지만 감흥이 일지 않았다. 제주 4.3의 역사를 깊이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평화 순례를 시작하면서부터 제주의 평화는 '광기와 학살' 위에 핀 피에 젖은 꽃과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화려한 풍광 뒤에 숨겨진 악몽 같은 피의 역사가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평소에 유쾌했던 명진 스님의 표정에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제주 4.3 평화기념관] 붉은 동백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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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평화공원에 있는 동백꽃 조형물 앞에 선 명진 스님. ⓒ 김병기

 
"스님, 이게 피에 젖은 유채 꽃인가요?"

4.3 평화기념관 입구에 있는 커다란 꽃 조형물 앞으로 다가가며 명진 스님에게 여쭌 말이다. 따가운 햇볕을 받아 붉은 꽃은 더욱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추운 겨울에 하얀 눈밭에 핀 동백꽃이 어느 날 툭! 통 꽃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4.3 사건 때 희생 당한 사람들이 차가운 땅에 소리 없이 쓰러져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붉은 동백꽃이었다.


제주 남선사의 도정 스님이 길안내를 했다. '역사의 동굴'이 시작되는 제1 전시관 초입부터 등골이 서늘했다. 4.3 때 주민들의 피신처였던 천연동굴을 형상화한 터널이다. 지하에 묻힌 진실을 찾아가는 동굴 끝에 누워 있는 건 커다란 비석. 비문을 새기지 않은 '백비'였다. 4.3의 진실이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기에 뭐라 이름을 붙여야할지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2관 '흔들리는 섬'에는 4.3의 도화선이었던 1947년 3.1절 기념대회 때 미군정 경찰의 발포 사건이 묘사되어 있다. 제주도민들이 이에 항의해 총파업을 벌이자, 미군정 경찰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4.3이 일어나기 전까지 1년 동안 2500여 명을 잡아 가뒀다. 미군 감찰보고서는 "3.3평의 유치장에 35명을 수감했다"고 기록했다. 미군정의 지시를 받고 북을 고향으로 둔 '서북청년회' 등이 대거 제주도로 들어오면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불타는 섬... 미군정과 이승만의 '약탈과 학살'

3관 '바람 타는 섬'은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제주도민들의 경찰지서 습격 사건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 5.10 선거를 한 달 앞둔 시점에서 남쪽만의 단독 선거가 진행되면 폭력사태가 공고화되고, 분단이 장기화되며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려해서 벌인 사건이었다. 이 일로 제주도 24개 경찰지서 중 12개가 습격당하고 14명이 사망했다.

4관은 '불타는 섬'. 제주 초토화 작전과 대량학살이 묘사되어 있다. 1948년 10월 17일 제주지역 토벌사령관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11월 17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에 사인한 문건도 전시돼 있다. 이때부터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7년여에 걸쳐 지속된 광기의 역사는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심했던 사건이었다. 무자비한 살육자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임신한 엄마의 배를 죽창으로 찔러 학살했다. 당시 제주도민 30만 명 중에 3만 명이 희생을 당했다. 주민 10명 중 1명이 동백꽃처럼 어느 날 툭! 통 꽃으로 떨어진 것이다.

'광기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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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스님이 4.3 희생자 위패봉안실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 김성헌

 
"머흘곶에 한 사나흘쯤 숨어서 지냈어.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찾아먹으려고 나섰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죽었지 뭐야." (강춘부. 원동마을 생존자. 당시 17세)

"내 눈 앞에서 5백 명이 알몸으로 수장당하러 가는 것이 어제 일처럼 또렷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장시영. 당시 군인)

"총을 맞고 한 어멍이 죽었는데, 뒷날 아침에 보니까 그 겨울에 애기가 살아가지고 젖을 빨고 있었어요. 이런 얘기가 아주 그냥 우리 마을에 허다했던 얘기지요." (김홍석. 의귀리 주민. 당시 11세)

전시관 한 벽면을 가득 채운 학살의 증언은 생생했다. 4.3 희생자들의 사진이 양 벽과 천장에 붙어 있는 맨 끝의 출구로 나오니 '해원의 폭낭'에 전시관을 나온 아이들의 추모 글이 매달려 있었다. 폭낭은 팽나무의 제주도 말로 동네 주민들이 그늘에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던 소통의 공간이다.

"너무 마음이 아프네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부끄러운 과거지만 꼭 기억합시다." (웅산고 2학년 ㅈㅇㅎ)

"4.3 사건 잊지 않겠습니다." (다사 초등학교 1학년 2반 000)

평화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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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이 4.3 평화공원에서 방명록을 쓰고 있다. ⓒ 김성헌

 
명진 스님은 평화공원 방명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반성 없는 과거엔 미래가 없다."

위령탑과 위패봉안실에서 참배를 마치고 무겁게 발걸음을 떼는 명진 스님에게 "평화란 무엇이냐"고 여쭈었다.

"대문이 없고, 거지가 없고, 도둑도 없었던 '3무'의 제주도. 누구나 이웃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삼촌'이라고 불렀던 평화의 섬. 4.3 이전의 제주 공동체가 평화다.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게 평화다."

제주도 붉은 동백꽃은 통 꽃으로 툭! 떨어지기 전, 인간답게 생활했던 공동체를 기억하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제주에 가거든 동백꽃 함부로 꺾지 말고, 길가에 떨어진 붉은 통 꽃 밟지 마라.

[북촌리] 하얀 냉이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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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순례단의 기념촬영 ⓒ 김성헌

 
북촌은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에 있는 해변마을이다. 이곳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기록영상을 본 뒤 4.3길을 걸었다. 서우봉 일제 동굴 진지로 가는 길에 쪽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북촌항을 낀 한적한 작은 마을도 보였다. 여느 때 같으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텐데,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이곳은 4.3 사건 때 남자들이 많이 죽어서 '무남촌' '과부촌'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민 1000명 중 300여 명이 학살됐다.

1947년 8월 삐라를 붙이던 주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했고, 1948년 4월 무장대가 북촌리 선거관리위원회 사무소를 습격해 선거기록을 탈취했다. 그해 6월 북촌포구에서 경찰관 2명이 무장대에게 살해됐고, 12월 토벌대는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유인해서 피신처에서 내려온 주민 24명을 낸시빌레에서 총살했다.

낸시는 냉이의 제주도 말이고, 낸시빌레는 냉이가 많이 나는 곳을 뜻한다. 이듬해 5~6월에도 붉은 피에 젖었던 이곳에 하얀 냉이 꽃이 흐드러졌을 것이다. 이날 일정상 낸시빌레에 가지는 못했지만, '평화의 길' 순례단은 300명이 학살된 들과 밭, 냉이 꽃이 폈던 길을 걸었다. 북촌 초등학교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을 때 해설사가 말을 이었다.

"바로 여깁니다. 기념관에서 본 강요배 화백이 그린 그림의 배경입니다. 한 아이가 죽은 엄마의 품을 헤쳐서 젖을 입에 물고 있었던 곳이 여기, 학교 정문 바로 앞이었어요."

1949년 1월 17일 군인들은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주민들을 집결시킨 뒤 당팟으로 끌고가 총살을 했다. 그 때 100여 명이 피를 흘리며 죽었다.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은 시체들...

평화롭게 보이는 작은 마을 곳곳에 학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옴팡밭'. 오목하게 들어가 있는 밭이라는 뜻이다. 현장에 가니 비석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두세 개의 비석이 포개져 있기도 했다. 당시 죽은 사람들이 놓여 있던 자리였다. 이 일대는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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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영 소설가의 ‘순이 삼촌’ 문학비가 있는 옴팡밭. ⓒ 김병기

 
누워 있는 비석 한 개에는 현기영 소설가의 '순이 삼촌'에 나온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30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 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30년 전 그 옴팡밭에서 구구식 총구에서 나간 총알이 30년의 우여곡절한 유예(猶豫)를 보내고 오늘에야 당신의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을 뿐이다."

4.3 사건의 참혹상을 문학으로 고발한 현기영 소설가의 문학비가 있는 곳이다.

['평화의 길' 제주지부] 명진 스님 "부끄럽습니다"

4.3 길을 걸은 70여명의 '평화의 길' 순례단은 이날 저녁 제주시의 한 숙소에서 제주지부 창립식(지부장 천영환)을 열었다. 고희범 제주시장 등이 참석했다. 2018년 11월 5일에 창립한 사단법인 '평화의 길'의 지부 창립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사장인 명진 스님은 다음과 같이 인사말을 했다.

"평화란 무엇인가? 평등이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해왔는데 평등의 가치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오늘 제주도에 와서 도둑이 없고, 거지가 없으며, 대문이 없는 '3무의 섬'이라는 이야기를 무심하게 흘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북촌마을에서 대문이 없는 게 아니라 정랑이라는 대문의 쓰임새에 대해 설명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랑에 세 개의 나무가 걸쳐 있으면 산간 마을에서 내려와서 며칠 장보고 올라가겠다는 표식이고, 하루 종일 집을 비울 때에는 두 개, 한나절 비울 때는 하나의 나무를 걸쳐놓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결국 집에 사람이 없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빈부의 격차가 크면 문을 열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런 제주야말로 평화의 섬 이전에 평등의 섬이었습니다. 빈부 격차 심하지 않았기에 남녀를 불문하고 서로 '삼촌', '조카'라고 불렀습니다. 육지에는 이런 마을 공동체가 없습니다. 또 제주도에 와서 4.3 현장을 둘러보면서 잠깐 제주의 속살을 봤다는 생각에 부끄러웠습니다. 4.3 이전의 제주처럼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평화의 길' 첫 지부를 제주에 세운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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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길' 이사장인 명진 스님이 제주지부 창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김성헌

 
제주의 평화는 4.3 때 피에 젖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빨갱이" "폭도" "공산당" 등의 사상과 이념의 허황된 잣대를 들이대면서 총, 칼,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무고한 주민과 노인들, 젖먹이까지 학살했다.

명진 이사장은 "중국의 운문이라는 대선사는 초파일에 법문을 하면서 '만약 석가가 태어날 때 내가 그 옆에 있었으면 한방에 타살하여 개에게 던졌을 것'이라고 말했고 임제 선사는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부처 제자를 보면 그 제자를 죽여라'라고 했다"면서 "여러분들은 저를 어떻게 죽이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이어 "누구도 사상과 이념, 종교를 통해 인간을 종속시켜서는 안 된다"면서 "체제와 독재 권력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되어야 하지만 이념과 사상에 얽매이면 안 되며 아무리 훌륭한 사상도 그것이 나를 묶고 있다면 가시철망으로 묶고 있는 것과 같다"고 강조했다.

명진 이사장은 "자본주의의 승자독식 세상에서는 이뤄질 수 없는 평화, 평등 세상으로 가려 했던 제주도에서 평화의 길 첫 지부를 창립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면서 "종교에 얽매이지 말고 지극한 지선의 길로 가기 위해서 몸을 다 던지겠다"고 맺었다.

이날 행사를 마친 뒤 이호동부락 방파제와 도두항 해변을 걸었다. 바다 위에 줄지어 떠 있는 갈치배의 불빛이 가로등 마냥 빛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비행기 안에서 읊조렸던 노래 '잠들지 않는 남도'가 흘러나왔다. 4.3 평화기념관에서 본 광기의 역사가 노랫가락에 옅게 스며들었다. 북촌리 학살터의 널브러진 비석도 떠올랐다.

'검붉은 저녁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밤바다에서 부끄러움이 밀려 왔다.
#평화의 길 #제주 4.3 #명진 스님 #제주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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