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배우' 정우성님,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그루밍 성범죄에 대해

등록 2019.06.16 13:48수정 2019.06.24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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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는 미디어나 생활 속에서 궁금한 성이야기를 성교육 강사 심에스더씨에게 묻고 답하는 연재입니다.[편집자말]
아무리 생각해도 '오바'라는 걸 잘 안다. 그런데도 영화 <증인>을 보는 내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누가 범인인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영화 <증인>은 살인사건을 목격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 소녀 지우(김향기 역)가 법정에서 증인으로 서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배우 정우성은 변호사 양순호 역할로 출연한다.


내가 마음을 졸이며 봤던 건 정우성 때문이다. 아니, 오해 마시라. 그의 잘 생긴 외모 때문은 아니니까. 그가 사건에서 이기기 위해 지우와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모습들 때문이었다. 가령 이런.
  
매일 특정 시간에 전화를 걸어 지우가 좋아한다는 퀴즈 문제를 내고, 자주 학교로 찾아가 동네 슈퍼에서 지우 친구와 컵라면을 함께 먹는다. 보드 게임 같은 선물도 준다. 타인에게 쉽사리 마음을 주지 않는 지우에게 '믿어도 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양순호 변호사의 눈물겨운 노력이 내게는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보였다. 어딘가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수법(?) 같아서다. 바로 그루밍 성범죄다.
 

영화 <증인>의 한 장면. ⓒ (주)무비락


물론 양순호 변호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요즘 뉴스에 나오는 사건을 보라. 어디 그럴 만한 사람이 그런 짓을 하는지. 인천의 한 목사는 10여 명의 청소년 신도들을 대상으로 그루밍 성범죄를 저질렀다.

뿐인가. 마음이 아파서 치료차 만나게 된 심리상담사나 정신과 의사와의 관계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기도 한다. 양순호 변호사가 만약 저런 친밀한 과정을 통해 지우를 길들이고, 나쁜 마음을 먹었다면... 상상만으로 소름 끼친다. 그렇다고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 것 같지도 않다.

- 심쌤! 오늘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일단 그루밍 성범죄가 뭔지부터 이야기 해봐요.
"좋아요! 그루밍이란, 말 그대로는 동물이 혀나 손톱 등으로 털을 깨끗하게 다듬으며 몸을 단장하는 걸 뜻해요. 동물들 스스로의 몸뿐 아니라 구애를 할 때 상대의 털을 공들여 정성껏 핥아주고 다듬어 주는,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죠. 또한 주인이 자신의 의지대로 반려동물의 털을 손질한다는 의미도 있어요. 저도 '집사'라서 이런 것도 좀 압니다."

- 맞다, 심쌤도 고양이 키우시죠?
"네네,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 ^^ '그루밍 성범죄'는 이 말에서 유래되었어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먼저 정성껏 공을 들여 호감과 신뢰를 얻은 후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만들면서 성적인 착취와 폭력을 가하는 범죄예요. 주로 어린이, 청소년 등의 미성년자와 사회적 환경이 취약한 대상을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온라인 공간을 통해 '그루밍' 범죄가 활발해지고 있는데 피해자들은 그루밍을 당하는 당시에는 자신이 범죄의 대상이라는 걸 알기 어렵다고 해요. 이 경우 정신적으로 조종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성적인 행동 등을 요구 받았을 때 스스로 안전한 판단을 내리기는 매우 힘들어요.


또 나중에라도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깨닫고 알렸을 때 가해자는 서로 합의해서 한 행동이라고 주장하며 처벌을 피해가는 경우가 많아요. 때문에 피해자를 제대로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와 그루밍이 성폭력이라는 사회적인 인식의 변화가 매우 시급해요."

- 극중에서 양순호 변호사가 증인에게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얻고, 자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좋았지만,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게 맞는 건지 걱정이 되더라고요. 늦은 시간 핸드폰으로 연락하는 것도 그렇고. 학교에 자주 찾아가는 것도 그렇고. 원래 변호사들이 증인을 만날 때 저렇게까지 하나 싶기도 했어요.
"알아보니, 실제 변호사가 재판을 위해 증인을 찾아가는 일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요. 물론 그런 행동이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위증교사' 등의 별도의 범죄 가능성으로 볼 일이지, 그루밍 성범죄로 보긴 어렵다고 하더라구요."

- 어머! 심쌤에게 이런 세심한 면이! 그걸 다 알아보신 거예요?
"인맥을 총동원하여! ^^ 사실 여부는 확인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기자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그루밍 성범죄 사례가 점점 더 많이 알려지고 있는 지금, 양순호 변호사의 행동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같아요."

- 제가 엄청 오바한 건 아니군요!  
"처음 양순호 변호사가 지우를 찾아가서 호감을 얻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다행히 재판에서 이기려고 한 것이지만, 한끗 차이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서 그런 정성을 쏟았다고 생각하면 눈 앞이 아찔해지죠. 물론 영화는 양순호 변호사가 좋은 사람이라는 힌트를 계속해서 주고 지우를 통해 변화되는 모습 또한 보여주지만 현실은 영화만큼 명확하지 않아 구분이 더 어려울 수 있다고 봐요.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특히 안전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부분도 있구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 관계를 단편적으로만 바라보고 섣부르게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요. 관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되 세세한 기준을 가지고 분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영화 <증인>의 한 장면. 나에게 잘해주는 이런 사람이 돌변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 (주)무비락


- '전체적으로 바라보되 세세한 기준을 가지고 분별한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구체적으로 뭐죠?
"역시... 물어보실 줄 알았어요. 다시 영화 이야기를 좀 빌려 이야기 해 볼게요. 양순호 변호사는 성인 남성이고 지우는 아직 미성년인 (여)학생인 점 그리고 지우가 자폐를 가지고 있다는 면만 부각해서 보면 양순호 변호사가 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해 했던 행동들 즉, 라면을 같이 먹고, 선물을 하고,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 퀴즈를 내는 등의 행동이 그루밍 성범죄를 의심하게 할 수 있다고 봐요.

하지만 양순호 변호사가 왜 지우를 찾아 왔고 어떤 이유 때문에 호감을 얻으려 하는지 동기를 파악하며 이들 관계의 큰 그림을 들여다보면 좋겠어요. 그런 다음 양순호 변호사가 지우의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과 과정이 둘만의 은밀한 관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지, 주변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오픈되어 있는지, 지우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등등을 세세하게 살펴보며 관계의 정체(?)를 알아가는 거죠.

이런 측면에서 보면 양순호 변호사는 지우와 만날 때 대부분 항상 지우와 함께 다니는 친구와 같이 만났어요. 지우 엄마에게는 지우를 만나러 간다는 사실도 알렸고요. 또 지우와의 '소통'을 위해 약점을 노출 시키면 안 되는 상대편 검사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죠.

즉 폐쇄적이지 않은, 주변에 오픈된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에요. 이 점은 그루밍 성범죄를 구분하는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예요. 실제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의지/의존하게 만들고 '둘만의 비밀'을 핑계로 다른 사람에게 둘의 관계를 알리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전체적으로 바라보되 세세한 기준'을 가지고 살펴보니 어떤가요?"

- 아, 어려워요. 뭔가 더듬이가 필요할 것 같아요. 세세하게 살펴볼 수 있는.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보니, 불안감은 덜해지는 것  같아요.
"물론 쉽지만은 않겠죠. 그래도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분별해 가다 보면 범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람을 무작정 의심하는 일은 줄어들 거예요. 좋은 사람과 좋은 관계의 가능성을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 심쌤, 혹시 저나 아이들이 그루밍 성폭력을 사전에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최근 다양한 루트를 통해 온라인상 그루밍 성범죄가 매우 활발한데요. 특히 나이 제한이 없는 스마트폰 채팅 어플리케션을 통해 미성년 어린이/청소년 등이 그루밍 성범죄에 많이 노출되고 있다고 해요.

실제 초등학교 5, 6학년 약 490명에게 물었을 때, 온라인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 본 적 있다(69.1%), 성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3.7%), 성과 관련해 원치 않는 말을 했다(50%), 신체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보내라고 했다(21.4%), 자기와 사귀자고 하며 잘 해줬다(21.4%) 등의 대답을 했다고 해요(탁틴내일&GSGT. 2017.10.10. 조사)."

- 아, 저는 이런 통계 기사를 볼 때마다 깜짝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도 통계가 언제나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아는 것도 필요하다고 봐요. 계속 이야기해 보면 특히 정서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의 경우 관계를 거절하기도, 빠져나오기도 더 어려운 상황이에요. 가해자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 주고, 선물도 주고, 용돈도 주는 등 정서적 친밀감뿐 아니라 경제적인 도움을 주며 다가오기 때문이에요.

대부분 그루밍 성범죄자의 경우, 자신보다 어리고 약한, 주변에 도와줄 어른이나 친구가 없는 대상을 찾아 정서적으로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상대에게 부족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며 신뢰를 쌓은 후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고립되게 만들어요. 그리고 나서 조금씩 상대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요구하는 거죠.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사례에 따르면, 어떤 여성 청소년의 경우 가해자가 처음에는 손가락, 무릎, 어깨 등의 신체 사진을 요구하다가 나중에는 가슴과 성기 등의 사진까지 요구했다고 해요. 또 다른 경우 온라인으로 친분을 쌓은 후 실제로 만나 성관계를 요구/유도하고 불법촬영까지 한 후 나중에 신고할 수 없도록 협박하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 정말 아이들을 이용하는 '나쁜 어른들'이 많은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좀 미안해지려고 해요.
"맞아요! 하지만 좋은 어른들도 많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아이를 바꾸려고 하기보다 자신을 바꿔나가려고 노력하는 어른들이요! <증인>의 양순호 변호사처럼, 그리고 모르는 걸 아는 척 하지 않고 솔직하게 묻는 기자님처럼요! 다음 시간에는 그루밍 성범죄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알아보도록 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여러분의 심쌤이었습니다!"
#심에스더 #성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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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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