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가 그린 두 개의 의자, 왜 이렇게 울컥할까

[그림의 말들 - 마지막회] 빈센트 반 고흐 ②

등록 2019.06.21 09:35수정 2019.06.2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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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 한 점을 독자와 함께 감상하며 그림 속 숨어있는 이야기와 작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보려고 합니다. 미술전문가의 입장보다는 관람객 입장에서 그림이 어떻게 느껴지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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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기 영감의 초상(1887) ⓒ 로댕 박물관


(* 이전기사 : 너무나 적나라한 그림... 이걸 반 고흐가 그렸다니)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노년의 남자가 눈을 살짝 내리고 앉아 있다. 무슨 상념에 잠긴 것인지 눈빛이 깊고 고요하다. 색채가 현란한 우키요에를 배경으로 외투를 단정히 입은 노인을 그린 이 그림은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탕기 영감의 초상'이다.  

파리로 건너온 고흐는 테오의 아파트에 짐을 풀자마자 다음 날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첫 작품은 자화상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 자신의 모습을 기록하고 싶은 모양이다.

고흐는 일생 36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27점이 파리에서 그려졌다. 그는 파리 화단의 지도자 중 하나였던 코르몽이 몽마르트르에서 운영하는 아틀리에를 다니며 데생을 공부한다. 3개월 다니고 말았지만 그곳에서 그는 그가 그토록 원했던 '화가 친구'를 만나는데, 바로 에밀 베르나르와 툴루즈 로트레크다.

고흐는 앙데팡당전에 전시된 쇠라의 그림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에 충격을 받았다. 이 작품은 점묘법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팔레트 위에서 색을 섞지 않고 순색을 캔버스에 점 찍듯이 찍어 그린 작품이다.

이렇게 그린 그림은 물감을 혼합하는 전통적인 방식보다 더 순수하고 강렬한 색을 표현할 수 있다. 쇠라의 이 작품이 전시되었을 때 파리의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은 이를 두고 신인상주의라고 명명했다. 그렇게 파리는 인상주의와 신인상주의의 교차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 시절 고흐는 일본 판화인 우키요에에 심취했다. 우키요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했던 전통 판화로 '세상의 떠다니는 그림', 즉 당시의 이모저모를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그는 우키요에를 무작정 따라 그리거나 그림 속에 넣기도 했다. 바로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처럼 말이다. 이렇게 고흐의 그림은 인상주의에 신인상주의, 우키요에에 기반을 둔 일본풍 양식이 통합되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간다.

고흐와 고갱의 어긋난 만남

그동안 테오와 편지로만 예술을 논하던 고흐는 그와 마주앉아 새로운 예술에 대해 마음껏 토론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하지만 테오는 날이 갈수록 지쳐갔다. 매일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온 테오에게 고흐는 독자적인 예술론을 펼치느라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 온 손님들과도 예술적 논쟁을 벌이다가 번번이 싸움으로 번지는 바람에 더는 찾는 사람이 없는 지경이 됐다.
 
"나 역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만큼은 마음 편히 쉬고 싶은데 형은 잠시도 나를 내버려 두질 않아. 더는 못 참겠으니 아예 여기서 나가 줬으면 좋겠어. (중략) 형 속에는 서로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들어 있어. 한 사람은 드문 재능을 가진 진정한 예술가이고 또 한 사람은 이기적이고 무정한 인간이야. 이들 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내게 말을 걸어오니까 듣는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가 없어.

(중략) 게다가 나도 형을 지원하는 일을 그만둘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하지만 그는 예술가야. 그것도 아주 드문 재능을 가진 예술가. 그런 그를 모른 척한다는 것은 화상으로서 한 사람의 성실한 인간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 돼. 형은 반드시 후세에 길이 남을 멋진 작품을 만들게 될 거야." - 테오가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
 
형의 예술성을 높이 사면서도 그의 괴팍함에 괴로움을 어쩌지 못하는 테오의 인간적인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흐는 이 시절 테오의 화랑에서 그의 소개로 고갱을 만났다. 고갱은 고흐보다 5살 연상이고 증권거래소에서 일하다 주식시장이 붕괴하자 35세의 나이에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찾아 작품 활동에 뛰어든 화가다.

내성적인 고흐는 이 외향적이고 이지적인 멋쟁이 화가에게 호감을 품었다. 반면 고갱은 화상인 테오의 도움이 필요한 터라 마지못해 고흐를 상대했으니, 시작부터 어긋난 만남은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다.

고흐는 알코올 도수 70도를 넘나드는 독주인 압생트를 너무 마신 탓에 건강이 나빠졌다. 그림도 잘 팔리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테오에게 결혼할 여자가 생겼다. 초조해진 고흐는 파리를 떠나 아를로 향한다. 네덜란드 시골 마을 출신인 그는 마음의 안정을 위해 춥고 음습한 도시보다는 남부 프랑스의 따뜻함이나 자연이 절실했다.

그가 떠나기 전 탕기에게 선물한 그림이 바로 '탕기 영감의 초상'이다. 탕기는 재능있는 가난한 화가들에게 돈 대신 그림을 받고 물감이나 화구들을 지원해주는 화상이었다.

탕기는 가난한 무명의 화가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특히 그는 고흐 그림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이후 고흐가 자살했을 때 장례식을 지원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이후 탕기가 사망하자 조각가 로댕이 이 그림을 탕기의 딸로부터 매입해 현재 로댕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고흐가 고갱을 위해 그린 의자... 왜 울컥할까

1888년, 아를로 간 고흐는 노란집에 머물며 화가 공동체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베르나르를 포함 몇몇 화가에게 의견을 타진했으나 모두 거절했고 이에 응한 유일한 화가가 고갱이다.

고갱은 자신의 빚을 청산해주고 앞으로 자신의 그림을 팔아줄 테오와의 거래로 아를에 갔지만 이를 모르는 고흐는 고갱이 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자신의 방은 초라할지라도, 고갱을 위해 비싸고 안락한 가구를 샀으며 아를의 공원을 그린 작품에 '시인의 정원'이란 제목을 붙이고 고갱의 방 한가운데 걸었다. 물론 해바라기 연작도 그의 방을 꾸밀 목적으로 그렸고 고갱의 방 벽에 걸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고갱이 왔다. 둘은 날이 좋으면 함께 밖으로 나가서 그림을 그렸고 흐린 날이면 같은 주제를 놓고 그림을 그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같이 지내기에는 개성이 너무 강했던 두 사람은 금세 삐걱거렸다. 하루는 카페 주인인 지누 부인의 초상화를 동시에 그렸는데 '같은 모델, 다른 느낌'으로 인해 서로의 작품을 비난하는 일이 발생했다.
  

왼쪽은 '아를의 여인'(빈센트 반 고흐,1888, 오테를로,크뢸러뮐러 미술관). 오른쪽은 '아를의 밤의 카페'(폴 고갱, 1888, 모스크바 푸슈킨 미술관) ⓒ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미술관, 푸슈킨 미술관

 
왼쪽은 고흐가 그린 지누 부인이고 오른쪽은 고갱이 그린 지누 부인이다. 고흐는 지누 부인을 천박하게 그렸다고 고갱에게 화를 냈고, 고갱은 술집 여자를 고상한 척 그렸다며 고흐에게 분노했다. 하지만 이렇게 쉽게 공동생활이 끝나리란 걸 고흐는 예상하지 못하고 의자 두 개를 나란히 그리는데, 바로 '반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다. 나는 왜 이 그림이 이렇게 울컥하는지 모르겠다.
  

왼쪽은 '반 고흐의 의자'(빈센트 반 고흐,1888, 런던 국립미술관). 오른쪽은 '고갱의 의자'(빈센트 반 고흐,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 런던 국립미술관,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왼쪽은 '고흐의 의자'이고 오른쪽은 '고갱의 의자'다. 고흐의 의자는 카펫도 없고 팔걸이도 없는 초라한 나무 의자이며, 의자 위에는 담배쌈지와 그의 자화상에 자주 등장하는 파이프가 올려져 있다.

고갱의 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고급스러운 의자에 바닥에는 카펫이 깔려 있고 의자 위에는 계몽과 지식을 상징하는 촛불과 책이 올려져 있다. 고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두 개의 의자를 그렸을까. 의자로 대변된 초상화처럼 초라한 자신과 세련돼 보이는 고갱의 모습을 의자로 재현한 듯하다.
  

폴 고갱 '해바라기를 그리는 빈센트'(1888) ⓒ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갱은 이 시기에 고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바로 '해바라기를 그린 빈센트'다. 그림 속 고흐는 술에 취해 눈이 거의 감긴 상태며 해바라기는 잎이 다 떨어진 흉측한 모습이다. 고흐는 자신을 광기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표현한 것에 격노해서 들고 있던 압생트 잔을 고갱에게 던져버렸다. 아를에 온 지 두 달 만에 고갱은 고흐를 견딜 수 없어 아를을 떠나려 했고, 혼자 남겨질 것에 불안감을 느낀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른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릴 수밖에 없던 이유

고갱은 떠났고 아를의 정신 요양원에 입원한 고흐는 2주 후에 다시 노란집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귀에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그렸고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내가 미치지 않았다면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부터 약속해온 그림을 너에게 보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노란집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흐는 또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지역주민들의 탄원으로 '노란집'은 경찰에 의해 폐쇄됐다. 자신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탄원서에 사인한 걸 안 고흐는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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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1889) ⓒ 뉴욕 현대미술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존재가 되자,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 요양원에 제 발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런 절망의 끝에서 구원을 갈망하듯 '별이 빛나는 밤'이 탄생했다. 이 무렵 벨기에 브뤼셀에서 18회 뱅전이 열렸고 피사로, 로트레크, 고갱 등과 함께 고흐의 그림이 초청받았다. 이때 고흐의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다. 그의 최초이자 마지막 판매가 된 작품이다.

몇 달 후, 파리에서 앙데팡당전이 열렸다. 고흐도 이 전시에 초청받아 10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대중들이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동료 화가들도 그의 그림에 찬사를 보냈다. 그토록 기다리던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이때 테오는 의사인 가셰 박사를 알게 됐고, 고흐를 가셰 박사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긴다.

오베르로 거처를 옮긴 고흐는 미친 듯이 그림을 그렸다. 70일 머무는 동안 80여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그때 그려졌다.

그러던 어느 날, 고흐는 그 밀밭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장례식에는 테오와 베르나르, 탕기 영감, 가셰 박사 등 7명이 참가했다. 장례 후 테오는 고흐의 주머니에서 미완의 편지를 발견했다.
 
"(...) 어쨌든 나는 내 생애를 그림에 바쳤어. 그것은 예술가의 숙명이기도 하니까 달게 받아들이자. 그러나 문제는 바로 너야. 너는 화상이 아니라 예술가라고. 앞으로의 네 인생을 어떻게 살 거니…"
 
6개월 후, 형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과 우울감에 시달린 동생 테오도 급작스레 사망했다. 오베르의 밀밭 옆에는 고흐와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나란히, 그렇게.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단 10년이다. 그 10년 동안 그는 860점의 유화, 1300점의 수채화와 소묘 등 총 21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참고 서적]

주디선드 <고흐> (한길아트, 남경태 옮김)
임교택 <반 고흐 마지막 3년> (책생각)
이규희 <빈센트 반 고흐> (지경사)
페데리카 아르미랄리오 <반 고흐> (예경, 이경아 옮김)
노무라 아쓰시 <고흐 37년의 고독> (큰결, 김소운 옮김)

(* 그동안 '그림의 말들'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인천투데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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