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14 07:32최종 업데이트 19.06.14 23:13
새벽별이 깊은 밤에서 깨어나 월악산 마애봉에 앉았다가 문경새재로 막 내려설 때면 그도 어김없이 기지개를 켠다. 새벽 2시 반이다.

그는 아내가 깰까 봐 조심조심 엉덩이부터 밀어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고양이 걸음으로 부엌에 나와 불을 댕기고 반찬 그릇도 살금살금 내려놓는다. 그렇지만 기척을 놓치지 않고 아내가 머리새를 만지며 안방에서 나온다. "더 자지 그래" 책망 아닌 책망을 하지만 아내는 못 들은 척, 국을 데우고 밥을 푼다.


장영진은 늘 미안할 뿐이다. 벼슬길 나서는 것도 아닌데 새벽밥을 먹은 지 벌써 10년 세월이다. 때문에 아내는 늘 잠을 설쳤다.

그가 문경여고 교무실에 도착하니 시각은 새벽 3시경이다. 교정에는 밤새 뿌리까지 파고든 냉기에 이팝나무들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복도에는 검푸른 바람이 아직 휘휘돌며 밤을 붙잡고 있었다. 
 

장영진 선생 그는 10여년에 걸쳐 '한자자원사전'을 집필했다 ⓒ 민병래

  
그는 오늘 <한자자원사전>의 마지막 교정교열을 끝낼 참이다.

시골학교 한문 선생인 그가 이 작업을 시작한 지 10여 년에 이른다. 그는 학생들에게 '한문'의 한 글자 한 글자 뜻과 형태, 그리고 발음, 나아가 그 기원을 제대로 가르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교재로 쓸 수 있는 책이 마땅치 않았다. 교과서마다 견해가 다른 건 그렇다치더라도 집필자들의 빈약하고 무리한 주장이 눈에 거슬렸다. 또 최근 연구성과가 반영되지 않는 것 같아서 답답했다.

10년 세월 동안 <한자자원사전> 집필

그래서 처음에는 몇 권의 관련 서적을 읽고 이를 바탕으로 1800자 정도를 선정, '한자자원(漢字字源)해설' 파일을 만들어 수업에 활용하려 했다. 그러나 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졌다. 결국 사마귀가 수레에 맞서는 형국 같았고 태산 앞에 홀로 마주 선 형세가 되고 말았다.

그의 작업 '자원'(字源)을 밝히는 일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가령 '허가할' 가(可)자를 보면 그의 작업은 아래 이미지처럼 모든 고문서를 통해서 가(可)의 본뜻과 변화과정을 밝히는 식이었다. 
 

허가할 가(可)의 변화모습 장영진의 한자자원사전은 6000여자를 이렇게 하나하나 변천과정을 규명하고 뜻을 밝히는 작업이다. ⓒ 민병래

 
이 작업은 꼼꼼히 선정한 모두 6000여 자로 그리고 구천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그렇기에 난관이 많았다. 우선 문경이라는 시골학교 한문선생으로서 관련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자학' 자체에 대한 우리나라 연구가 부족한 실정이기도 했다. 또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학습 그룹이나 자문을 구할 선생이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중국이나 일본으로 유학간 제자들을 수소문해서 문헌을 구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하여 800여 종에 달하는 서적과 자료를 모았다. 그때부터 책과 씨름했다. 석박사과정을 거치지도 않았기에 연구방법론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오로지 읽고 또 읽어서 의미를 해독하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능력은 부족한데 교과수업을 하면서 연구를 병행하자니 시간도 부족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새벽시간, 그것도 '새벽 3시의 연구'였다. 그 시간은 '절대고요'의 시간이었다. '맑은 명상'을 할 수 있어서 깊게 몰입할 수 있었다. 

이런 연구의 시간을 보내며 그 스스로도 학문하는 즐거움에 깊이 빠져들었다.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 애가 탄 적도 많았다. 교재를 위해 출발한 일이 어느 때부터는 장영진에게 인생의 참 의미가 되어 버렸다.    
 

새벽연구에 몰두하는 장영진 그는 새벽 3시부터 연구와 집필을 시작했다 ⓒ 민병래

   

새벽연구에 몰두하는 장영진 그는 새벽 3시부터 연구와 집필을 시작했다. ⓒ 민병래

 
새벽 3시 절대정숙의 시간

그렇게 연구하는 동안 그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준 사람은 허신과 정약용이었다.

'허신(許慎, 30~124)'은 중국 동한 시대 때 관리이자 경학자였다. 그는 <설문해자>를 저술했는데, 이 책은 한자의 형태·음·뜻을 체계적으로 해설한 뛰어난 저작이다. 그는 이 책을 20여 년에 걸쳐 집필했고 수정·보충하는 데에만 22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 책은 수록된 표제자의 수가 무려 1만519자로 매우 방대한 규모이고 한자가 만들어진 방법에 대해 상형·회의 등 여섯 가지 방법이라고 중국 최초로 정의한 명작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 <설문해자> 를 경전처럼 높이 여긴다. 

'허신'은 저술과정에서 수많은 경전과 고문서를 인용하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결론을 유보하고 후학을 기다린다"는 정직하고 엄격한 자세를 지녔다. 장영진은 허신에게서 바로 이런 자세를 본받고자 했다.

정약용에게서는 그가 지은 <논어고금주>에서 많이 배웠다. 조선 후기 우리나라 대부분의 논어해설서는 주자학과 성리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다른 해석을 해도 사문난적(斯文亂賊, 주희의 경전해석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공격하는 말)으로 몰리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송시열이었고 숙종 때 북벌을 주장하던 개혁적인 선비 윤휴가 이 공격을 받아 유배되고 사약을 받기도 했다.

정약용은 21세 때 쓴 <술지>에서 이런 풍토를 한탄하며 "관념론적 주자학에 반기를 들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그의 학문태도는 <논어고금주>로 집대성됐다. 장영진은 정약용으로부터 바로 이런 '주체적'인 학문태도를 배우고 이 정신을 <한자자원사전>에 담고자 했다.

마지막 교정교열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별은 물러가고 동녘햇살이 다가와 교무실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복도에는 검푸른 바람 대신 새봄의 풋풋한 꽃기운이 살랑인다. 그는 책장을 마침내 덮었다. 최종 점검을 끝낸 것이다. 십여 년간 달려온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었다. 이제 출판사가 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장영진 그가 문경여고 복도에서 환한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다 ⓒ 민병래

 
멀리선가 아이들의 자지러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문창고등학교를 거쳐 이 곳 문경여고에 부임한 지도 꽤 됐다. 저 녀석들 덕분에 사실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수년간 작업한 파일 통째로 잃어버려
 
10년간의 저술 동안 최대의 고비는 2011년 8월 7일이었다. 그날은 일요일이면서 공교롭게 그의 생일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작업을 조금 일찍 끝내고 집에 돌아가 밥상을 마주할 생각이었다.

그는 항상 노트북에 원고의 주(主) 내용을 입력했다. 그리고 외장형 하드에는 초고나 주요 참고서적 정리본, 각종 고문자 파일 등을 담아 보관했다.

그런데 그날 외장형 하드에서 "뚜뚜"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먹통이 되고 파일을 불러올 수 없게 되었다. 마음이 다급하고 눈앞이 아득했다. 생일상이고 뭐고, 일요일이지만 새벽부터 전화를 돌려 이리저리 복구업체를 알아보고 겨우 수리를 의뢰했다. 기다리는 순간들은 아내가 분만실에 들어갔던 시간 같았다.

그런데 업체는 '복원불가'라며 분해된 외장하드를 보내왔다. 널브러진 녀석을 보니 숨이 콱 막혔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수소문해 2차 복원을 시도했다. 하지만 업체에서는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복원해, 엉뚱한 결과를 보내왔다.

상처가 컸다. 그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랜 작업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하니 그냥 멍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이었는데 체중이 급격히 빠졌다. 다들 "장 선생, 무슨 일 있어?" 걱정해주고 아내도 근심이 커 병이 걸릴 정도였다.

정작 더 큰 문제는 마음의 체중, 심지가 빠져나간 것이다. 추스려도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넋을 잃고 4개월여를 보낼 즈음, 갑자기 아이들의 웃음소리, 수다소리가 정겹게 들려왔다.

그때 장영진은 "그래, 내가 작업을 시작한 것이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희망을 위해서였지!?" 그렇게 다시 읊조렸다. 아이들이 의사였고 치유제였던 셈이다. 그리고 그 날부터 다시 출발해 오늘 마지막 교정작업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장영진 아이들과 교정에서 ⓒ 민병래

 
 

장영진 그가 교실에서 제자들과 밝게 한장을 찍었다. ⓒ 민병래

 
학교에서 집까지는 차로 불과 5분 거리, 장영진은 오늘 아내와 아침상을 제대로 차려 한 번 더 먹을 작정이다. 마무리 점검도 마쳤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차안에 이른 봄의 풋풋한 향기를 꾹꾹 눌러 담아 그는 집으로 향했다. 아내가 '차돌된장찌개'를 끓여놓겠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교직의 길을 붙잡아준 아내가 고마울 뿐이다. 장영진은 1985년에 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를 마치고 바로 문창고등학교에 부임했다. 그렇지만 첫 걸음은 순탄치 않았다.

열아홉살에 면서기가 되어
 
그의 고향은 경북 영양 청기면인데 그가 네 살 때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말았다. 졸지에 생계를 책임지게 된 어머니는 고작 한 뼘 정도 되는 땅뙈기를 파내며 4남매를 기르셨다. 가을에 추수해봤자 쌀 대여섯 가마에 불과해 수시로 날품팔이를 나가셨다. 30줄에 청상이 된 어머니는 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된 노동 탓에 어머니는 50 중반에 세상을 뜨셨다. 장영진은 어려서부터 어머니 고생을 늘 지켜봤기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그게 대학 4학년 2학기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한문 교사로 부임한 터라, 그는 6개월 동안 풍수지리만 공부하고 다녔다. 돌아가셨지만 어머니 묘자리나마 편안히 누워계셨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다 보니 그는 "이런 자세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까?"하는 큰 고민에 빠졌다. 그때 하숙집 아주머니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속내를 털어놓으니, 그녀는 "가정을 꾸리면 안정이 될 거"라며 지금의 아내를 소개해줬다.

그렇게 아내를 만나고 나선 순탄하게 교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가끔 꿈에 면서기가 되는 꿈을 꾸긴 하지만... 
 

장영진 문경여고 교정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한컷 ⓒ 민병래

  
사실 이 면서기 꿈엔 사연이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에 장영진은 큰 형의 권유로(큰 형님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안농사를 거들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공무원 시험을 봐 면서기가 되었다. 열아홉살에 경북 영양군 청기면사무소의 면서기가 된 것이다.

20대 초반까지 고향에서 했던 면서기일은 재미있었다. 거의 매일 같이 영양군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당시는 주민등록이 막 도입되던 시기여서 장영진의 주 업무는 주민등록신고와 날인업무였다. 호구조사를 위한 출장도 많이 다녔다.

그때 함백산과 팔수골 일대를 넘어 마을 마을마다 다니면, 동네 어르신들이 손잡아주시면서 새참도 챙겨주고 "그냥 가면 안 된다"며 막걸리도 받아주셨다. 연세 지긋한 할머니들은 "아버님 생각이 난다"며 한동안 눈시울을 붉히시다가 곶감과 김치보시기를 챙겨주시기도 했다. 한때는 지문날인을 하려고 손가락을 잡았는데 얼굴이 발그스름해서 도망간 아가씨와 편지를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런 기억이 지금도 선연하고 아련하게 남아있다.

그런 추억 탓인지 그는 지금도 가끔 면서기가 되는 꿈을 꾸곤 한다.

학교에서 출발한 지 5분도 채 안 돼 장영진은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여니 아내가 끓이고 있는 차돌된장의 냄새가 포근하게 다가온다.

<한자자원사전>이 출간되는 날, 그 책의 향기는 어떠할까?

못 다한 이야기

* <한자자원사전>은 2018년 4월 '심산문화'(대표: 최원필)에서 출간되었습니다.

* <한자자원사전>은 2018년 세종도서 학술부분(언어) 우수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선정 이유는 "이 책은 한자의 자원·자해에 관한 기존의 연구 성과를 능가할 정도로 그 자료의 방대함과 서술의 정밀함이 탁월하다. 저자는 자해·자원의 단순 해석을 넘어 동 내용과 동일하거나 유사한 사례들을 광범위하게 수집, 정리하고 매 글자를 분석하는 능력이 치밀하다. 실증적 훈고에 바탕을 둔 연구 태도는 동 분야 연구의 전범적 모델이 될 것이다"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 장영진 선생은 늘 자기 책상머리에 두 구절을 써 두고 경구로 삼고 있습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고 이를 수 있으랴
회사후소(繪事後素): 바탕이 하얀 뒤에야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장영진 프로필

1959 경북 영양군 청기면에서 출생
1978 영양고등학교 졸업
1978 영양군 청기면 사무소 근무
1981 계명대 사범대 입학
1985 경북 문창고등학교 한문교사로 임용
2001 문경여고로 전근 근무
2006 한자부수 214 출간
2018 한자자원사전 출간

장영진의 B컷

지면관계상 본문에 실리지 못한 좋은 사진들을 모자이크로 모아봤습니다. 
 

장영진의 b컷 장영진의 다양한 모습들 ⓒ 민병래

       
장영진을 만든 시간들
 

공무원합격통지서 장영진이 면서기가 될 때 치던 임용고시의 합격증서다 ⓒ 민병래

 
 

장영진의 초교시절 개근상장 장영진이 청일초교 1학년때 받은 개근상장 ⓒ 민병래

  

면서기시절 월급봉투 그가 영양군 청기면사무소에서 받았던 월급명세서이다. ⓒ 민병래

 
 

장영진의 고교시절 모습 장영진은 등교할 때 함박산 팔수골을 넘어 학교에 갔다. ⓒ 민병래

   

장영진의 고교3학년때 고등학교 3학년 때(1977년), 아침 등굣길에서 점심도시락을 미리 먹고 있는 모습(좌측에서 첫 번째) ⓒ 민병래

   

장영진의 공무원 교육시절 1978년 공무원 발령후, 신규 임용자 교육에서 찍은 사진(앞줄 우측에서 첫 번째) ⓒ 장영진제공

   

장영진의 서당교육시절 대학 2학년 때 여름(1982년), 경북 영양군 서적지에서 4주간 서당교육을 수료후 훈장선생님과 찍은 사진(맨 뒷줄) ⓒ 장영진제공

   

장영진의 수업모습 1990년 문창고등학교 3학년 학급 담임시절 교실에서 찍은 사진 ⓒ 장영진제공

   

장영진 1987년 지리산 천황봉 등정시에 찍은 사진 ⓒ 장영진제공

   

장영진의 교무실내 모습 1998년 무렵, 문자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관련된 참고자료 등을 모으고 정리하기 시작할 당시의 모습(정리한 파일이 쌓이기 시작함) ⓒ 장영진제공

   

문경여고 담임시절 장영진 2002년 문경여고 3학년 담임 때, 스승의 날 기념으로 찍은 사진 ⓒ 장영진제공

   

장영진과 가족들 2000년 겨울 동해 바닷가에서 가족과 찍은 사진 ⓒ 장영진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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